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준희·임국정·한상호, 무장투쟁 독립운동 위해 철혈광복단 조직1920년 1월4일 군자금 호송대 습격해 탈취 성공했으나 밀정 고발로 잡혀김강, 1919년 간도청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타국에서 항일 매진
  • ▲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준희·임국정·김강·한상호. ⓒ국가보훈부
    ▲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준희·임국정·김강·한상호. ⓒ국가보훈부
    간도로 이송하던 일제 군자금 15만원을 탈취하는 등 타국에서의 독립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윤준희·임국정·한상호·김강 선생이 '국가보훈부 2023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31일 보훈부에 따르면, 윤준희·임국정·한상호 선생과 북간도 청년들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고자 1919년 광복단(光復團)과 철혈단(鐵血團)을 통합해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을 조직했다.

    이들은 북간도에서의 3·1운동 이후 13명이 순국하고 30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한 것을 목격하고 무장투쟁을 통해서만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무기를 구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한상호 선생은 한인 청년들과 함께 호르바트 부대로 파견됐다. 임국정 선생은 대한국민의회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무기 구매활동을 이어갔다. 윤준희 선생은 중국과 러시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각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던 중 임국정·윤준희 선생은 대한국민의회 소속 김하석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조선은행 자금을 탈취할 계획을 논의했고, 조선은행 회령지점 서기로 근무하던 전홍섭과 계획을 공유했다.

    1920년 1월4일 일화 15만원을 운반하는 호송대가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북간도 용정을 향해 출발했고, 오후에 간도 용정촌(龍井村) 부근의 골짜기에서 준비하고 있던 선생들은 도착한 호송대를 습격해 자금을 탈취하는 데 성공했다. 

    일화 15만원은 현재 화폐가치로 정확하게 환산하기는 어려우나, 당시 소총 5000정과 탄환 50만발을 구매할 수 있는 금액으로 만주지역의 독립군 모두를 무장시키고 더 많은 부대를 추가로 조직할 수 있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선생들은 탈취한 자금을 대한국민의회의 선전부에 헌납하기로 하고, 1월23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다음날 대한국민의회 서기이자 철혈광복단 단장인 전일을 만나 15만원의 구체적인 사용계획(무기 구매, 사관학교 건립 등)을 수립했다.

    이들은 러시아로부터 무기(소총 1000자루, 탄약 100상자, 기관총 10문)를 구매해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임국정 선생을 주선한 엄인섭은 무기 밀매 알선과 동시에 이 정보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에 근무하는 기토 가쓰미에게도 알렸다.

    1월31일 새벽, 일본 경찰이 숙소를 포위하고 잠들어 있던 선생들을 급습했고, 선생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체포돼 블라디보스토크에 정박 중이던 일본 군함으로 압송됐다.

    혹독한 고문 이후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송된 이들은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 1심에서 임국정·윤준희 선생은 사형, 한상호 선생은 무기징역, 전홍섭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이어진 2심(경성복심법원)과 3심(경성고등법원)에서 세 명의 선생은 사형, 전홍섭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21년 8월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김강 선생은 숭실학교 재학 중 '105인 사건'에 연루돼 일제의 검거를 피해 1912년 중국 간도지역으로 망명했다. 이후 하얼빈으로 이동해 한인 청년들을 규합하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05인 사건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조작,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가둔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던 신민회가 해체됐다.

    김강 선생은 1913년 간민회(墾民會, 한국인 자치단체로 문화계몽운동과 민족자치운동을 펼친 단체)가 조직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간민회 일본조사부원으로, 동제회(同濟會) 평의원과 대동협신회(大同協新會)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통신부 부원과, 연길현에 근거를 두고 있던 제1중부지방회의 중부경호부장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 협력자들을 처단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19년 11월 출범한 간도청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간도지역 청년들의 항일의식 강화에 매진했다. 

    그러나 1920년 연길현 부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한 일제의 카노기병연대에 '간도 15만원 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돼 중국 연길현에서 순국했다. 

    윤준희·임국정·한상호 선생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김강 선생에게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각각 추서됐다. 

    보훈부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간도의 독립운동가 4인을 2023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