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돈재 前 독일 공사 "콜 총리의 결단이 통일 이뤄… 정치인들 역할이 가장 중요"
  • ▲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염돈재 제공)
    ▲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염돈재 제공)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독일 통일 전문가다. 1990년 10월3일 동과 서로 분단됐던 독일이 통일되던 때 그는 주독일 한국 공사를 지내며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다. 올해로 베를린장벽 붕괴 30주년. 염 전 공사로부터 독일 통일 과정의 교훈에 대해 들었다. 본지와 두 번째 인터뷰다. 

    "베를린장벽 붕괴는 동독의 '실수'로 일어난 일"

    "베를린장벽 붕괴는 사실은 동독 공산당 대변인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염 전 차장은 베를린장벽 붕괴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베를린장벽 붕괴가 독일 통일로 이어졌다는 세간의 평가를, 그는 뒤집었다. 장벽 개방이 '계획된 개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대신 통일 독일의 초대 총리가 된 헬무트 콜 등 서독 정치인들의 역할을 통일의 원천으로 꼽았다.  

    "베를린장벽 붕괴 과정을 이해하려면 조금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1989년 5월2일 헝가리가 개혁 의지 과시를 위해 오스트리아와 국경선 철조망을 걷어내자 8월부터 헝가리를 통해 매일 2000여 명의 동독 주민이 탈출해 탈독 열풍이 시작됐습니다. 9월 하순부터 동독 주민의 촛불시위가 확산하자 10월18일 18년간 집권해온 동독의 최고지도자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이 사임했어요. 그리고 새로 취임한 개혁성향의 에곤 크렌츠 서기장은 시위 진정을 위해 '여행자유화계획'을 인민의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게 '여행자유화'가 아니라 여행허가 절차를 다소 완화해 주민 불만을 무마하려는 시도였지요."

    염 전 차장에 따르면, 크렌츠 서기장이 내놓은 '여행자유화계획'은 인민의회 심의가 끝난 다음 날 시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1월9일 오후 6시 정례 기자회견 직전 크렌츠 서기장으로부터 인민의회에서 심의중인 법안 초안을 건네받은 공보담당 정치국원 권터 샤보프스키가 기자회견문에 있지도 않은 내용을 얼떨결에 발표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법안 내용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채 회견 말미에 "누구나 여행허가 신청이 가능하며 바로 허가가 내려질 것입니다"라고 잘못 발표했고. 곧바로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시행하느냐'고 묻자 "지체없이 지금부터"라고 답변한 것이다. 

    '가짜뉴스' 본 동·서독 주민 수천 명 몰려가 장벽 부숴

    "텔레비전 생중계와 뉴스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동·서독 주민 수천 명이 9시쯤부터 여러 국경 경비초소로 몰려가 장벽 개방을 요구했어요. 겁에 질린 병사들이 얼떨결에 주민들의 장벽 접근을 방치하자 동·서독 주민들이 장벽으로 올라가고 부수고 통로를 만들어 장벽이 무너졌지요. 늦은 밤 이 상황을 알게 된 크렌츠 서기장은 사태를 되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그 다음날 장벽 개방이 '계획된 개방'인 것처럼 발표함으로써 장벽 개방과 여행자유화가 공식화한 것입니다."

    베를린장벽 붕괴 당시 동독에는 소련군 54만 명이 주둔했다. 그런데도 베를린장벽 붕괴가 동독 공산정권 붕괴와 서독의 흡수통일로 연결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있다. 염 전 차장에게 직접 목격한 독일 통일 과정을 물어봤다. 

    "1985년 3월 취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경제 회생을 위해 개혁개방정책과 미국과의 데탕트(detente·긴장완화) 정책을 추진했지요. 그러다 1989년 3월 소련은 동유럽 군사개입의 근거가 됐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사회주의 형제국에 무력 개입할 수 있다는 주장)' 폐기 의사를 밝혔어요. 이는 경제 악화로 더이상 동유럽을 위성국가로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후 동독 주민의 탈출 열풍과 촛불시위가 본격화한 후 1989년 10월7일 동독 공산정권 수립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늦게 오는 자는 인생의 벌을 받는다'는 소련 속담을 인용해 동독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하자 동독의 시위 열풍이 더욱 가열됐고, 10월18일 마침내 호네커 서기장이 물러난 것입니다. 호네커가 무력진압을 포기한 것은 소련 측이 소련군은 동독 시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시위의 무력진압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던 때문으로 알려졌습니다."

    18년간 장기집권한 동독의 지도자 호네커 서기장이 물러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1989년 11월9일, 마침내 동서로 독일을 양분했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그해 12월1일 동독 공산정권은 공산당 1당독재체제를 포기하고 자유선거를 약속했다. 그리고 1990년 3월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기독교민주연합 중심의 정치세력 '독일연맹'이 선거에서 압승함으로써 4월12일 서독 기민당(CDU)의 자매정당인 동독 기민당 드메지에르 정부가 출범했다. 그리고 3개월여 뒤인 7월1일 독일은 동·서독 간 화폐경제사회통합을 거쳐 10월3일 마침내 통일을 이루게 됐다. 

    "헬무트 콜 서독 총리가 독일 통일 일등공신"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2차대전 전승국인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장애요인이 많았습니다. 흔히 독일 통일의 최고 공로자는 동방정책으로 화해·협력관계를 발전시킨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나 개혁개방을 추진한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촛불혁명의 주역 동독 주민 등이 거론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최고 공로자는 분단시대 서독의 마지막 총리이자 통일 독일의 초대 총리인 헬무트 콜 총리입니다. 콜 총리의 의지와 치밀한 대응이 독일 통일을 가능케 했습니다. 그리고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지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정치인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는 말입니다. " 

    서독의 콜 총리는 베를린장벽 붕괴 2주 후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해 장벽 붕괴를 통일과 연결시키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정치인들에게 애국·애족·통일은 "나치의 망령을 불러온다"는 이유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금기어(禁忌語)였기 때문에 정치생명을 건 결단이었다.

    또 베를린장벽 붕괴 후 서독 내에서 동독 탈출자의 입국을 제한하고 동독에 경제지원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할 때 콜 총리는 1년간 58만 명의 동독 탈출민을 전원 수용하는 파격적 결정을 내렸다. 동독 측의 국가연합 통일방안 제안과 경제지원 요구에는 "민주국가와 비민주국가 간 국가연합은 난센스이며, 경제지원은 동독에 민주정부가 들어선 후 가능하다"고 일축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화해정책으로 소련의 변화를 이끌어냈고, 베를린장벽 붕괴 후 독일 통일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소련·영국·프랑스가 독일 통일을 승인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김대중·문재인이 서독의 총리였다면…"

    염 전 차장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치'와 '외교'로 국민은 물론 주변 열강의 지지를 이끌어내 통일을 이룩한 독일을 지켜보며 우리 정치와 외교의 현주소를 실감한다. 

    "독일은 잠깐 스쳐간 기회를 이용해 통일을 이뤘어요. 우리도 1998년 북한경제가 파탄되고 중국·러시아의 북한 지원 여력이 없을 때 햇볕정책을 추진하지 않고 유엔 제재를 강화했다면 북한 핵개발 저지는 물론 김일성 세습정권의 붕괴도 가능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문재인 대통령은 한 술 더 떠 굴종의 대북정책을 추진하고 있어요. 국가지도자를 잘못 둔 것이 천추의 한(恨)이에요. 만약 김대중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이 서독 총리였다면 베를린장벽이 백 번 무너져도 독일 통일은 절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