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 “사본 출력물의 동일성·무결성 인정돼야…'원본과 같다' 변호인 동의가 필수"
  • ▲ '사법농단' 사건으로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뉴데일리 DB
    ▲ '사법농단' 사건으로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뉴데일리 DB
    “(검찰이 제출한 증거물은) 임종헌(60·사법연수원16기)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USB에 보관되기 전 법원행정처 심의관이 작성한 원본 파일이어야 한다. (검찰의) 동일성 확인만으로 심의관이 작성한 원본 보고서라고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 변호인 주장이다.”

    지난달 31일 서울중앙지법 제35형사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양승태(71·2기) 전 대법원장, 고영한(64·11기)·박병대(61·12기) 전 대법관의 2차 공판에서 검찰이 제출한 증거물인 ‘사본 출력물’에 대해 재판부가 밝힌 견해다.

    재판부 "검찰, 사본 출력물 동일성·무결성 입증하라"

    재판부는 그러면서 검찰에 사본 출력물의 동일성·무결성 입증 계획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양 전 대법원장 측이 사본 출력물의 ‘동일성·무결성’이 입증돼야 한다고 한 주장을 재판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전직 대법원장이 재판정에 선 사상초유의 ‘사법농단’ 재판에서 연일 증거물의 증거능력이 도마에 오른다. 1~2회 공판(5월29일, 5월31일)에서는 검찰이 법원행정처 압수수색 과정에서 구한 사본, 임 전 차장의 UBS에서 나온 사본 출력물 등을 두고 검찰과 변호인 간 증거능력 공방이 이어졌다. 서증(증거)조사도 당초 목적(10619번)보다 적은 7000번까지밖에 하지 못했다.

    문제가 된 사본 출력물들은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사법농단’ 의혹과 연관됐다고 검찰이 제시한 증거물이다. △강제동원 배상판결 관련 보고 △강제동원 관련 외교부 의견 반영 법관 검토 △상고법원 관련 BH 대응전략 △원세훈 전 국정원장 선고 관련 각계 동향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집행정지 관련 문건 △국정원 선거개입사건 항소심 선고 보고 등으로, 핵심 관련자 진술을 제외하면 ‘사법농단’ 혐의 입증을 위한 핵심 증거인 셈이다.

    그렇다면 ‘사본 출력물’은 증거능력이 있을까. 일각에서 주장하는 변호인단의 ‘재판지연’ 전략일까.

    형사소송법(형소법) 제318조는 ‘검사와 피고인이 동의한 서류·물건을 증거로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증거능력에 대한 예외사유로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진술해야 하는 자가 진술할 수 없을 때 조서·이외 서류를 증거로 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검사 출신 김대환 변호사는 “일반인들 입장에서 볼 때 재판지연 전략으로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피고인의 권한이고, 중요한 건 판사가 결정해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라면서 “동일성·무결성만 인정되면 사본 출력물은 인정되지만 이후 해당 파일을 만든 사람을 불러 조사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검찰 증거물에 대한 의문, 변호인의 당연한 권리”

    건국대 교수를 역임한 박인환 변호사는 사본 출력물을 두 가지로 분류했다. △USB에서 나온 원본을 다시 복사한 사본 출력물 △사본인 USB의 복사 출력물 등이다.
  • ▲ 양승태 전 대법원장 측은 지난달 29일 자신의 1심 공판기일에서 공소장 문제 등을 지적한 바 있다.ⓒ박성원 기자
    ▲ 양승태 전 대법원장 측은 지난달 29일 자신의 1심 공판기일에서 공소장 문제 등을 지적한 바 있다.ⓒ박성원 기자
    박 변호사는 “USB 원본에서 출력된 걸 다시 사본으로 만든 게 있을 테고, USB 자체도 수정가능해서 문제가 될 수 있다”면서 “그래서 변호인은 ‘USB를 실제로 보고 눈앞에서 출력하자’ ‘USB도 원본 맞는지 보자’고 하는 것이고, 이는 변호사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원리적으로는 원본 USB를 먼저 확인하고, 검사가 제출한 USB 원본이 맞다고 변호사가 동의하거나, 변호사가 동의하지 않으면 포렌식으로 밝힌 다음 거기에서 나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맞다”고 덧붙였다.

    재판지연 전략이라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서는 “변호사가 재판을 지연한다고 해서 판사가 따라가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법원행정처 압수수색 과정에서 압수한 사본 출력물은 증거능력이 인정되며, 다만 증명력 싸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형소법 308조에 따르면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따른다. 여기서 말하는 증거의 증명력은 증거능력과는 별개다. 증거능력이 ‘증거로서 인정되는지 여부’를 말한다면, 증명력은 ‘해당 증거가 사실관계 입증에 가치가 있는지’를 의미한다.

    검사 출신 강민구 변호사는 “아는 바로는 실무적으로 컴퓨터 파일 등을 증거로 할 때는 원칙적으로 피압수자·피고인 등의 입회 하에 해야 한다”며 “그 이유로는 (증거를) 임의로 할 경우 편집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절차대로 해야 증거능력이 인정되고, 증거능력상 문제 소지가 있다면 당연히 문제 삼을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증거능력보다 ‘증명력’이 핵심… 결국 판사 재량

    다만 강 변호사는 법원행정처를 압수수색할 때 나온 사본에 대해서는 “출력된 사본의 경우 사실상 증거능력이 인정된다”면서 “사본이 위조될 가능성은 있겠으나, 그건 증명력의 문제이지 증거능력의 문제 자체는 안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문건을 작성한 사람이 ‘이거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쓴 게 아니다’라고 하면 그건 증명력의 싸움”이라고 말을 보탰다. 원본을 위작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 한 해당 사본의 증거능력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한편 대법원 형사2부(권순일 대법관)는 지난해 2월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 법률상 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된 유흥주점 업주에게 징역 3년과 벌금 90억원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했다. 당시 검찰은 컴퓨터 파일의 복제본을 CD에 저장해 증거로 제출했다.

    재판부는 “전자문서를 수록한 파일 등의 경우에는 성질상 작성자 서명이나 날인이 없고, 작성자·관리자의 의도나 특정 기술에 의해 내용이 편집·조작될 우려가 있다”면서 “원본임이 증명되거나 원본으로부터 복사한 사본일 경우 원본 내용 그대로 복사된 사본임이 증명돼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러한 증명 없이는 쉽게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원본 동일성은 증거능력 요건에 해당, 검사가 구체적으로 주장하고 증명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