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식 이사 "'5점 척도'로 '보통'에 의견 쏠리면 변별력 없어... 의사반영 과정도 불투명"
  • "흔히들 KBS의 주인은 시민이고 사장도 시민들이 뽑는다고 알고들 있잖아요? 하지만 제가 살펴보니 시민들은 사장 선임 과정에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없는 구조로 돼 있었습니다. 이사로 선임된지 한 달 반 만에 이 방송사가 거대한 모순덩어리라는 걸 깨닫게 된 거죠."

    천영식(53·사진) KBS 이사는 26일 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김상근 KBS 이사장은 지난 2월 사장 후보자들의 정책발표회에 참석한 시민자문단에게 '여러분이 KBS의 주인'이라며 '여러분의 판단과 결정을 고스란히 받아내겠다'고 말했지만, 여기와서 살펴보니 시민자문단의 판단과 결정이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김상근 KBS 이사장은 지난 정책발표회에서 '여러분이 주인으로서 하실 일을 하시도록 자리를 펴드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난 4월 취임한 양승동 KBS 사장도 'KBS를 시민의 품으로 돌려드리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었죠. 이 분들의 말처럼 시민이 KBS의 주인이 되려면, 결정 과정에서 유의미한 자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장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요. 이들을 뽑는 과정도 투명하지 않아요. 게다가 이들의 판단과 결정이 어느 정도 반영됐는지는 공개되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로 허울 뿐인 주인이라는 거죠."

    천 이사는 "지난 2월엔 150명의 시민자문단이 사장 선임 과정에 참여했고 이번엔 조금 늘어난 170명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말로 시민이 주인이 되는 제도가 성공하려면 참여 숫자가 더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150명이나 170명 정도로는 시민의 여론을 반영했다고 보기 힘듭니다. 명색이 나라를 대표하는 공영방송의 수장을 뽑는 자리인데 더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이사회에 참석할 때마다 적어도 200~300명 이상은 돼야 한다고 강조해왔는데요. 다른 분들의 반대로 관철시키지 못했습니다."

    천 이사는 "두 번째로 이 제도를 투명하게 운영하려면 선임 과정에 참여하는 시민자문단을 잘 뽑아야 한다"며 "각양각색의 국민을 대표하는 표본을 추려내는 일은 외주 대행사가 맡게 되는데, 문제는 지난번 시민자문단 샘플링을 맡았던 업체가 이번에도 시민자문단을 구성하는 일을 맡아 안팎으로 논란이 일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시민자문단을 샘플링하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샘플링하는 업체를 잘 뽑아야 하겠죠. 정당에서 당원 투표를 할 때에도 여론조사 업체가 나서 지역별 성별 연령별 기준에 맞춰 샘플링을 합니다. 당연히 이 모든 과정은 투명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그런데 시민자문단의 경우는 이 대행사를 경쟁이 아닌 수의 계약으로 뽑고 있어요. 제가 이 문제를 거듭 지적했지만 이사회에선 시간이 없다며 자꾸 넘어가는 바람에 공론화 되질 못했습니다. 업체 선정 과정부터 투명한 방식으로 바꿔야 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일을 지난번에 했던 업체에게 또 맡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천 이사는 "세 번째로 '여러분의 판단과 결정을 고스란히 받아내겠다'는 김상근 KBS 이사장의 약속이 '빈말'이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시민이 어떤 판단을 내렸고 이 판단이 사장 선임 과정에 어떤 식으로 반영됐는지를 살펴봐야 하는데 정작 시민자문단이 각 후보들에게 매긴 점수는 내부적으로 이사회에서만 볼 수 있어 국민들이 공유하지 못한다는 맹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시민이 주인 자격으로 사정 선임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민들이 어느 후보에게 몇점을 매겼는지 시민들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공개할 필요가 없겠지만 총체적으로는 공개가 돼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점수 공개가 원천적으로 안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사회에서만 나중에 알 수 있도록 돼 있어요. 이러면서 어떻게 KBS를 국민의 품으로 돌려주겠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장 결정 프로세스를 시민이 모르고 있는데 무슨 시민이 주인이라는 말입니까? 시민의 이름을 내세웠으면서 정작 일처리는 자기들끼리 하는 대단히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천 이사는 "KBS 경영진과 여타 이사들은 부작용이 많아서 공개를 안하고 있다고 해명하고 있는데, 그토록 부작용이 우려되면 애당초 이런 제도를 도입하지 말았어야지, 이제와서 부작용이 우려돼 공개를 안하겠다는 건 앞뒤가 뒤바뀐 처사"라고 꼬집었다.

