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변에서 생존한 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김오남, 홍범도 공격하며 책임 추궁홍범도, 레닌이 하사한 권총으로 독립군 동지 사살, 구속… 레닌 덕분에 석방당증번호 578492, 소련공산당 정식 가입… 끝까지 소련에 충성한 '빨치산 대위'
  • ▲ 홍범도가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당시 레닌과 면담 후 레닌의 하사품 모젤 권총을 차고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연합뉴스(반병률 교수 제공)
    ▲ 홍범도가 1922년 1월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당시 레닌과 면담 후 레닌의 하사품 모젤 권총을 차고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연합뉴스(반병률 교수 제공)
    "농부로서 홍범도는 시넬(러시아식 군복)과 또는 기다란 가죽끈을 어깨에 걸쳐 멘 야전가방은 벗지 않았다. 가방 속에는 권총이 있었다. 레닌에게서 선물로 받은 것이란다. 이 홍범도는 시넬과 가방을 벗어놓고는 밥도 못 먹는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에서 발행된 한인신문 '레닌기치(현 고려일보)' 1968년 8월27일자에 실린 내용이다. 1928년 가을 홍범도를 만난 적이 있는 러시아의 한인 작가 정태는 홍범도를 이같이 회고했다.(<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세윤, 역사공간, 2007)

    일생을 소련 정부에 충성한 홍범도… "식사 때도 레닌 권총 함께"

    홍범도는 자유시참변(1921년 6월28일) 이듬해인 1922년 2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최로 열린 극동제민족대회가 끝난 뒤 레닌과 단독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레닌은 홍범도를 치하했다. 레닌은 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면서 금화 100루블, 군복 한 벌, 홍범도의 이름이 새겨진 모젤 권총을 하사했다. 레닌과 면담 후 홍범도는 레닌·트로츠키 등 붉은혁명(볼셰비키)의 주역들과 기념사진도 촬영했다.(장세윤, 상동)

    홍범도는 1920년 일제를 상대로 성과를 올렸다고 평가받는 봉오동전투(6월)·청산리대첩(10월)의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그러나 자유시참변과 이후 그의 행적은 독립운동의 공(功)마저 상쇄한다는 역설이 따른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28일 소련 스보보드니(자유시)에서 일제의 사주를 받은 소련이 한국 독립군을 유인해 학살한 사건이다. 스보보드니의 랜드마크인 '급수탑'에서 소련 적군과 고려혁명군정의회 산하 고려혁명군(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등 통칭)은 적군 편입 및 무장해제를 거부한 고려공산당 상해파(사할린부대) 한인 독립군을 포위해 무차별 학살했다.

    그해 6월2일 440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자유시에 도착한 홍범도는 소련의 무장해제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이후 홍범도 부대는 고려혁명군 3개 연대병력 중 제3연대로 편성됐다.(<한국 사회주의의 기원> 임경석, 역사비평사, 2014) 홍범도가 참변에서 같은 한국 독립군을 공격한 고려혁명군 편에 섰다는 정황이다.

    자유시참변 이후 항일 무장 독립군은 시베리아와 만주 벌판 곳곳에서 사살 혹은 체포당하거나 강제노역에 끌려갔다. 대한민국 육군 중장, 외무부장관을 지낸 김홍일은 자유시참변에서 한국독립군 700~800명 사망, 부상자 수백 명, 벌목 노동장으로 끌려간 인원이 1000여 명을 넘는다고 기록했다.(<대륙의 분노-노병의 회상기> 김홍일, 문조사, 1972)

    반면 가해자 측인 고려혁명군정의회는 사망자 36명, 포로 864명, 불구중상자 15명, 박일리야(상해파)와 탈출한 자 34명, 행방불명 59명 등 기타 합계 1012명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같은 편차에도 참변의 피해가 참혹했다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 ▲ 1921년 6월28일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러시아 스보보드니 체스노코프역 육교 인근에 있는 급수탑. 참변으로 항일 무장독립군의 역사는 사실상 궤멸당했다. 독립군 일부는 무사히 학살 현장을 벗어났으나 1㎞가량 떨어진 제야강을 건너다 빠른 물살에 휩쓸려 숨졌다.ⓒ러시아 스보보드니=이기륭 기자
    ▲ 1921년 6월28일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러시아 스보보드니 체스노코프역 육교 인근에 있는 급수탑. 참변으로 항일 무장독립군의 역사는 사실상 궤멸당했다. 독립군 일부는 무사히 학살 현장을 벗어났으나 1㎞가량 떨어진 제야강을 건너다 빠른 물살에 휩쓸려 숨졌다.ⓒ러시아 스보보드니=이기륭 기자
    홍범도, 자유시참변 생존 포로 판결에도 참여

    자유시참변 이후 한국 독립군은 사실상 '궤멸'됐다. 1945년 연합국의 승리로 한국이 '해방'될 때까지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와 같은 무장 독립운동 역사를 쓰지 못한 이유다.

