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문자·진술 등 관련 기록 살펴봤다… 법조계 "경찰, 증거 수집하고도 정권 눈치보느라 밝히지 못했을 것"
  • ▲ 박원순 시장이 숨진 뒤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서울특별시장 분향소. ⓒ권창회 기자
    ▲ 박원순 시장이 숨진 뒤 서울시청 앞에 마련된 서울특별시장 분향소. ⓒ권창회 기자
    법원이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사실로 인정하면서 해당 의혹에 대한 경찰 수사가 부실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5개월 간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을 수사해 온 경찰이 관련 증거를 수집하고도 공소권이 없다는 이유로 해당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법조계 등에서는 경찰이 현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박 전 시장 사건에 대한 수사 내용을 밝히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1부(부장판사 조성필)는 동료 직원 A씨를 성폭행한 혐의(준강간치사)로 기소된 서울시장 비서실 전 직원 B씨 선고공판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혐의를 언급했다.

    법원 "박원순 성추행 틀림없다"

    재판부는 "A씨가 박 전 시장의 성추행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성폭력의 구체적 정황들을 공개했다. 박 전 시장이 사망해 공소권 없음으로 직접적인 수사가 진행되지 못했고 재판도 열리지 않은 사건에 대한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이다.

    재판부는 B씨가 A씨의 외상 후 스트레스가 박 전 시장 성추행 사건 때문이라며 무죄를 주장하자 피해자 진술과 관련 기록을 살펴본 뒤 이 같은 판단을 내렸다. 박 전 시장은 A씨가 시장 비서실에서 근무한 지 1년 반 이후부터 속옷 차림의 사진을 비롯해 '냄새 맡고 싶다' '몸매가 좋다' '사진을 보내달라' 등의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재판부는 특히 2019년 1월쯤 A씨가 다른 부서로 이동한 이후에도 박 전 시장이 '남자를 알아야 시집을 갈 수 있다' '성관계를 알려주겠다' 등 얘기를 했다는 진술이 여러 차례 있었던 점을 비춰볼 때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은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경찰은 지난해 7월 박 전 시장이 사망한 뒤 5개월 간 수사했음에도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지 못한 채 수사를 마무리했다. 지난해 말 서울경찰청은 박 전 시장의 강제추행·성폭력처벌법 위반 혐의 사건을 공소권 없음으로 수사 종결했다. 또 사건을 방조한 혐의를 받는 서울시 전·현직 관계자 7명은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법원이 관련 증거를 제시하며 처음으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혐의를 인정하면서 부실 수사 논란이 일고 있다. 법조계 등에서는 경찰 역시 관련 증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굳이 해당 사건에 대한 결론을 낼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 ▲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 측이 지난해 7월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성원 기자
    ▲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 측이 지난해 7월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성원 기자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본지와 통화에서 "B씨 사건 자체가 박 전 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법원도 그 사건을 들여다 본 것"이라며 "법원이 그 정도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경찰도 충분히 관련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법조계 "법원 사실인정은 증거에 따라… 경찰 이미 사실관계 확인했을 것"

    이 변호사는 "다만 경찰 입장에서는 피고소인이 사망하면 사건이 공소권 없음이 되기 때문에 혐의를 판단해도 되고 안해도 된다는 논리를 따랐을 것으로 본다"며 "피고소인이 사망한 것은 엄청난 일이기 때문에 혐의 여부를 일체 밝히지 않고 다 묻어버렸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법원의 사실인정은 굉장히 엄격한 증거에 따른다"며 "법원 판결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이 인정된 것은 사실 관계가 확인됐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했다. 이어 "결국 법원 판단이 나온 점을 볼 때 경찰이 관련 증거를 이미 수집했을 개연성은 상당히 높아 보인다"며 "경찰 수사 결과가 검찰에 송치됐으니 검찰이 철저히 수사를 해서 사실 여부를 밝혀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의 한 대학 경찰학과 교수는 "경찰이 증거를 수집하고도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이를 밝히지 못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경찰이 그동안 놀고만 있지 않았을텐데 주변인 진술 등을 통해 대략적 사건 관계는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이 사건을 공소권 없음으로 송치할 건데 이 사건의 내용을 공개할 것이냐 마느냐는 정치적인 문제"라고 했다.

    25일 인권위 조사 결과 발표에도 영향 줄 듯

    이에 대해 서울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피고소인이 사망하면 당연히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된다"며 "처벌이 받을 사람이 없는데 수사를 계속 진행하거나 결론을 냈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정치적 상황에 따른 과도한 지적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경찰이 수사를 하고도 그냥 덮지는 않는다"며 "또 박 전 시장 핸드폰에 대한 포렌식을 진행하려 해도 법원이 허락하지 않아 수사가 지연되는 등 어려움이 있었는데 갑자기 법원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번 법원의 박 전 시장 성추행 인정 판단은 관련 사건에 대한 인권위의 조사 결과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 경찰학과 교수는 "인권위가 법원이 판단한 내용과 다르게 판단할 수도 없고 그대로 발표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판사가 본 부분보다는 한 발이라도 더 나아간 내용을 발표해야 인권위의 권위가 설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8월부터 박 전 시장 관련 의혹 전반을 조사해 온 인권위는 최근 이를 최고 의결기구인 전원위원회에 회부하고 이달 25일 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당초 인권위는 이달 11일 결과를 발표하려 했지만 전원위원회가 한차례 휴회되면서 결과 발표가 순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