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백년전쟁', 공정성·객관성 의무 위반 안 했다"… 대법원, 원심 파기
  • ▲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이 동영상은 사진조작 등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뉴데일리DB
    ▲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이 동영상은 사진조작 등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뉴데일리DB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 '민족반역자' 등으로 묘사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의 제재가 적법했다는 1·2심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1일 '백년전쟁'을 방송한 시청자 제작 전문 TV채널 '시민방송(RTV)'이 방통위를 상대로 낸 제재조치명령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방통위의 제재를 정당한 것으로 판단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백년전쟁'이 방송의 객관성·공정성·균형성 유지의무와 사자(死者) 명예존중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 1·2심 깨고 파기환송… '시민방송' 손 들어줘

    김명수 대법원장을 포함한 13명의 대법관들은 최근 방송 분야의 구분과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는 만큼 보도 프로그램이 아닌 '백년전쟁'도 심의대상에 해당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 방송이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며 관계자들에게 징계 및 경고 처분을 내린 방통위의 제재가 적법했는지에 대해선 7대6으로 '부당하다'는 의견이 다소 앞섰다.

    김 대법원장 등 7명은 "'백년전쟁'은 공적 인물과 관련된 관심사를 다루고 있고,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재평가 등을 목적으로 시청자가 제작한 것으로, 여타 보도 프로그램과 달리 심사 기준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며 "이 방송이 다큐가 지켜야 할 의무를 어겼다고 볼 수 없고, 오히려 주류적 역사적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다양한 여론의 장을 마련한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세부적으로 진실과 차이가 있거나 과장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외국 정부 공식 문서와 신문기사 등에 근거하고 있고, 방송 전체로 보면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된다"고 설명했다.

    또한 "방송 중 역사적 평가 대상이 되는 공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사실이 적시됐다 하더라도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고, 이러한 논쟁이 인류의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며 "명예훼손 금지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부연했다.

    반면 조희대 대법관 등 6인은 "'백년전쟁'은 제작 의도에 부합하는 자료만 취사선택해 방송 내용 자체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아 객관성을 상실했고, 제작 의도와 상반된 의견은 소개하지 않아 공정성과 균형성을 갖추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부분은 누락하고, 근거 자료의 번역은 오역을 가장해 사실을 왜곡하는 식으로 역사적 인물을 조롱하고 희화화했다"면서 "공익과는 무관하게 두 전직 대통령의 인격을 훼손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본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이 전 대통령의 유족 측은 "터키로 치면 '케말 파샤' 같은 국부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신데, 허위사실과 날조된 자료를 바탕으로 인격적 살인을 당하셨고, 오늘 대법원에 의해 두 번째 난도질을 당하셨다"며 "그야말로 시일야방성대곡을 해야 할 판"이라고 개탄했다.

    유족 측은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린 판단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며 "이승만기념사업회 등과 협의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백년전쟁', 이승만을 '하와이 깡패' 등으로 비하

    '백년전쟁'은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좌파 성향 역사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6부작 다큐멘터리를 가리킨다. '두 얼굴의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 편 '프레이저 보고서' 두 파트로 나뉜 이 방송은 2013년 1~3월 '시민방송'을 통해 총 55차례 방영됐다.

    이 다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해 독립운동을 한 악질 친일파나 어린 여성과 불륜을 저지른 파렴치한 등으로 묘사했다.

    또 이 전 대통령을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에 빗대는 방식으로 'A급 민족반역자', '하와이 깡패' 등으로 표현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 등으로 비하했다.

    심지어 해당 동영상은 이 전 대통령을 하와이 교민들이 보내온 독립운동 성금을 횡령하고 하와이법정에서 동료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패륜아'로 그려 유족 측의 공분을 자아냈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는 2013년 5월 "'백년전쟁' 제작진이 허위사실임을 알고도 해당 내용을 영상으로 제작해 고인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김모(52) 감독과 최모(52) 프로듀서를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해당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제작진은 지난해 8월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1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피고들은 최소한의 소명자료도 없이 '의심된다'는 자료만으로 영상을 제작했고, 이것이 허위사실임을 인지했음에도 대선을 앞둔 특정한 시기에 대중에 공개했다"며 피고인 2명에게 각각 벌금 500만원을 구형했으나, 재판부는 배심원 판결을 바탕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항소심도 동일한 판단을 내렸다. 서울고법은 지난 6월 "이 방송은 영화적 특성을 가진 다큐멘터리로, 수집한 자료에 작가적 상상력을 더해 내용을 구성한 점이 인정된다"며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방통위·재판부 "'백년전쟁', 공정성·객관성 결여" 결론

    반면 방통위는 2013년 8월 "'백년전쟁'이 방송심의 규정 제9조(공정성) 1·2항과 제14조(객관성), 제20조(명예훼손 금지) 2항 등을 위반했다"며 방송 관계자들에 대한 징계·경고를 명령하고, 법정제재 사실을 방송으로 알리도록 했다.

    당시 방통위는 "이 방송은 사회적 쟁점이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된 사안을 다루면서도 공정성과 균형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특정 자료만을 근거로 편향된 내용을 방송했고, 직설적이고 저속한 표현을 사용한 방송으로 두 전직 대통령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이에 '시민방송'은 방통위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되자 2013년 11월 "방통위의 제재조치 명령을 취소해달라"는 행정소송을 냈다. '시민방송' 측은 "방통위가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의견진술 기회도 주지 않고 제재조치를 내린 것은 절차상 위반이고, 해당 방송은 공익을 위한 것으로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으며 보도 및 논평이 아니라 방통위 심의대상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1·2심 재판부는 "이 방송은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전직 대통령들을 폄하했고, 특정 입장에 유리한 방향으로 사실을 편집하고 재구성함으로써 공정성과 객관성을 상실한 정도로까지 나아갔다"며 방통위의 제재가 정당했다고 판시했다.

    '시민방송'이 항소심에 불복하면서 2015년 8월 대법원에 상고된 이 사건은 대법원 1부에 배당됐다가 지난 1월 상고심을 맡은 김선수 대법관이 사건을 전원합의체로 넘겼다. 전원합의체 회부는 대법관 4명으로 구성된 소부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기존의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