    "일단 제도를 도입했으면 제도의 취지에 맞게 운영을 하고, 부작용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부작용이 우려돼 최소한의 원칙마저 지키지 않겠다는 건 앞뒤가 거꾸로된 거죠.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시민자문단을 둘러싼 모든 게 베일에 쌓여 있습니다. 전혀 투명하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천 이사는 "시민자문단의 평가 배점 문제도 심각하다"며 "겉으로는 시민자문단의 평가 결과가 40%, KBS 이사회의 평가 결과가 60% 반영돼 사장 후보자가 최종 결정되지만, '5점 척도'로 평가가 이뤄지는 바람에 변별력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이사회의 표심에 무게 중심이 쏠리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5점 척도는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지지하지 않는다'. '보통이다'. '지지한다'. '매우 지지한다' 같은 5개의 설문 모형을 만든 뒤 특정 대상에 대한 호감도를 묻는 설문 조사 방식을 일컫는다. 여론조사에서 많이 쓰이는 방식이긴 하나, '보통이다'에 의견이 쏠리는 경향이 많아, 확실한 답을 내야 하는 경우에는 잘 쓰이지 않는다.

    "이런 설문조사를 하면 심리적으로 중간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통상 여론조사가 그렇습니다. '보통'이란 항목을 집어 넣으면 '변별력'이 약해진다는 건 이 분야에선 상식으로 통합니다. 이런 식으로 여론조사 업체들이 장난을 많이 치죠. 기가 막힌 건 사장 후보자들에 대한 평가가 끝나면, 시민자문단을 상대로 '이번 선임 절차가 잘 됐는지'를 묻는 만족도 조사를 또 실시하는데요. 그때에는 '4점 척도' 방식으로 조사를 합니다. 자기들이 유리한 질문에선 '보통'이라는 항목을 빼고요. 정작 중요한 사장을 뽑는 질문에선 '보통'이라는 항목을 집어 넣은 겁니다."

    천 이사는 "시민자문단의 점수가 가운데(보통)로 많이 몰리게 되면, 정작 사장 후보자 결정 과정에 자문단 의견의 반영 비율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가뜩이나 40% 밖에 되질 않는데 이런 식으로 '허공에 날리는' 평가가 많아지만 실제로 반영되는 비율은 20% 이하로 떨어질 수도 있다"고 밝혔다.

    천 이사는 "반면 KBS 이사들은 사전에 누구를 밀지 결정하고 전략적으로 투표에 임하기 때문에 당연히 '변별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며 "한 마디로 순수한 마음을 갖고 평가에 임하는 시민들의 심리를 악용하는 아주 영악한 설문 조사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 왜 KBS가 시민들이 평가한 점수를 공개 안하려 하시는지 아시겠죠? 유의미한 답변이 많이 안나왔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은 전략적으로 저 사람을 밀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후보자들의 정책설명회를 듣고 나름의 평가를 내리는 거죠. 이때 후보자를 냉정하게 평가하기보다는 '평균 점수'를 주는 분들이 많이 나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봅니다. 이럼 함정들이 이 제도 안에 숨어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시민이 빠진 '시민자문단 평가'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점수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시민들이 알 수 없는 평가제도로 KBS 사장이 선임되고 있는데, 이걸 문제 삼고 있는 분들이 거의 없다는 게 더 문제라고 봅니다."

    끝으로 천 이사는 "방송법 50조를 보면 이사회가 (신임)사장을 제청할 때에는 제정 기준과 제청 사유를 제시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는데, 정작 이사회로부터 사장 선임 권한을 40% 물려 받은 시민들이 해당 후보를 왜 제청하는지에 대해서는 공개되지 않아 방송법 취지에 어긋나는 오류를 안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사회가 시민들에게 사장 선임 권한을 40% 나눠준다고 말만 하는 것으로는 제청 기준과 제청 사유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권한을 나눠줬으면 시민들이 그 후보에게 몇 점을 줬고 자신들의 평가가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이런 것도 밝히지 못하겠다면 기존 이사회가 자기들끼리 사장을 뽑는 방식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운영 행태가 대의명분에 맞지 않으면 국민을 속이는 겁니다. 이사들만 뽑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 국민들이 참여해 뽑으니 더 현명하더라, 이런 인식이 확산돼야 이 제도가 의미 있는 겁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여러 장치를 만들어 놓고 제대로 운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인 거죠. 지금보다 시민들의 참여도를 높이고 모든 과정을 공개해 제도를 더욱더 투명하게 운영해야 합니다."

    천 이사는 "지금까지 이런 맹점에 대해 아무도 알려주거나 물어보는 사람이 없어 이 자리를 빌어 말씀드리는 것"이라며 "제도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제도의 합리성과 공정성을 보완해달라는 취지로 드린 말씀이니만큼 제가 지적한 문제점들이 조속히 공론화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한편 KBS 이사회는 27일 170명 규모의 시민자문단이 참여하는 가운데 사장 후보자 3명(양승동 KBS 사장, 이정옥 전 KBS 글로벌전략센터장, 김진수 KBS 해설국장)이 나서는 정책설명회를 실시한다. KBS 이사회는 시민자문단 평가 점수(40%)에 31일 진행되는 KBS 이사회 면접 결과(60%)를 합산해 가장 높은 배점을 받은 후보자를 신임 사장 후보로 확정지을 방침이다. 31일 정기이사회에서 임명제청된 최종 사장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최종 임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