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 '광화문에서'란에 이 신문 윤승모 정치부 차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광화문에서/윤승모]윤승모 정치부 차장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 처리 여부는 한나라당이 열쇠를 쥐고 있다. 전 후보자의 임명 동의에 반대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투쟁의 선두에 김형오 원내대표가 있다. 강재섭 대표도 “그 건은 원내대표에게 일임했다. 나는 잘 모른다”고 할 정도다. 지도부가 철저하게 역할을 분담해서 투쟁을 이끌어 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평가는 달라진다.

    한나라당은 애초 정부가 보내온 헌재소장 임명동의안을 받아들여 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참여했다. 민주당 조순형 의원이 ‘헌재소장은 헌재 재판관 중에서 임명한다’는 헌법 조항을 들어 청문회의 위헌 소지를 지적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음 날, 당내에서 위헌 청문회를 거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김 원내대표는 반대로 움직였다. ‘목소리 큰’ 당내 인사에게 전화를 걸어 “문제제기를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여당 원내대표에게도 ‘청문회를 계속하겠다’고 전했다. 이미 청문회에 한발을 들여놓은 이상 중도에서 발을 빼는 것도 모양이 우습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러나 상황은 김 원내대표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원내대표 책임론이 나올 지경이 되자 그는 180도 방향을 바꿔 노무현 대통령의 지명 철회와 전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들고 나왔다. 그게 한나라당 대여 투쟁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뒤늦은 삿대질이었다.

    스스로 ‘위헌’이라고 규정한 청문회에 협조한 한나라당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남의 잘못을 비판하려면 내 잘못부터 인정하고 사과하는 게 순서다. 그래야 비판에 무게가 실린다. 한나라당은 지금 일관되게 헌재소장 임명동의 처리는 국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국헌 문란에 협조했던 자신의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탓만 하는 한나라당의 ‘투쟁’에 누가 공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속내를 한나라당 사람들은 모두 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책임론이나 반성론을 제기하지 않는다. “원내대표가 알아서 하는 것이니 나는 모른다”며 오불관언이다.

    한나라당에서는 중구난방의 비방전이 수시로 벌어진다. 17일에는 국방전문가를 자처하는 한 여성 초선의원이 당사에 찾아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반대 방미단에서 왜 자신을 뺐느냐며 지도부에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초선의원일수록 목소리는 크고 행동은 제각각이다.

    그런 당에서 유독 이번 사태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도 문제를 삼지 않는다. 섣불리 남의 책임을 입에 올렸다가 어느 순간 자기에게 화살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피해의식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전시작전권 환수 문제와 관련해서도 보수단체들에 떠밀려 뒤늦게 반대 시위에 동참한다고 했다가 의원들이 모이지 않아 망신을 산 일도 있다. 그러니 무슨 일인들 자신 있게 하겠으며, 제대로 되겠는가.

    한나라당 사람들은 말한다. 현 정권이 연장되면 나라가 정말 어려워진다고. 그러나 나라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꼭 집권세력만이 아니다. 야당의 능력도 정치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 중의 하나다. 거창한 목표도 필요 없다. 각자가 자기 직분에 충실하고, 책임질 때 책임을 지는 야당이면 된다. 그런 야당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