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교적 수사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글은 드물다. 특히 정상회담이 끝난 뒤에 나오는 공동성명이나 공동언론발표문은 마치 암호와도 같아 특별한 해독법이 필요하다. 가령 양국 정상이 회담을 마친 다음 "두 정상은 양국 간에 어떠한 문제도 존재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했다"라는 수사가 나온다면 그것은 특별한 현안이 없이 만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반면 양국 정상이 회담을 마친 다음 "솔직하고도 지극히 대담한 의견교환이 있었다"는 수사가 나온다면 그것은 둘 사이에 심각한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두 가지 수사 중에서 어느 경우든 공동성명이나 공동언론발표문을 통해 정상회담의 결과가 발표된다는 것은 적어도 양국간에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흘 앞으로 다가온 한미정상회담에서는 공동성명이나 공동언론발표문 등의 공동문서를 채택하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2006. 9. 11, 동아일보)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에 대한 두 정상의 심각한 견해차 때문에 회담 직후 기자회견만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미정상회담이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끝난다는 것은 현재 양국 관계가 결코 정상(正常)이 아님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 한미정상회담은 이번이 6번째다. 그 중에서 공동문서가 채택되지 않은 회담은 2004년 11월과 작년 6월에 이어 이번이 3번째다. 우려스러운 것은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상견례 또는 탐색의 성격을 띠었던 2003년의 2차례 한미정상회담을 제외하고 2004년 이후 해외에서 열렸던 한미정상회담에서는 모두 공동문서를 채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공동문서 하나 채택하지 못한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간의 토론이 얼마나 내용 없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을까 하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의 한미관계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와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불안하기만 하다. 이는 전적으로 노 대통령의 비정상적인 대미외교에서 초래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노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은 나를 좋아한다"거나 "만나보니 아무 문제가 없다"라고 국민들에게 말해왔다. 노대통령의 외교감각은 다음 문제로 치더라도 정말 상황판단에는 문제가 없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이 점에서 최악의 상태에 와있는 한미관계는 노대통령의 상황판단 미숙에 따른 결과이거나 아니면 국내정치적 목적에 따라 의도적으로 쏟아낸 언사로 인해 미국의 불신을 초래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한미관계를 끊임없이 겉돌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의제인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북한 핵과 미사일을 북한의 체제 보안용으로 보는 반면 미국 정부는 대량살상무기 억제와 동북아 질서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노대통령과 통일부 장관은 미국의 북한 핵과 미사일 정책이 실패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였고 미국은 노무현 정부의 이런 견해에 불쾌감을 갖고 있다. 또한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대북압박정책에 대한 반감을 공개적으로 천명해왔으나 미국은 대북압박을 통해 북한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굳히고 있다.

    대북문제에 대한 한미간의 심각한 입장 차이로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노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웃으면서 악수하는 모습의 사진과 노대통령의 요구에 따른 전시작전통제권(이하 작통권) 환수 합의라는 결과물 외에는 한미관계의 복원을 위한 어떠한 결과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의 내용보다는 "만나보니 (한미관계는) 아무 문제가 없다"거나 "한미관계를 탈 없이 조정했다"면서 국민들에게 한미관계에 문제가 없다고 호도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작통권 환수의 지속적 추진, 대북 지원 등과 같은 선동적 정책을 그대로 밀어 부칠 것이다.

    그 결과 한미관계는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미 한미관계는 "미국이 한국을 못 믿어 정보공유를 하지 않고 있다"는 야치 쇼타로 일본 외무차관의 발언대로 심각한 지경에 와 있다. 미국이 이처럼 한국을 믿지 못해 정보공유를 꺼릴 정도라면 그것은 한미관계의 균열(龜裂)이 바로 턱 밑까지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미국 하원 아태소위원회의 짐 리치 위원장은 "한국이 자주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와 거리를 두는 것은 단기적으로 정치적 이득이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현명한 정책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윈스턴 처칠은 "동맹보다 더 나쁜 것은 동맹을 못 가지고 있는 일"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튼튼한 한미관계는 안보 측면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한 대비와 주변국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대응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또한 경제 측면에서도 미국은 우리의 주력시장이자 외국 투자자들의 심리를 안정시키는 보루가 되고 있다. 현재 대부분 국가들의 외교정책은 이념이나 사상과는 상관없이 어디까지나 자국의 실리 추구에 목표를 두고 있다. 실리 외교의 최고 목표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을 통해 국민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튼튼한 한미관계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양국은 공동성명은커녕 공동언론발표문조차 채택하지 못하게 되었다. 노대통령은 사흘 앞으로 다가온 한미정상회담에서 '민족'과 '자주'에 사로잡혀 한미관계를 더 어렵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노대통령이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그동안 뼈대까지 뒤흔들어 놓은 한미관계를 다음 정권이 복원할 여지라도 남겨놓은 상태에서 물려주고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객원칼럼니스트의 칼럼내용은 뉴데일리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