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란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나는 억울하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는 첫인상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사람은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좋은 첫인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덕(지혜와 덕)을 겸비한 인물'로, 나쁜 인상을 갖고 있었다면 '재승박덕(才勝薄德. 재주는 뛰어나지만 덕이 없음)의 인물'로 평가한다. 컴퓨터라면 첫인상 따위에 현혹되지 않겠지만 인간은 그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심리학자 애시가 실험을 했다. 특정인에 대한 정보를 A 집단에는 '똑똑하다→근면하다→즉흥적이다→비판적이다→고집이 세다→시기심이 많다'는 순서로, B 집단에는 그 역순으로 주었다. 그 결과 A 집단은 B 집단에 비해 그 사람을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똑같은 정보라도 앞서 입력된 정보가 뒤에 입력된 정보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이민규,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

    정치에서도 첫인상이 성패를 판가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 덕을 톡톡히 봤다. 그는 1988년 13대 총선을 통해 정치에 입문하자마자 '5공 청문회 스타'로 떴다. 불과 얼마 전까지 국민 위에서 무소불위(無所不爲)로 군림하던 군사정권의 실력자들의 잘못을 파헤치고, 조근조근 따지고, 속 시원하게 패대기쳤다. 그 뒤 그는 3당 합당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에 DJ의 민주당 후보로 몇 차례 부산에서 출마했다.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정치인'이란 이미지가 뒤따랐다.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데에는 그에 대한 인상이 큰 몫을 했다.

    첫인상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거기에 나의 자발적 지원과 사랑이 덧칠돼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 내가 표를 주고 탄핵에서 구해준 대통령을 미워하고 등 돌리기가 어찌 쉬웠으랴. 대통령과 측근들의 말에 끊임없이 상처받고, 그 능력에 거듭 실망하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됐다. 기업은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이미지를 판다는 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브랜드'는 이미 신뢰를 잃었다. 그래서 개헌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국민조차 '노무현표 개헌'에는 반대한다. 이제 국민은 "당신이 하는 것은 뭐든지 싫다"고 외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인지체계에 부조화가 발생할 수 있는 정보와 상황을 적극 회피하려 한다. 50년대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사이비 종교 교주가 종말론을 들먹이며 신도들의 재산 헌납을 유도했다. 그러나 예언의 그 시각에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자 교주는 "여러분의 믿음 덕분에 전 세계가 구원받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도들의 반응이 흥미롭다. 교주에게 항의하기는커녕 기뻐하며 축제를 벌였다. 교주에게 분노할 경우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했기에 차라리 자신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나아간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cognitive dissonance)'이론이다. '줄기세포 파문' 이후 황우석 지지자들의 행태를 분석하는 데 이런 이론을 원용하기도 한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 사람들도 이런 징후를 뚜렷이 보이고 있다. 거의 자기최면에 빠진 상태다. "소득 양극화 문제를 빼고는 정책적으로 잘못한 게 없다"고 하소연하고 "민주세력은 무능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한마디로 "나는 억울하다"는 것이다. 너희가 잘못했다고 빡빡 우기는 길을 택한 것이다. 잘못은 대통령과 국민 간의 '소통'을 막고 왜곡하는 언론에 있다, 대통령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야속한 국민에게 있다는 식이다. 합리적 판단을 못하고 자신의 합리화에만 몰두해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봤는데 안 되더라"고? 언제 그랬는지 국민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 국민의 지지에는 신경 안 쓰고 양심껏 소신껏 가겠다"고? 그건 양심수나 확신범이라면 몰라도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다. 바로 그런 잘못된 확신과 낮은 차원의 진정성이 지지자들마저 등 돌리게 만든 주범이다. 남은 1년도 그렇게 보낼 작정인가. 그렇다면 국민이 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