• 도 레 미 파 솔 라 시. 이 단순한 7음계를 기본으로 수 천 년이 넘게 흘러온 인류문명에 각기 다른 수 없이 많은 음악들이 창조되어져 왔다. 그와 같이 우리들 인간들의 삶도 천태만상으로 다양한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곡조의 수만큼이나 어느 것 하나 절대 같지 않은 기쁨의 소리, 슬픔의 소리들이 인생의 무대를 끊임없이 장식해가고 있을 것이다. 음악이 삶에 고단해진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듯, 진심에서 흘러나오는 슬픔과 기쁨의 소리는 세속에 오염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무려 64년여 간을 왕의 자리에 머물렀던 영국의 빅토리아여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를 확립하며 영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 빅토리아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사람은 장남인 에드워드7세였고, 그는 1901년부터 1910년까지 영국의 상징으로 그 자리를 지켰다. 다음에는 1910년부터 1936년까지 에드워드7세의 차남인 조지5세가 왕위를 넘겨받았다. 조지5세가 사망하자 그의 맏아들인 에드워드8세가 1936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간 짧게 왕의 자리를 거쳐 갔다.

    그의 직손으로 왕위계승자가 없자 에드워드8세의 동생이자 조지5세의 차남인 조지6세가 왕위를 물려받아 1936년부터 1952년까지 떠오르는 영국의 태양으로 군림했다. 현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2세는 조지6세의 큰 딸이다. 조지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2세가 빅토리아여왕을 이어 다시 여성의 몸으로 영국의 왕위를 지키게 된 것이다. 황태자 찰스는 엘리자베스2세의 큰 아들이 된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이혼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끈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이혼 후에도 각자 활기찬 비밀의 사생활을 유지했던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은 파파라치를 통해 많은 흥밋거리로 제공되기도 했다. 1992년 11월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한 다이애나는 유치원보모에서 일약 대영제국의 황태자비가 됨으로써 살아 있는 신데렐라로 많은 여성들의 시샘을 한 몸에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혼 후 1997년 8월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고민의 시간을 마감하게 된다.

    다이애나가 숨을 거두자 찰스는 오랫동안 사실상 내연관계에 있던 카밀라 파커 볼스와 2005년 4월 재혼했다. 찰스는 다이애나와 결혼 전부터 이미 유부녀인 카밀라 파커 볼스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터였다. 무지개의 꿈을 안고 영국 왕실에 들어온 다이애나는 이들의 공공연한 불륜에 맞바람으로 저항하다 엘리자베스여왕의 적극적인 협상과 중재 그리고 지시로 결국 이혼하여 그 후 은밀한 자유를 추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찰스의 새 아내가 된 카밀라 파커 볼스의 외증조모가 바로 빅토리아여왕의 장남이자 찰스 황태자의 고조부인 에드워드7세의 정부였으니, 영국 왕실 내의 치정에 얽힌 복잡한 사정은 혀를 내두르기에 충분할 것이다. 에드워드7세의 여성편력은 그토록 막강한 권위를 지녔던 빅토리아여왕도 쩔쩔매게 할 정도였고, 네 자녀 중 세 자녀가 이혼경력이 있는 엘리자베스2세의 고충도 가히 짐작할 만한 사항이 된다.

    이것만이 아니다. 찰스와 다이애나의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결혼식이 ‘세기의 결혼’이었다면,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진 에드워드8세와 이미 한 번의 이혼경력이 있는 심프슨부인으로 불리던 미국인 유부녀와의 관계는 ‘세기의 사랑’이라고도 일컬어져 왔다. 에드워드8세는 심프슨부인과의 만남 전에도 많은 여성들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심프슨부인은 두 번째로 결혼한 남편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에드워드8세와의 염문을 가림 없이 세상에 뿌려대고 있었다. 에드워드8세는 심프슨부인의 남편인 E.심프슨에게 은근히 이혼을 종용하기도 했다.

    외면상의 이유는 심프슨부인의 도움 없이는 왕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것과 국왕이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을 금하는 영국왕실법이 걸림돌이 되었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 속사정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에드워드8세는 1년 간 썼던 왕관을 벗어던지고 ‘윈저공’이 되어 그녀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후 외국을 전전하며 호사한 생활을 하다 윈저공은 1972년 5월에, 그의 부인 심프슨부인은 1986년 4월에 사망한다.

    그들의 결혼을 둘러싼 각색된 극본은 여러 사람들의 순진한 심금을 울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 내막에 대한 어둠도 서서히 걷혔고, 그들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가 복잡한 타래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꾸며진 화려함과 커다란 권위 뒤엔 인간들의 저열한 행동과 치사한 마음들이 잔뜩 도사리고 숨을 쉬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금요일 저녁은 주중 차량 통행이 최고조로 증가하는 때가 된다. 직장인들의 한가한 주말 행사가 시작되는 시간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40대 후반의 한 여인이 노새에 연결된 고삐를 잡아끌듯 차를 골목길로 당겨대고 있었다. 짐을 실어야하니 그곳으로 들어가 주길 점잖게 부탁한 것이다. 예의를 저버릴 수 없어 과감하게 좁은 길을 접수하여 한동안 도로를 폐쇄해버렸다.

    부지런히 달려 집으로 들어갔던 그 여인이 바쁘게 야채며 음식재료들을 옮겨와 트렁크에 싣고는 한아름 되는 솥을 안고 앞자리에 앉았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출렁이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야채만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될 정도로 모든 마련을 다하고 집을 나서는 길이었던 것 같았다.

    “우리 아저씨가 차를 보내준다고 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안 오네요...”
    “어디 잔치하러 가세요?”
    “아니요... 그냥 일하는 어르신들 음식 좀 해드리려고요...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하거든요...”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택배일이요...”

    고속도로 입구에 차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있었다. 평상시 같으면 20분 남짓이면 충분할 거리인데 시간을 예정할 수 없을 만큼 차는 제자리걸음하듯 기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