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칼럼 <누가 '요덕'을 덮으려 하는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참 세상 많이 변했다. 변해도 어처구니없게 변했다. 지난날 민주화 운동을 억압하던 국가권력이 이제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참혹상을 다룬 뮤지컬 ‘요덕 스토리’의 정성산 감독을 협박하는 세상이 되었다. 지난날의 저항자들이 오늘의 저항자들을 탄압하는 또 하나의 억압권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들, 새로운 억압자들은 이렇게 협박한다. 전쟁이 두려우면 김정일을 비판하지 말라고. 그리고 김정일을 비판하는 자들은 ‘반통일’ ‘수구’ ‘냉전’ 세력이라고.

    그러나 “요덕 수용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를 증언하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 좌-우, 보수-진보, 통일-반통일의 분류법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실을 쉬쉬하고 덮어 두는 것을 ‘진보’ ‘통일’이라 한다면, 유신 5공의 인권탄압을 사실대로 드러냈던 민주화 운동도 그러면 ‘수구’ ‘반통일’로 몰려야 한다는 것인가? ‘요덕’은 그래서 ‘좌-우’ 이전의 문제다.

    ‘사실’을 기피하는 한, 김정일과 그 남쪽 동업자들은 햇빛을 적대하는 어둠의 세력이랄 수밖에 없다. ‘요덕 스토리’는 바로 그 어둠의 세력이 ‘진보’ ‘통일’ 아닌 학살자이고, 반(反)진보 수구임을 폭로하는 한줄기 영롱한 햇살이 될 것이다. 그리고 백 마디 연설과 세미나를 능가하는 감동과 감성의 핵폭탄이 될 것이다. 옛시절을 상기한 할머니 할아버지들, 분노한 시민들과 해외교포들, 그리고 외국인 인권 운동가가 그 ‘햇살’을 가리려던 얼치기 수구좌파 권력의 훼방에 맞서 정 감독에게 다투어 쌈짓돈들을 보냈다. 세계의 언론들도 ‘요덕 스토리’를 전 세계의 이슈로 만들 기세다.

    김정일을 ‘식견 있는 지도자’로 치켜세운 정치권력이 남쪽에 들어선 지 8년째, 그러나 ‘요덕 스토리’를 계기로 바람의 향방은 바뀔 것이다. 새 바람은 요덕 수용소 운영자를 편드는 것을 ‘진보’ ‘통일’이라 부르고, 그곳에 갇힌 피(被)학살자들을 편드는 것을 ‘수구’ ‘반통일’이라고 부르던 그간의 병리현상에 대해 이제는 확실한 치유(治癒)의 종지부를 찍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정성산 감독은 말한다. “자신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북한주민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괘씸하다.” 그래서 ‘요덕 스토리’라는 문화의 핵(核)으로 김정일의 핵과 정면대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년 한 해는 김정일-김대중-노무현이 각기 연출하는 ‘공연물’과 정성산이 연출하는 공연물이 맞붙는 일대 격돌국면이 될 것이다. ‘2김(金) 1노(盧)’의 공연물은 “요덕 수용소 시비하면 전쟁 난다”는 호러(horror) 스토리인 셈이고 반면에 정성산 공연물은 ‘요덕’과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전쟁범죄라는 논고(論告)라 할 수 있다.

    이 격돌은 오늘의 한반도 문제의 본질을 말해주는 상징 그 자체다. 한반도를 ‘요덕 수용소 운영자+그 남쪽 내통자들’의 세상으로 몰고 갈 것인가, 아니면 “요덕 수용소 수감자+그 남쪽 지원자들”의 세상으로 끌고 갈 것인가의 한판승부인 셈이다.

    폭정의 학살 행위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後者)에 감명, 감동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이러면 정말 전쟁 나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전쟁공갈이 요덕 수용소의 참상을 방관하지 않으려는 인류의 양심을 침묵시킬 수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전쟁공갈은 남북한 주민과 세계 양심의 일치된 폭발로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공갈을 꺾은 것은 그들의 수용소 군도(群島)에 굴복하지 않은 본회퍼 목사와 사하로프 박사 같은 양심들의 불굴의 저항, 그리고 그에 열정적으로 부응했던 외부세계의 쉰들러적(的) 공감이었다. 이 양심과 저항의 드라마가 ‘2006 한반도’ 안팎에서 다시 펼쳐지려 하고 있다. ‘요덕 스토리’의 처참한, 그러나 숙연한 무대의 막이 오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