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란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박정희 재평가' 열기가 정점에 달했던 1997년 나는 중앙일보의 '실록 박정희 시대' 시리즈의 취재팀장을 맡았다. 당시 편집국장은 나에게 "유신정권의 피해자였던 언론인 조모씨는 그 시대를 파고들다가 오히려 '박정희 매니어'가 됐다"며 "당신이 연재가 끝난 뒤 어떤 평가를 하게 될지 궁금하다"고 했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70년대에서 보냈기에 나는 그 말을 부인했지만, 그 해 말 연재를 마치면서 우리 팀이 낸 결론은 '공(功)과 과(過)를 논할 수 있는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당시 취재 도중 만났던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과 청와대 수석들의 진술 중에 믿기 어려웠던 두 가지가 있다. 10.26 다음날 새벽 아버지의 유고 소식을 전하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처음 보인 반응이 "휴전선은 괜찮아요?"라고 했다는 게 그 하나다.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거나 울음부터 터뜨리는 게 정상 아닌가. 이 사람들은 박 전 대통령에 이어 그 딸까지 신화로 덧씌우려 하는 건가. 그 의혹이 다소 풀린 것은 지난해 5월 박 전 대표가 테러를 당했을 때였다. 당시 그는 "난 괜찮아요" "오버(정치적 과잉 반응)하지 마세요" "대전은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대통령의 눈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더욱 황당했던 말은 "근혜양의 꿈이 대통령"이라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박 전 대표는 정치 근처에도 가 있지 않았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것은 다음해인 98년 보궐선거에서였다. 그런 그가 9년 만에 대선 예비후보 중 지지율 2위에 올라 있다.

    박 전 대표는 20대 초반에 어머니를 흉탄에 잃으면서 퍼스트 레이디 생활을 시작했다. 20대 후반에는 아버지마저 그렇게 잃었다. 그 후 10여 년은 아버지의 명예 회복에 바쳐졌다. 98년 출판된 그의 일기 모음인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 삼아'를 보자. "자나 깨나 꿈과 희망이 있다면 아버지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아 역사 속에서 바른 평가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 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건 그의 나이 40세 되던 때부터였다. "이제 비로소 나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나의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생각하게 되었다(91년 1월 6일)." 그런 박 전 대표가 최근에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연상케 했던 헤어스타일까지 바꾸었다.

    정치인 박근혜로 홀로 서기로 작정했다면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한 법원의 무죄 판결과 긴급조치 관련 판사의 명단 공개에 대해 "나에 대한 정치공세"라고 한 것은 이상하다.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선 시기에 잇따라 이런 발표가 나오는 데 대해 그런 의혹과 불만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겠다면 그런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뚜렷한 견해를 내놓고 국민의 동의 여부를 물어야 한다.

    "권력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생사람을 잡을 수도, 그 가족의 가슴에 영원히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89년 11월 3일)." 박 전 대표 일기의 한 대목이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의 억울한 목숨이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한 가족의 가장이었으며, 생때같은 자식이었다. 그들은 법원 판결 18시간 후에 전격적으로 사형당했다. 시체조차 온전히 유족에게 넘겨지지 못했다. 가족들의 가슴엔 피멍이 들었다. 그 세월이 30년이다. 남몰래 흘린 눈물이 많았던 박 전 대표이니 이들의 한과 아픔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수 있을 것 아닌가.

    대선에 나선 이상 아버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건너뛸 도리는 없다. 이미 아버지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에 비견되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애써 아버지에 대한 왜곡을 벗겨놓으면 새로 왜곡을 시작한다(90년 2월 7일)"며 안타까워하던 시절도 이미 지나갔다. 지금이 박 전 대통령 시절의 역사적 그늘에 대해 짚고 갈 적기다. 유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희생자의 무덤에 찾아가 위로의 술 한잔 올리는 걸 망설일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