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의 아이들' 김덕영 감독 후속작 '귀국선'… 北·日 공모 '북송사업' 만행 고발日, 재일한인 생활보조금 연 24억엔 줄이려 '북송' 추진… '노동력 부족' 北도 동조
  • ▲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이들'을 연출한 김덕영 감독. 현재 후속작 '귀국선'을 제작 중이다. ⓒ뉴데일리
    ▲ 다큐멘터리 '김일성의 아이들'을 연출한 김덕영 감독. 현재 후속작 '귀국선'을 제작 중이다. ⓒ뉴데일리
    북한이 은밀하게 진행한 '전쟁고아 위탁교육 프로젝트'를 폭로한 다큐 '김일성의 아이들'로 지난해 큰 반향을 일으켰던 김덕영(57) 감독이 후속작으로 '재일한인 북송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귀국선(歸國船)'을 들고 나왔다.

    '귀국선'은 일본 정부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25년 동안 총 186회에 걸쳐 9만3339명의 재일한인을 북한으로 실어 나른 전대미문의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김 감독은 "1959년 첫 귀국선이 출항하기 하루 전 마이니치신문은 '그들이 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이 사람들의 다복한 귀국이 쌍방 간 따듯한 우정으로 이어지길 기원한다'는 기대 섞인 장밋빛 전망을 내놨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60여년이 흐른 지금, 당시 '북송선'에 올라 탄 사람들의 생사조차 불분명한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김 감독은 "이 사건은 개방된 자유 민주주주의 체제인 일본에서 폐쇄된 사회주의 정치 체제인 북한으로 주민들의 대규모 집단 이동이 일어난 초유의 사건"이라며 "시간의 흔적을 거슬러 올라가 도대체 이런 비정상적이고 비인도적인 대량 이주가 일어날 수 있었는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김 감독은 "북한과 조총련은 재일한인의 북송 사업을 '귀국사업'이라고 선전했는데,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재일한인 98퍼센트의 고향이 '38선 남쪽'인 것을 감안하면 '귀국'이라는 말 자체는 큰 모순을 담고 있다"며 "숨겨진 역사적 실체를 발굴하고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귀국선'이라는 반어적 제목을 달게 됐다"고 설명했다.

    차별과 가난, 흔들리는 재일한인들의 법적 지위


    과연 누가, 어떤 정치적 목적으로 북송 사업을 추진했는지 의문을 품은 김 감독은 2000년대 이후 기밀해제된 제네바 국제적십자의 공식 문서들을 입수해 숨겨진 진실을 파헤쳤다.

    이 문건들을 살펴본 김 감독은 일본과 북한이 함께 추진한 귀국사업은 냉전 체제 아래 관련국들의 은밀한 이해관계가 맞물린 '공작의 산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김 감독은 "귀국사업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말을 사용하며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일본의 문화와 생활 방식에 익숙했던 일본인들을 일본 정부가 추방한 사건이었다"며 "그 배경에는 1952년 이후 일본 국적을 상실한 수많은 재일한인들이 최하 빈민층으로 전락한 시대적 상황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1950년대 초, 취업 연령에 있는 재일한인의 75~80퍼센트가 실업 상태이거나 아주 적은 수입으로 임시직을 전전했다. 당시 재일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은 도시 내에서도 빈민가에 속하는 곳들이었다.

    외국인 신분이 된 재일한인은 지자체의 도로 청소 일에서도 배제됐고, 전쟁 특수가 사라지면서 저임금 노동력이었던 재일한인들을 고용하려는 기업이나 공장들도 사라졌다. 게다가 사회주의적인 노선을 지향하는 재일한인은 폭력적인 '트러블 메이커'라는 인식이 일본 사회에 곳곳에 퍼져나갔다.

    1956년 10월 일본적십자 외사부장 이노우에가 국제적십자에 보낸 서한에 따르면 당시 일본 정부는 약 11만명의 재일한인에게 연간 24억엔(약 249억원)을 생활보조금으로 지급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당시 일본 정부는 재일한인이 어디에 속하든, 일본 국민으로 남지 말고 그저 일본을 떠나주길 바라는 입장이었다.

    김 감독은 "이런 기류는 이미 1949년부터 일본 정치인들 사이에서 감지되고 있었다"며 당시 요시다 시게루 일본 수상이 맥아더 장군에게 '재일조선인을 한꺼번에 한국으로 강제 송환할 권한을 일본 정부에 달라'는 서한을 보낸 것을 일례로 들었다.

    따라서 "재일한인들을 일본 밖으로 몰아내기 위한 시도는 사실상 1959년 귀국선이 첫 출항하기 10년 전부터 진행돼 왔다"고 주장한 김 감독은 "일본 정부는 1956년부터 재일한인에 대한 생활보조금 삭감 정책을 본격화하는 한편, 일본적십자와 국제적십자를 통해 재일한인들의 '귀국' 문제를 타진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인도주의라는 이름으로 재일한인 '추방'


    당시 일본에 살고 있던 재일한인은 65만명 정도였는데, 기밀해제된 문건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그들 중에서 1/6을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 일본이 선택한 방법은 인도주의 단체 국제적십자의 중재였다.

    결과적으로 재일한인 귀국사업은 일본과 북한을 대표해 일본적십자와 북한적십자, 그리고 제네바의 국제적십자 사이에서 벌어진 타협의 산물이었다는 게 김 감독이 바라보는 시각이다.

    김 감독은 "이 같은 일본 정부의 입장은 1950년대 후반 시작된 '천리마 운동'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진 북한의 내부 사정과도 맞아떨어졌다"고 분석했다.

    김 감독은 "당시 북한은 노동력을 보충하는 것은 물론, 차별받는 재일한인들을 귀국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며 "이에 북한은 초기 북송에 미온적인 재일한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무상주택·무상의료·무상교육을 골자로 하는 '지상낙원으로 가자'는 프로파간다를 대대적으로 전개했다"고 밝혔다.

    김 감독이 밝힌 북송된 재일한인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북한은 1967년부터 '자본주의 사상과 문화에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며 재일교포들을 상대로 가혹한 탄압과 대대적인 숙청을 전개했다. 1970년대에는 북한 주민을 3대 계층, 51개 부류로 분류했는데, 귀국자들은 '동요계층', 곧 '적대계층'으로 분류되면서 사회적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됐다.

    1970년 600명 정도였던 요덕수용소 내 정치범 인원은 1988년 5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 중 상당수가 일본에서 건너온 재일한인 귀국자들로 채워졌다.

    김 감독은 "이른바 귀국사업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는 국제적십자가 인도주의라는 미명 아래 일본과 북한의 북송 프로젝트에 동조해 벌어진 비극"이라며 "'귀국'이라는 단어와 '지상낙원'이라는 거짓 선전에 속아 북송선을 탄 사람들의 삶을 회복하는 일은 오늘날까지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과제"라고 말했다.

    김 감독이 각본·감독을 맡고 '다큐스토리 프로덕션'이 제작하는 다큐멘터리 영화 '귀국선'은 오는 12월 개봉을 목표로 제작 중이다.
  • ▲ 김덕영 감독이 2000년대 이후 기밀해제된 제네바 국제적십자의 공식 문서들을 토대로 1950~1960년대 재일한인 북송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라고 밝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진 제공 = 김덕영 감독
    ▲ 김덕영 감독이 2000년대 이후 기밀해제된 제네바 국제적십자의 공식 문서들을 토대로 1950~1960년대 재일한인 북송 사건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라고 밝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진 제공 = 김덕영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