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따위 부질없다는 이유없는 경구일 뿐""이념과 애국 나쁘게 폄훼해선 안돼"우크라이나, 2002년 월드컵 모두 좋은 뜻의 애국의 '발로'
  • ▲ 한국에서 민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 중이던 우크라이나 출신 연주자들이 고국을 지키기 위해 악기 대신 총을 들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들의 고귀한 정신도 분명히 애국인 만큼 이념과 애국을 무조건적으로 폄훼해서는 안된다. ⓒ서울팝스오케스트라
    ▲ 한국에서 민간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 중이던 우크라이나 출신 연주자들이 고국을 지키기 위해 악기 대신 총을 들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들의 고귀한 정신도 분명히 애국인 만큼 이념과 애국을 무조건적으로 폄훼해서는 안된다. ⓒ서울팝스오케스트라


     "이제는 '이념'이나 '애국' 단어를 이야기해서 (선거에서) 크게 득 볼 일이 없다“ 

    이건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가 그의 취임 1주년 기자회견 때 한 말이다. 그런가? 젊은 사람이 그렇다고 말하면 요즘 세태가 그렇구나 하고 둘 수밖에. 그러나 이 말엔 약간의 토를 달 필요가 있을 듯싶다.  

    세태가 정말로 그러하다면 거기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까닭엔 이해할 만한 구석이 없진 않을 것이다.  

    예컨대 그런 단어를 고리타분하고 상투적인 훈장질처럼 써먹을 때는 그 말을 듣는 ‘젊은 유행(young fashion)’의 기준에선 짜증도 나고 하품도 날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덮어놓고 100% 부정적으로만 반응하는 것도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설령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하더라도 ‘이념’ 이나 ‘애국’이란 말 자체는 결코 나쁜 말이 아니기에 말이다.  

    결론부터 앞세워 ‘이념’과 ‘애국’이란 단어엔 긍정적인 뉘앙스와 부정적인 뉘앙스가 다 있다. 부정적인 것에는 부정적으로 반응하더라도, 그렇다고 긍정적인 것까지 싸잡아 부정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념’을 ‘철학’과 같은 말이라고 할 때 ”나는 철학이라는 것 없이도 잘만 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무(無) 철학 선언’도 일종의 ‘철학 하는 자세’라고, 박종홍 전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말했다. 필자는 박종홍 교수가 서울대 문리대 8 강의실에서 그렇게 말하는 걸 현장에서 들었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당연한 말 ‘철학’을 부정적으로 바라봐야 할 때는 어느 경우일까?  

    특정한 역사관, 세계관, 정치경제학을 미신(迷信)이라 불러야 할 정도의 폭력적 ‘사상독재’ 형태로 강제할 경우, 그게 바로 ‘부정적인 철학 행위’다. 극우 나치즘(Nazism)·파시즘(Fascism), 극좌 공산주의가 그런 경우다.  

    나치도 공산주의도 아닌 광의의 ‘자유 체제’는 좀 보수적인 사례든 좀 진보적인 사례든, 특정 이념의 일당독재가 아니기에 그것을 자유인들과 양립할 수 없는 적(敵)으로 규정할 이유는 없다.  

    ”이념 따위는 부질없다“는 말은 따라서 특정 이념만 강제하는 전체주의 일당독재에 할 비난이지, 자유민주 보수와 온건·합리 진보엔 할 필요도 없고, 할 이유도 없는 경구(驚句)다.  

    우리 사회 경우엔 이 말은 극좌 NL(주사파) 운동꾼들에게나 할 말이지, 자유민주 보수엔 쓸 필요도 이유도 없다. 우리 사회 보수·우파엔 나치(Nazi)나 파시스트(Fascist) 같은 일당독재 세력은 없는 까닭이다.  

    일부 논자들은 좌파가 아니라면서도 예컨대 태극기 현상 같은 걸 마치 나치 증상이라도 된다는 양 매도하고, 내리깎고, 모욕한다.  

    그런 현상을 세대 차이에 따른 문화 차이, 취향 차이라고 보는 정도를 넘어, 그걸 덮어놓고 ‘극우’ ‘극단’이라고 낙인질 한다. 이게 과연 공정한 평가일까?  

    필자는 50만~100만 태극기 인파를 가르며 광화문 여러 곳을 힘겹게 둘러보았다. 거기서 필자는 초로(初老)의 교양 있어 뵈는 중·장년층 부부가 손을 잡고 걱정 어린 표정으로 아스팔트 위에 침통하게 앉아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매일 아파트 구내에서 흔히 마주치는 낯익은 유형(類型)의 생활인들이었다. 평생 ‘극우’는 고사하고 정치와는 전혀 무관하게 살았을 60대 생활인들이 왜 저렇게 많이 쏟아져 나왔을까? 

