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3일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어제 평양에서 끝난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추위) 제13차 회의에서 남측은 쌀 40만 t을 5월 말부터 차관 형식으로 북에 제공하기로 했다. 10개항 합의문에는 지난해 무산됐던 경의·동해선 열차 시험운행을 다음 달 17일 실시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러나 북핵 폐기를 위한 2·13합의 이행과 연계하는 데는 실패했다.

    정부 당국자는 “북측에 2·13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쌀 지원이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지만 합의문에 이를 명문화하지는 못했다. 우리 측이 ‘2·13합의가 원만하게 이행되도록 공동 노력한다’는 문구를 넣자고 했지만 북측이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이다. 문서화된 합의도 밥 먹듯이 깨는 북이 말뿐인 약속을 과연 지킬지 의문이다.

    북한은 19일 첫 전체회의에서도 식량차관 제공합의서의 사전 교환을 요구하며 8시간 가까이 회의를 지연시키다가 우리 측이 응하지 않자 개회 직후 일방적으로 퇴장했다. 이런 식의 억지와 무례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남북 경추위를 오로지 남한의 지원을 얻어 내는 ‘통로’로만 보고 있음을 거듭 확인시켜 준다. 2·13합의 이행 여부도 지켜보지 않은 채 2월 말 장관급회담 때부터 쌀 지원을 기정사실화한 우리 정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열차 시험운행도 ‘(북측의) 군사적 보장조치가 취해지도록 적극 협력한다’는 모호한 문구로 미봉했다. 이 또한 군부가 절대 우위인 북한의 권력구조상 그때 가 봐야 알 일이다. 북은 작년에도 열차 시험운행을 하기로 날짜(5월 25일)까지 잡아 놓고도 하루 전날 “군부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고 둘러대며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정부는 “이번에는 경공업 자재 8000만 달러 지원과 맞물려 있어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하지만 역시 두고 봐야 한다.

    정부는 북한이 2·13합의 이행 시한(60일)을 지킬 것으로 예상해 중유 5만 t의 선적계약까지 미리 했다가 계약 해지로 세금 36억 원을 날렸다. 북의 선의(善意)를 믿었다가 당하기만 하는 것은, 이렇게라도 북을 도와줘야 남북관계가 풀리고 국내 정치적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정략이 깔린 환상’ 탓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