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신문 25일자 여론면 '아침햇발'란에 이 신문 신기섭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수구세력이 정신없이 바쁘다. 한껏 부푼 집권 기대감에 도취될 새도 없이 호재가 계속 터진다. 전시 작전통제권 논란으로 잠들었던 ‘안보 위기감’을 되살리기 바쁜 와중에 성인 오락실 사건까지 터졌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두 사안을 계속 이어가다가 적당한 때 경제 문제를 한 번 더 부각시키고 사회·문화적 쟁점들을 몇 가지 더 잡아내면, 대선을 앞둔 여건 조성은 완성될 판이다.
     
    물론 최근 흐름을 수구세력의 집권 작전쯤으로 보는 음모론은 곤란하다. 음모론은 현실을 섬세하게 따져보기 귀찮은 이들의 편법일 뿐이다. 소모적인 전시 작전통제권 논란을 모두 수구세력 탓으로 돌릴 수 없고, 온 나라를 도박 천국으로 만든 정부의 책임을 따지는 데 정치적 고려를 개입시켜선 안 된다.

    반면에 사회·문화적 쟁점들을 만드는 일은 아주 의식적인 작업이다. 수구 전사들이 부쩍 ‘문화 전쟁’이라는 말을 자주 쓰기 시작한 때가 지난해 하반기로 기억한다. 그리고 곧 전쟁의 범위는 근현대 역사, 교육, 시민운동, 언론 매체 등이라는 게 드러났다.

    이 전쟁 기획자들의 생각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좌파가 덧씌운 독재와 외세 의존의 역사라는 굴레를 벗고, 젊은 세대 세뇌 교육을 막고, 좌파 정권 창출을 돕는 시민단체와 언론을 차단하지 않으면, ‘잃어버린 10년’은 20년, 30년이 될 수도 있다.”

    전쟁은 차례로 구체화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뒤집겠다는 학자들이 한껏 띄워졌고, 뉴라이트(새로운 우파)가 거창하게 등장했다. 지금도 계속되는 전교조 헐뜯기는 또 얼마나 집요한가. 신문법 물고 늘어지기도 1년이나 이어졌다. 지금은 인터넷 포털에 족쇄를 채우려는 공세가 조용히 진행 중이다. 다음은 몇몇 시민단체를 구체적으로 겨냥하는 게 될 거라는 징후도 보인다. 노동운동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공격할 수 있는 먹잇감 정도다.

    이렇게 전쟁의 범위는 넓은데 시간은 많지 않으니 흠집내기 이상의 공격은 무리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효과는 더 크다. 진보 또는 개혁 세력이 두려운 건, 실력이나 힘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독점해 온 도덕적 우월성 때문이다. 도덕성만 깨면 종이 호랑이다.

    구상과 전략이 모두 뻔히 보이는 전쟁은 전쟁도 아니다. 문제는 여론이 흠집내기를 어떻게 보느냐다. 여론이 진보 또는 개혁 세력 전반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른바 ‘운동권 출신’으로 강남의 논술을 책임지고 있는 현대판 소피스트들마저 대놓고 전교조를 씹어댈 정도면 말 다했다. 독재 권력의 민주화 진영 공격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등돌린 이들에게 확실한 이유 제공하기.’

    그러나 역사가 이렇게 쉽사리 지워지고 잊혀지지는 않는다. 1989년 굴비 엮듯 포승에 줄줄이 묶여 경찰에 끌려가던 스승들의 모습을 결코 잊지 않는 이들이 있다. 독재 정권에 맞서다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맞은 이들 또한 누군가는 영원히 기억한다. 지금의 진보 세력이 아무리 문제가 있기로, 그 역사까지 매도될 수는 없다. 5·18 기념식과 제주 4·3 항쟁 추모식이 번듯하게 열린다고, 우리가 광주와 제주에 진 빚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말이다.

    지금 필요한 건 역사를 기념하는 게 아니라 오늘 일로 되살리는 기억 투쟁이다. 이는 지금의 전교조, 지금의 진보 세력에 맞서는 투쟁이고, 이 싸움이 그들의 것이 되게 하는 투쟁이다. 기억 투쟁 없이는 등돌린 여론을 되돌릴 수 없고, 결국 그건 역사의 종말로 이어진다. 여기에 견주면 수구세력의 도발은 사소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