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 김교준 정치부문 에디터가 쓴 '신 북인정권'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가대하며 소개합니다.

    남인.북인.노론.소론으로 갈리는 4색 당쟁에서 북인이 정권을 잡았던 적이 있다. 선조 후기~광해군의 20여 년이 조금 넘는 시기의 일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일 강경투쟁을 주장한 북인은 정국 주도권을 쥐었다. 남명 조식 문하의 북인은 곽재우.정인홍.김면.조종도 등 가장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다. 명분의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권력을 손에 쥐면서 북인은 분열한다. 선조의 후계 문제를 놓고서다. 광해군은 서자이면서 둘째 아들로 세자가 됐다. 그래서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다. 광해군은 세자 책봉 이후 16년간 함께 정사를 다룬 노장파인 대북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선조의 두 번째 정실왕후인 인목왕비의 아들 영창대군은 소북이 밀었다. 대북은 아기인 영창대군이 어떻게 국정을 돌보느냐고 했고, 광해군과 인연이 적은 소장파 중심의 소북은 왕통은 당연히 적자가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란의 와중에 1608년 선조가 갑자기 사망한다.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명실상부한 북인, 그중에서도 대북 정권이 출범한다. 하지만 권력의 핵분열은 예나 지금이나 필수인 것 같다. 대북이 강온파로 나뉘면서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폐위를 요구한 골북, 육북과 이에 반대한 중북이 충돌한다. 소북은 소북대로 선조 후기 권력에서 밀려난 청소북과 왕의 신임을 받았던 탁소북으로 갈라진 상태였다.

    이 같은 북인의 다툼은 끊임없이 조정을 시끄럽게 했다. 국론 분열의 원인이 되었으며 정치 불안을 가져왔다.

    흥미로운 부분은 노무현 정권과 그 당시 북인이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정치 행보를 보인다는 점이다. 우선 북인이 임진왜란 때 선조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의병에 적극 가담한 대목이 그렇다. 현 정권의 주력인 '386 운동권'의 투쟁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근거 지역은 조식이 은거한 경상하도, 즉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진주 지역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고향과 겹쳐 눈길을 끈다.

    지금 여권은 개혁과 실용을 둘러싼 노선 투쟁 끝에 친노와 비노로 나뉘어 있다. 현실을 중시한 대북과 명분에 집착한 소북이 대비되는 부분이다.

    또 명나라를 섬기는 사대주의를 고집한 이전 정권들과 달리 광해군은 명나라와 신흥 강국인 후금(훗날의 청나라) 사이에서 등거리 실리 외교를 폈다. 현 정부의 자주외교 노선과 오버랩된다.

    경제 부문에도 있다. 광해군은 즉위 첫해 조선의 가장 중요한 세제 개혁인 대동법을 경기도에 시범 실시한다. 그 전에는 세금을 집집마다 일률적으로 매겨 양반 지주나 가난한 평민이 같은 액수의 공납세를 냈다. 하지만 대동법은 토지 규모에 따라 걷는다. 넓은 농토를 소유한 부자들은 많은 세금을 내고, 땅 없는 사람은 안 내는 제도다. 당연히 양반 부자들은 격렬히 반발했고, 서민들은 환영했다. 세금 폭탄 논란을 부른 종합부동산세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도 많은 사학자가 폭정의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의 실각을 안타까워한다. 북인 정권의 개혁 정책에 평가할 부분이 많아서다.

    광해군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로 서울을 옮기려고 백성을 동원해 성을 쌓고 땅을 고르는 공사를 하기도 했다. 현 정권의 수도 이전 불발 및 행정수도 이전 계획과 맞아떨어진다.

    북인이 다툼 끝에 대북.소북.골북.육북.중북.청소북.탁소북 등으로 핵분열을 하는 모습을 보면 여권이 열린우리당, 민주당, 통합신당모임(김한길 등), 민생정치모임(천정배 등), 손학규.정운찬 지지파로 갈리는 것과 흡사해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아무튼 북인의 이런 분열은 정적인 서인과 남인에게 틈과 명분을 주었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하루아침에 정권을 빼앗긴다. 그러고 나서는 소수의 경제.외교 전문가가 실무 차원에서 기용된 것을 제외하고 정권 근처에 접근하지 못하고 소멸했다. 범여권이 새겨 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