    반면 홍범도는 참변 이후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군에 편입시켰고, 그 자신도 소련군 대위로 편입된 뒤 25군단 조선인여단 독립대대 지휘관으로 승진했다.

    홍범도가 참변이 발생한 '급수탑' 현장에서 독립군들을 직접 학살하는 데까지 가담했는지는 여러 논쟁이 따른다. 하지만 ▲레닌이 그를 치하하며 하사품을 내린 점 ▲그가 자유시참변 생존 포로 재판에 참여한 점 ▲그가 소련군 대위로 편입된 점 ▲참변에서 생존한 사할린부대 출신 김창수·김오남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 등은 그가 참변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특히 소련 정부가 홍범도에게 발급한 복지혜택 인증서는 그가 적군 편에서 자유시 참변에 가담했다는 정황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홍범도 유해 봉환을 주도한 국가보훈처도 홈페이지에 홍범도와 관련 "6월 초 예하 부대원 440여 명을 대동하고 군정의회 측에 가담함으로써 고려혁명군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고 설명한 뒤 "고려혁명군은 대한의용군이 주둔한 자유시 부근의 수라세프카 일대를 포위한 채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고 서술했다. 다만 홍범도의 설명이 실린 국가보훈처의 해당 추모페이지는 25일 오후 13시 기준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고려혁명군 기관지인 '붉은군사'의 1921년 12월24일자 보도에 따르면, 홍범도는 자유시참변 포로 50명을 판결하는 재판에 3명의 한인 재판위원 중 1명으로 참여했다.

    '붉은군사'는 "1921년 11월27일로 30일까지 4일 동안 고려혁명군법원은 재판위원장 재판위원장 채동순, 위원 홍범도·박승만이 출석해 금년(1921년) 6월28일 자유시병변 범죄자 50명을 판결하였는데, 세 사람은 2개년, 다섯 사람은 1개년 징역에 처하고, 24명은 1개년 집행유예에 처하고, 17명은 방면하야 군대에 보애녀 종사캐…"라고 보도했다. '중대범죄자'로 분류되어 재판을 받기 위해 열차 화물칸에 실려 갔던 한인 의병운동 지도자들 중에서는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있었다. 반면 탈출 도중 기차 바퀴에 팔·다리가 잘려 고통 속에 죽어간 이들도 있었다.(임경석, 상동)

    이 재판은 홍범도가 모스크바에서 레닌을 만나 '감사의 뜻'을 받기 직전의 일이다. 이때 레닌으로부터 하사받은 권총으로 홍범도는 생사고락을 함께했을 독립운동 지사 2명을 사살하기도 했다.

    홍범도, 레닌의 하사품 모젤 권총으로 독립운동 지사 2명 사살

    홍범도는 1923년 8월 하바롭스크에서 사할린부대 출신이자 참변의 생존자 김창수·김오남으로부터 참변의 책임을 추궁 받으며 불시에 공격당했다. 홍범도는 권총으로 이들을 사살해 감옥에 갇혔으나 레닌의 증명서 덕분에 곧 석방됐다.(<[군사대로] 독립군 영웅 홍범도의 인생 최대 오점은 자유시 참변>, 뉴시스, 2021년 8월22일자)

    홍범도는 1927년 10월 소련공산당 당원으로도 정식 가입했다(당증번호 578492 또는 578392). 이후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결정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추방됐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소련의 빨치산 대위'로서 소련 정부에 충성했다.

    특히 소련 정부가 홍범도에게 발급한 복지혜택 인증서에는 "이것(서류)을 소지한 홍범도는 전(前)빨치산으로 1919년 9월부터 1922년 11월까지 제5군 제1고려인 대대(군부대 혹은 파견/분견대)에서 복무"했다고 적혀있다. 또한 "한카이스키 지역의 '전(前)붉은 군대와 빨치산 및 가족에 대한 증명서 발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혜택을 부여한다"고 써있다. 한카이스키 지역은 홍범도가 제대 후 정착했던 곳이다.

