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문창극 주필이 쓴 칼럼 '대통령의 자리'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신문의 사설을 책임진 입장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말은 언제나 고민거리다. 대통령의 말로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들 때 이를 비판하는 사설을 쓴다. 그러나 대통령의 말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대통령이 말할 때마다 비판의 사설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신문은 비판하고 대통령은 거기에 반박하고, 신문은 다시 비판하고 대통령은 재반박하고…. 마치 깊은 수렁에 빠져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진흙탕 구덩이를 나오려면 한쪽이 참아야 한다. 누군가 먼저 고리를 끊어야 한다. 그래서 노 대통령의 말에 관한 비판 사설은 자제하기로 정했다. 이런 악순환은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를 생각해서다. 대통령이 계속 상처를 받는다면 우리나라 대통령직이 국민의 조롱거리가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지난주 한 노조위원장이 정부의 고위 공무원들이 모인 공개석상에서 대통령의 말에 대해 충고를 했다. 대통령도 이 공개적인 충고에 몹시 상처를 입은 듯싶었다. 그 충고의 내용은 대통령과 근거리에서 허물없이 지내는 사람이 할 수 있을 법한 얘기였다. 어떻게 보면 노조위원장이 용기 있는 발언을 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보도를 접하며 착잡해졌다. 대통령에게 이런 식의 말을 하고도 무사하니 정말로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만개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 노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대통령직이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정도로 추락했는가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대통령직이 존경받지 못한다면 이 나라의 어떤 자리가 존경받을 수 있을까. 나라의 어느 자리, 어느 직책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나라는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

    우리는 지난 시절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 권력에 억눌려 지내왔다. 경제개발 시대에는 공무원들의 위세에 눌려 지냈고 5공 군사정권 때는 군인들에게 겁먹었다. 안기부니 보안사니 하는 정보기관들의 횡포도 겪었다. 청와대는 그 이름만으로도 국민을 주눅 들게 만드는 곳이었다. 노 대통령 시대의 가장 큰 성과는 이러한 권위주의 기관의 완전한 해체다. 앞에서 보듯 이제는 면전에서 대통령이 공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겁낼 사람도 없다. 모두가 계급장 떼고 일 대 일로 붙는 사회가 됐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이 될까. 혼돈이다. 혼돈의 끝은 다시 힘센 자의 세상이 되는 것이다.

    국가기관의 권위주의나, 이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권위주의를 허문 것은 잘한 일이지만 각 기구나 직책이 가져야 할 마땅한 권위까지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정권 사람들은 자해(自害)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대통령 스스로가 대통령직에 대한 권위를 허물고 있다. 대통령이 "군대 가면 썩는다"고 말할 때 누가 군통수권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겠는가. 대법원장이 "검사 수사기록을 집어던져라"고 말할 때 개혁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사법부 수장이 사법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사회 제도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적인 사회 제도 중 하나가 언론이다. 대통령이 그 언론을 향해 "불량상품"이라고 말한다면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자는 것이다. 개인적 경험이 어떠하든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대통령은 언론의 역할과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 체제가 지켜진다.

    지금 이 나라는 권위의 위기를 맞고 있다. 권위주의를 허문다며 합당한 권위까지 상처를 입히고 있다. 각 기관들이, 또는 그 직책들이 받아야 할 합당한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경찰의 권위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폭력시위가 판치는 것이다. 애국심은 나라의 권위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권위는 자발적인 수긍에서 나온다. 내 나라를, 그 제도를 명예롭게 생각할 때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을 외치는 것은 우리 국토와 역사와 민족이 자랑스러울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제도와 기구가 자랑스럽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제도와 기구를 지켜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대통령 개인은 5년 임기를 끝내면 자연인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대통령직은 나라가 있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제부터 우리는 대통령 개인을 넘어 대통령직의 소중함에 더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자리가 권위와 존경을 잃어 버린다면 대한민국이 비참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