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시법원 앞서 길 막고 '과거사 판결' 해명 요구… KBS "인터뷰 요청 공문 보냈다"
  • ▲ 박보영 대법관이 2017년 12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다. ⓒ뉴시스
    ▲ 박보영 대법관이 2017년 12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다. ⓒ뉴시스
    KBS '추적60분' 취재진이 변호사 개업 대신 '시골 판사'를 택한 박보영(58) 전 대법관을 찾아가 "과거 판결에 대해 해명하라"면서 동의도 구하지 않고 촬영을 강행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23일자 언론 보도(조선·중앙·문화일보)에 따르면 KBS 취재진은 지난 15일 낮 12시~오후 1시 무렵 순천지원 여수시법원을 찾아가 박 전 대법관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취재진은 법원 청사 주차장에서 밥을 먹으러 나가는 박 전 대법관을 쫓아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관들이 내린 판결과 관련해 "당시 재판 내용이 국정협력 사례로 언급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박 전 대법관은 촬영을 거부했지만 취재진은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며 해당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했다.

    갑작스레 방송국 카메라와 맞닥뜨린 박 전 대법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현장을 빠져나간 뒤 직접 KBS에 "동의하지 않은 촬영분을 방송에 내보내지 말라"며 항의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6일 보낸 이 공문에서 박 전 대법관은 "본인 의사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상이나 사진·소리를 방영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방영한다면 위법행위이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순천지원 공보판사는 23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4월15일 오후 2~3시쯤 (순천지원) 담당직원에게서 (결재용) KBS 공문을 받았는데, 그 안에 '두 가지 질문에 대해 취재협조할 수 있느냐'는 내용이 있어 박 원로법관님에게 바로 연락을 드렸다"며 "전화를 받은 박 전 대법관은 '이미 (15일) 점심시간에 (KBS의) 무단촬영이 있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순천지원 공보판사는 24일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도 "KBS가 공문을 통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취재협조를 구해온 사실이 있어 사실관계를 언론사 측에 확인해준 적은 있으나, 15일 점심 무렵 KBS 취재진이 박 전 대법관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질문을 건넸는지는 파악하지 못했고 이를 외부에 알린 적도 없다"고 밝혔다.

    보도에 따르면, KBS 취재진은 4월11일쯤 ▲과거사 국가 배상을 제한하는 판결에 참여한 것에 대해 해명하라는 것과 ▲해당 판결에서 패소한 이들에 대한 사법부의 대책과 방향이 있으면 말해 달라는 질의 사항을 담은 공문을 순천지원 여수시법원에 보내고 박 전 대법관에 대한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 공문이 순천지원에 언제 접수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박 전 대법관은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15일 카메라를 대동한 KBS 취재진을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소식통에 따르면, KBS 취재진의 무단촬영 시도에 상당한 불만을 토로한 박 전 대법관은 관련 언론 인터뷰에 일절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선 "홍위병들의 폭력 보는 것 같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23일 긴급 비상의원총회에서 "KBS PD가 전 대법관이었던 박보영 판사를 취재하겠다고 무단으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서 '과거에 왜 박근혜 정부에게 편향적인 판결을 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며 "지금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이제 헌법재판소까지도 친문재판소로 완료했다"고 개탄했다.

    바른미래당 노영관 상근부대변인은 24일 공식 논평을 통해 "과거의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는 것은 마땅하지만 이번 박보영 전 대법관의 과거 대법원 판결과 관련한 입장표명 요청은 지라시 수준의 취재"라며 "현 정권과 뜻을 같이하는 KBS는 국민의 알 권리를 남용하며 국민을 핑계로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려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24일 '자신들과 의견이 다르다고 언론·필자 공격하는 홍위병 KBS'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KBS가 대법관 퇴임 이후 전남 여수에서 1심 판사로 일하고 있는 박보영 전 대법관을 찾아가 '피해자들에게 할 말이 있느냐'고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언론보도를 인용하며 "홍위병들의 폭력을 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전 국민이 KBS에 세금과 같은 수신료를 내는 것은 정파에서 독립돼 공정한 방송을 하라는 뜻인데, KBS는 정권의 응원단이 돼 비판언론을 공격하고 현 정권 입맛에 맞는 방송에 매달리고 있다"며 "더 이상 사회의 공기(公器)라고 할 수도 없다"고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KBS 내부에서도 비판의 소리가 나왔다. KBS공영노동조합(이하 공영노조)은 같은 날 배포한 성명에서 "'추적60분' 팀은 박 판사가 대법관 재직시절에 국가의 배상책임을 제한해, 피해자들이 힘들어 하고 있다는 내용을 취재하려던 것으로 보이는데, 취재에 응하지 않는다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습격'하듯이 취재하는 것은 상대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삼가야 한다"면서 "아마도 취재팀은 길거리에서 묻고, 이에 상대가 대답하지 못하고 피하는 장면을 찍어서 취재 대상이 도망가는 듯한 화면을 만들어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고 지적했다.

    공영노조는 "먼저 정식 공문을 보내서 공식 취재요청을 해야 하고, 문서나 메일 등을 통한 인터뷰도 가능한데, 이런 식으로 '당신이 과거 내린 판결이 잘못된 것이니까 소명을 하라'는 식으로 도발적으로 취재를 한다면 누가 취재에 응하겠느냐"고 지적한 뒤 "언론은 권력기관이 아니다. 취재 대상이 누구든 원칙과 예의를 지켜 취재해야 한다. 이것은 언론인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기본"이라고 꾸짖었다.

    KBS "국민을 대변해 예의 갖춰 질문했다"

    이처럼 KBS의 취재 행태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자 KBS '추적60분' 제작진은 "헌법상 사법부의 재판권·사법권이란 권력도 국민이 위임해준 것"이라며 "적어도 국민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는 과거사 재판 등에 대해서는 '왜 그런 판결이 내려졌는지' 국민이 궁금해한다면 취재진은 국민을 대변해 질문할 의무가 있으며, 사법부 역시 설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제작진은 "과거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삶을 취재하고 있는데, 이들이 국가 대상 손해배상소송 과정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전원합의체 판결로 인해 대법원 판결에서 패소한 것을 두고, 해당 판결을 내렸던 대법관들의 입장을 듣고자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박 전 대법관을 상대로 취재 요청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또한 "제작진은 순천지원과 여수시법원에 공문을 보내 인터뷰를 요청했고, 박 전대법관 개인 이메일로도 요청을 했지만 어떤 공식 문서를 받은 적이 없다"며 "취재 일정상 직접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고, 여수시법원 마당에서 점심시간에 박 전 대법관을 만나 KBS 소속과 이름을 밝히고 어떠한 물리적 접촉도 없이 적정거리를 유지한 채로 예의를 갖춰 질문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