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서양사 전공)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990년대 후반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폴란드 주재 북한 대사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김평일은 부임 이후 6개월 이상 폴란드 정부의 신임장을 제정받지 못해 바르샤바 외교가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이유가 흥미롭다. 김일성 사후 ‘유훈통치’ 아래의 북한 당국은 공식적인 외교문서에 김일성의 서명을 담아 보냈고, 폴란드 정부는 죽은 사람의 서명이 담긴 문서는 인정할 수 없다며 반송했다. 이에 북한은 ‘유훈통치’ 기간이므로 김일성의 서명이 정당하다고 맞섰고, 폴란드 정부는 다시, 죽은 사람이 어떻게 서명할 수 있냐며 팽팽하게 대치했다.

    이 에피소드가 내게 흥미로운 것은 북한이 다른 세계와 관계 맺는 독특한 방식, 그리고 그 방식 밑에 자리잡고 있는 북한의 독특한 집단 심성을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핵실험 직후 방북한 미국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북한을 해치려 하는 것은 북한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북한 주민들의 주장은 우물 안 개구리 식 유아(唯我)주의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북한의 핵실험 전에 열린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 당시 남한의 증대되는 국제결혼이 민족의 혈통적 순수성을 해친다는 북측 대표의 엉뚱한 비난에서도 이들의 집단 심성은 잘 읽힌다. 1972년 주체사상의 확립과 더불어 외국인과 결혼한 모든 북한인을 강제 이혼시키고, 외국인 배우자와 혼혈 2세들을 강제 추방한 북한이고 보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아리안과 열등 인종 간의 결혼을 금지한 나치의 인종주의적 정책을 연상시키는 북한의 인종주의는 ‘우리 민족 제일주의’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위정척사운동’의 21세기적 버전인 ‘우리 민족 제일주의’의 ‘우리’에는 실질적으로 남한이 배제된다. 통일은 수사학의 영역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남북대화가 아니라 북미 직접대화를 향한 북측의 끈질긴 고집에서도 그것은 잘 관찰된다.

    물론 북미 직접 대화가 현실적으로는 한반도의 긴장을 푸는 가장 실용적인 방안일 수 있다. 현대판 정치 왕조의 자식들로, 젊어 한때는 망가진 세월을 보냈고 이제는 회개한 정치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김정일과 부시 2세는 여러 모로 닮은꼴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각별히 둘 사이에는 인간적 이해의 폭이 넓을 것이다.

    북미 대화를 거부한 부시 행정부의 강경책이 북한을 핵실험이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다는 조지 소로스의 분석도 상당히 타당하다. 미국이 못살게 굴지 않으면 추가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는 북한의 신호는 그의 분석이 타당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은 동아시아에서 관철되고 있는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공모 행위이다. 북한 핵문제를 푸는 열쇠를 미국에 넘겨 버림으로써, 북한 당국은 미군의 존재가 없으면 동아시아는 고전적 의미에서의 국민·국가 간의 전쟁터가 될 것이라는 미국 정부의 가정을 정당화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동아시아의 균형자는 다시 미국인 것이다.

    워싱턴 정가의 호들갑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북한의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에 대한 미국 군부의 진단은 냉정하다. 미국 북미사령부 키팅 사령관의 평가처럼 그것은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의 반응이 북한의 핵 자체보다는 확산 방지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어렵게 성취한 한반도의 비핵화 원칙을 깨트린 북한의 핵실험으로 위협받는 것은 결국 한반도의 주민들이며, 동아시아의 핵 도미노 가능성은 동아시아 전체 주민들의 삶을 위협한다. ‘미제’는 핵무장한 북한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헤게모니를 지속시키기 위해 이용할 뿐이다.

    북한의 ‘민족 핵’이 민족 자주의 무기가 아니라 미국의 헤게모니를 방조하고 정당화하는 ‘친미’의 도구임을 한반도의 얼치기 민족주의자들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