    인증서류에 그의 빨치산 복무 기간을 1919년부터 기재한 것은 의문이 남지만 1922년 11월까지라고 기록된 부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대목에서 그가 자유시 참변(1921년) 당시 적군 편에서 공로를 세운 점을 소련 정부가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73세의 노령이던 홍범도는 당국을 찾아 전선에 보내 달라고도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거부당했다.(장세윤, 상동)

    소련의 지원을 받은 한인사회당 이동휘의 선전에 따라 홍범도를 비롯해 많은 한인 독립군이 자유시에 집결했다. 만주와 연해주 등 각지에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하던 독립군들은 모처럼 한 곳에 모여 통합된 조직을 기대했다. 그러나 자유시참변으로 한국 독립군들은 이역만리 타지에서 사실상 몰살당했으며 완전히 와해됐다.

    소련의 심상찮은 의도와 낌새를 알아채고 러시아행을 포기하고 만주로 돌아간 이들도 있었다. 청산리대첩의 주역 김좌진 장군과 서일 총재, 이범석 등이다.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특히 '반공주의'가 철저해진 김좌진은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했다. 서일 총재는 자유시에는 가지 않았지만, 참변에서 많은 동지가 목숨을 잃자 이에 책임을 지고 소련과 만주의 경계 지대인 밀산에서 자결했다.
  • ▲ 이 서류는 소련 정부가 홍범도에게 발급한 일종의 복지혜택 인증서다. 인증서는
    ▲ 이 서류는 소련 정부가 홍범도에게 발급한 일종의 복지혜택 인증서다. 인증서는 "1930년 1월13일 소련 인민위원평의회 중앙집행위원회(소련의 최고 의사 결정기구)의 칙령에 의한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서류 우측 증명사진 하단부에는 이 서류가 1930년 3월25일부터 적용되는 '前 붉은 군대와 빨치산 및 가족이 수혜를 받을 권리에 관한 인증서 발급절차'라는 법령의 의거, 발급됐음이 기록돼 있다. 즉 서류는 홍범도가 1919년9월부터 1922년10월까지 참전군인으로서 협동농장에 대한 혜택의 수혜대상임을 확인하는 인증서로 해석된다.ⓒ사진은 2019년 2월22일자 고려일보에서 캡처
    "1962년에는 자료 미비했지만, 지금은 실체 다 드러났는데"

    반면 홍범도는 은퇴한 뒤 소련정부로부터 연금도 받고 말년까지 비교적 안락하게 산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경비원으로 여생을 보내다 1943년 10월25일 생을 마감했다.

    문재인정부는 광복절인 지난 15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홍범도의 유해를 돌려받았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지난 17일 홍범도의 유해 송환을 위해 정부가 각고의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자평했다. 6·25전쟁 국군포로 송환에 문재인정부가 소극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홍범도의 유해가 실린 특별수송기는 대한민국 영공에 진입 후 우리 공군 전투기 6대로부터 엄호비행을 받았고, 지상에서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가 오후 8시40분쯤 서울공항으로 마중 나가 홍범도를 가장 먼저 맞았다.

    문 대통령은 홍범도에게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했고, 홍범도는 지난 18일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러나 안장식에서의 대통령 연설에서 자유시참변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현대사 전공)는 본지와 통화에서 "김일성이 소련군과 함께 한반도 이북 지역에 진입했을 때 그의 계급도 소련군 대위였다"며 "마찬가지로 소련군 대위로 편입된 홍범도가 해방 때까지 생존했다면 적군과 함께 북한으로 오지 않았을까 예측된다"고 진단했다. 

    홍범도의 유해 송환은 대한민국보다 평양행이 더 부합한다는 의미다. 홍범도의 고향도 평양이고, 북한도 지난해 문재인정부의 홍범도 유해 송환 추진에 항의한 바 있다.

    강 교수는 "1962년 박정희정부가 홍범도를 건국훈장 2등급 '대통령장'을 서훈할 때는 홍범도의 자료가 절대적으로 미비했지만, 지금은 그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느냐"며 "홍범도는 일생을 소련정부에 충성했고, 봉오동전투의 공적은 인정하더라도 대한민국 건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장'은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이어 "이런 홍범도를 우리 공군 전투기 6대가 엄호하는 등 장면을 보면 지금 세상이 초현실세계가 된 것만 같다"고 개탄했다.

    강 교수는 좌경화한 학계를 향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홍범도가 고려혁명군 입장으로 재판에 참여한 것도 '그의 인품 덕분'이라는 등의 평가가 있는데 노력이 참 눈물겹다"고 꼬집은 강 교수는 "레닌이 하사한 모젤 권총으로 독립지사 2명을 사살한 것도 그가 자유시참변에서 어떤 '스탠스'를 취했는지 방증하는 크나큰 사건인데 이에 대한 정부의 설명은 생략됐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