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시 '꽃' 중에서)

    뮤지컬 '맨오브라만차'에서 돈키호테는 여관의 하녀 '알돈자'에게 아름답고 고귀한 이름 '레이디 둘시네아'라고 부르며 무릎을 꿇는다. 사람들은 돈키호테를 미친 노인으로 무시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알돈자는 점점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맨오브라만차'에서 '알돈자' 역을 맡은 배우 김지현은 "작품의 프로필 사진을 찍을 때 김춘수 시인의 '꽃'이 떠올랐어요. 살면서 자존감이 낮아질 때가 있는데, 누군가 '너는 좋은 배우고 연기가 감동적이다'고 말해주면 힘이 나요. 알돈자도 '둘시네아'라고 소중하게 불러준 돈키호테가 있어서 비로소 꽃이 됐죠"라고 말했다.

    아홉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 '맨오브라만차'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격상으로 세 차례나 개막을 연기하며 지난 2월 2일 샤롯데씨어터 무대에 올랐다. 어려운 시기에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더 많은 관객에게 전하기 위해 충무아트센터로 장소를 옮겨 3월 24일~5월 16일 연장 공연을 이어간다.

    "첫 공연 때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미리 무대 위로 나와 있는데, 어떻게 처음 등장하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거든요. 태연한 척 앉아서 겁도 없이 객석을 봤어요. 띄어앉기로 관객이 끝까지 계시는 걸 보니 그들의 설렘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울컥하더라고요. 5월까지 더 공연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해요."

    김지현은 한 번의 처연한 눈빛으로 열 마디 말을 대신하며, 욕심 내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서서히 캐릭터에 접근한다.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풍월주', '모래시계', '그날들' 등 온갖 풍파를 겪은 뒤 고독하게 살아가는 삶에 자주 빠졌던 김지현이 지금껏 도전하지 않았던 '알돈자'로 새로운 캐릭터를 그려낸다.

    "2015년 '맨오브라만차'를 처음 관람을 때, '알돈자'를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연습하면서 '알돈자'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거나 다른 시도를 하겠다는 마음은 없었어요. 알돈자의 상황와 제가 가지고 있는 성향을 어떻게 하면 잘 어우러지게 할까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 ▲ 뮤지컬 '맨오브라만차'에서 '알돈자' 역을 맡은 배우 김지현.ⓒ오디컴퍼니
    ▲ 뮤지컬 '맨오브라만차'에서 '알돈자' 역을 맡은 배우 김지현.ⓒ오디컴퍼니
    김지현과 같은 역의 윤공주는 '알돈자' 중 역대 가장 많은 시즌에 참여했으며, 최수진은 2018년 합류해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두 배우 모두 무대에서 여유가 있어 보여요. 저는 노새끌이들과 나누는 첫 대사가 힘들었어요. 초반에 다른 알돈자보다 화도 많고 분노도 많은, 감정이 요동쳤던 것 같아요. 지금은 공연을 하면서 스스로 안정을 찾았고요."

    1964년 미국에서 초연된 '맨오브라만차'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가 원작이다. 한국에서는 2005년 '돈키호테'로 선보인 이후 2007년부터 현재의 제목을 사용하고 있다. 작품은 자신을 '돈키호테'라는 기사로 착각한 괴짜 노인 '알론조 키하나'와 그의 시종 '산초'의 유쾌한 모험을 다룬다.

    '알돈자'는 극 중 유일하게 큰 변화를 맞이하는 인물이다.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돈키호테의 신념은 "꿈꾸게 하지 마라"고 울부짖던 알돈자를 감화한다. 알돈자가 죽어가는 알론조에게 "내 이름은 둘시네아예요"라며 간절하게 부르자 사그러져가는 돈키호테의 열정이 되살아나 그는 용맹한 기사가 된다. 

    김지현은 "즉흥극 마지막 장면, '둘시네아'가 진짜 이름이 되는 순간을 위해 공연의 시작부터 끝까지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가장 감동적이죠. 이후의 알돈자 삶이요? 돈키호테에게 자신을 '둘시네아'라고 말한 건 그 이름을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무언의 맹세가 아닐까요.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 꿈 이룰 수 없어도, 싸움 이길 수 없어도, 슬픔 견딜 수 없다 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넘버 '이룰 수 없는 꿈' 중에서)

    "저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꿈을 꾸고 이상향을 그리거나 목표를 설정하지 않아요. 현재를 열심히 살아내면 그게 모여서 제 삶이 완성되는 것 같아요. 요즘에는 '좋은 사람'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저도 누군가에게 돈키호테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다양한 관계 속에서 긍정적인 영향과 기운을 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