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란에 이두아 변호사가 쓴 '흘러간 물은 흘러간 대로'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1980~90년대 법률가를 희망했던 모든 예비 법조인들의 ‘우상’이었다. 불혹을 갓 넘긴 나이에 사상 최연소 대법관이 되었고 기억에 남는 숱한 명판결을 남긴 우리 시대의 판사. 비록 ‘소수 의견’이라는 울타리에 갇혔지만, ‘엄혹하던 시절에 이런 판결을 쓴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다. 이 판결을 읽으면 등골에 전율이 흐른다’던 교수님들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는 머릿속으로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고 법치주의를 역설하는 아름다운 원칙주의자 이회창 대법원장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그것은 축구 꿈나무들이 차범근을 숭배하고 야구 꿈나무들이 박찬호를 우러르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회창은 대법원장이라는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역사의 부름에 화답하며 법조계 바깥의 세계를 향해 닻을 올렸다. 1997년 대선 낙선에 이어, 그가 필승을 자신하던 두 번째 대선에서 패배한 날이 바로 4년 전 오늘, 2002 년 12월 19일이다. 투표일 오후, 이회창 캠프의 관심사는 집권 이후의 밑그림이었다. 핵심 3인방은 점심을 함께 들며 사전에 작성해 놓은 정권인수위원회의 인원명단을 점검하고 있었다 한다.

    제3자가 보더라도 그것은 정말로 믿기 어려운 패배였다. 당선 가능성이 워낙 높았기에 재사(才士)들과 정보가 이회창 캠프로 몰렸으니까. 그래서 누군가는 선거가 끝난 후 ‘이 총재께서는 임기 6개월짜리 대통령을 두 번 하신거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바로 다음날, 이 총재는 눈물을 흘리며 장렬하게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가 약속하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 우리 헌법의 이념이 실현되는 사회’를 꿈꾸며 그에게 인생의 일부를 바쳤던 사람들도 눈물로 자신의 인생의 일부를 흘려 보냈다. 그리고 그는 잊혀진 인물이 되어 역사의 저편으로 유유히 흘러갔다.

    그런데 불꽃은 꺼진 것이 아니었나 보다. 차기 대선이 1년 앞으로 박두한 지금, 한 대학특강에서 ‘상유십이 순신불사(尙有十二 舜臣不死·아직 배 12척이 남았고 이순신이 죽지 않았다)’라고 한 이회창 전 총재의 말 한마디가 정치권에서 일파만파를 부르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이 인용문이 다시 한 번 대선에 도전하겠다는 이 총재의 의사표현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지난 대선에서 여권이 폭로했던 김대업 사건, 기양건설 사건, 20만달러 수뢰사건 등은 대법원의 재판 결과 모두 조작이었음이 드러났다. 사실이 아닌 일들이 진실인양 유포되고 그 결과 대선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떨어졌다면 그 억울함은 누구도 풀어주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80~90년대 예비 법조인들의 우상이던 이회창 총재는 개인적 은원(恩怨)이나 이해 관계에 매달리실 분이 아니다. 본인이 전면에 나서 다시 한 번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는, 한나라당의 후보군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열과 성을 아끼지 않을 커다란 그릇이다. 아무리 위대한 배우라 하더라도 언제까지 주인공일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이 있는 법이다. 선수가 아니라 응원단 역할을 해야 한다면 왜 일말의 섭섭함이 없겠는가.

    하지만, 이회창 전 총재는 자신의 정계복귀에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아첨이나 아부에 흔들리지 않을 터이다. 그분은 한국 정치의 ‘큰 어른’이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한다고 굳게 믿는 그분을 두고 대선에 재출마하네 신당을 창 당할 예정입네 하며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역사를 살피노라면, ‘어떤 사람들은 위대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함을 이루고, 어떤 사람들은 위대함을 떠안는다’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된다. 역사의 물길이 굽이치는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로 자신의 됨됨이나 역할이 가리키는 것보다 훨씬 큰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 사람들이 세 번째 부류인 ‘위대함을 떠안은’ 사람들이리라.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대통령을 떠안고 있는 이 시대 선거권자들은 이회창 전 총재가 역사의 미묘한 결들을 살펴 이 시대에 맞는 ‘자신만의 위대함’을 이루리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