    그들 80%는 특정 주최자, 특정 단체, 특정 교파에 매이지 않은 순수 개인들이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일 뿐이었다. 무엇으로 그렇게 단언하느냐고? 특정 정치·사회·종교 단체의 동원자 수가 단결에 50만~100만씩 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이들 분기한 시민들은 뒤늦게 주사파 본색을 발견하고 ”아이고 이건 아닌데“ 신음하며 밤잠을 못 자던 ‘초기 불면증·우울증’ 세대였다. 이런 선의의 걱정하는 국민을 누가 감히 극단 ‘이념’과 구닥다리 ‘애국’에 사로잡힌 ‘꼰대’라고 함부로 폄훼(貶毁)할 수 있단 말인가? 

    이와는 다른 유형의 참가자들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도 ‘극우’는 아니라고 필자는 주저 없이 말하려 한다.  

    노는 스타일이 자기와 다르다 해서 그걸 불문곡직 ‘극우’로 찍어버리는 건, 사람을 쉽게 ‘용공(容共)’으로 찍어버리던 전례와 뭐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가? 구식 용공 딱지나 신식 극우 몰이나, 사람 잡기론 오십보백보일 것이다. 

    ‘애국’이란 것도 그렇다. 나치와 파시스트가 ‘애국’을 독재국가에 대한 복종의 수식어로 우려먹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애국’의 어두운 측면과 밝은 측면에 대해선 이런 해석이 있다.  

    ”당신이 만약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 해서 그를 투옥하거나, 여성이 머리를 싸매지 않고 외출했다고 해서 그녀를 돌로 쳐 죽이는 국가를 지지한다면 당신의 ‘애국’은 나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만약, 그들이 무엇을 원하든, 무엇을 쓰고 말하든, 누구를 사랑하든,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국가를 지지한다면 당신의 ‘애국’은 좋은 것이다.“ 

    이게 과히 틀리지 않은 말일진대는, 좋은 뜻의 ‘애국’까지 싸잡아 매도하는 결과가 될 언행은 삼가는 게 좋을 것이다.  

    좋은 뜻의 ‘애국’을 우리는 많은 경우에 목격할 수 있다.  

    큰 뜻에서는 오늘의 우크라이나 국민이 한국에서 살다가 솔선 귀국해 무기를 드는 ‘애국’에서 볼 수 있었다. 그게 ‘애국’이기에 이 말을 너무(?) 과하게 하면 표가 떨어지는가? 그렇다면 그따위 표는 오히려 버리겠다고 말하는 용기가 참 정의일 것이다. 

    작은 뜻에서는 2000년대 월드컵 때 수많은 ‘붉은 악마’들이 광장에 쏟아져나와 ”대~~한민국!“을 외친 것도 결국은 ‘애국’의 발로라고 할 만했다.  

    어떤 웃기는 좌파는 그때 그걸 ‘파시즘’ 어쩌고 지껄인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이따윈 정말 교조주의적인 3급 좌파밖엔 안된다. 사람이 그렇게 옹졸하고 편협해서야 되겠는가? 

    이래서 ‘애국’을 오로지 나쁘게만 폄훼하면 나중엔 애국가 부르는 국민의례까지 배척하게 된다. 이런 한심한 세태에까지 최신유행이랍시고 맞춰주고 따라 해주고 좋다고 해줘야 비로소 ‘꼰대 보수’ 아닌 ‘개혁 보수’가 되는 건가?  

    이런 식이라면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어느 해 7월 14일 혁명기념일에 파리 도심에 나와 모든 국가기관 종사자들의 군대식 열병 행진을 사열한 것, 미국 시민권 받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엄숙하게 성조기(星條旗, The Star-Spangled Banner, 별이 빛나는 깃발)를 제창하는 것도 다 ‘파시즘’인가?

    요는 분별력이다. 이런 분별 없이 ’이념’ ‘애국’이란 단어를 세태 따라, 유행 따라 싸잡아 패겠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교조(敎條)화된 이념’ 즉 편견 그 자체다.  

    우리에겐 포기할 수 없는 가치, 이념이 있다.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 자유 인권, 글로벌 자유 진영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가치를 떠받치는 대한민국이란 아름다운 나라, 6.25 남침 때 죽지 않고 살아난 자유대한민국을 열정적으로 ‘애국’한다. 어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