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이해찬 민주 새 대표... '친문 패권' 핵심 지목돼 탈당 전력도... "스킨십 부족" 평가
  • ▲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신임 당대표.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신임 당대표.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신임 대표는 '힘있는 당대표론'을 앞세워 당내 최대 계파인 친문(친 문재인 대통령) 표심을 얻고 25일 당선됐다.

    이해찬(65세) 대표는 참여정부 시절 교육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등 친노(친 노무현)계 좌장으로, 경험·관록과 힘이 강점이다. 선거 과정에서 앞으로는 당의 독자적인 주장 관철과 수평적 당청 관계 수립을 약속했다. 그동안 민주당이 '청와대 거수기' 등의 표현으로 정국 주도에 작은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초반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대세론을 끝까지 이어갔다.

    민주당에서 최다(7)선 현역 의원으로 문희상 국회의장과 함께 친노계의 상징적인 큰형님이자 정신적 지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깍듯하게 '형님'이라 부르면서 선배로 대우한 사람이다. 이해찬 대표는 당내 현역 의원들 중 가장 국회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고, 또 당의 전신인 민주통합당의 당 대표를 역임한 경험도 있어 연륜과 수완을 모두 갖추고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건강 이상설이 불거지면서 당대표가 되더라도 당무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겠냐는 우려가 계속해서 지적돼 왔다. 이 대표 측은 "건강 이상은 아니다"라며 일축하고 있지만 그가 다리를 저는 듯한 모습을 담은 대의원대회 영상은 SNS를 통해 널리 퍼지며 논란을 낳았다.

    또한 한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문 실장"으로 호칭하는 등 당대표가 되면 대통령이 불편해할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과 더불어, 스킨십이 부족해 불통적인 인물이라는 비판도 제기됐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거운동 막판에 기자간담회도 늘리고 당원들과 만나는 일정도 다수 잡는 등 노력을 보이기도 했다.

    이 대표는 선거를 치르면서 당대표를 마지막 소임으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이날 전당대회 정견발표를 통해 "사심이 없어야 공정할 수 있다"며 "7선 국회의원, 세 번의 정책위의장, 국무총리를 한 제가 뭘 더 바라겠는가.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당을 운영할 때 민주당은 강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민주당 20년 집권플랜은 촛불혁명이 요구하는 우리 당의 역사적 책무"라며 ▲연수원을 설립해 인재 양성 ▲여성 당원 동지들의 활동 지원 ▲자치분권 기구 설립 ▲온라인 오프라인 결합한 플랫폼 만들어 소통 ▲당원 자치회 활성화 ▲투명한 상향식 시스템 공천 등을 약속했다.

    이번에 선출되는 민주당 당 대표는 임기가 2020년에 있을 21대 총선에 걸쳐져 있어 국회의원 공천에 대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향후 공천 과정에서 계파 갈등으로 잡음이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당원들 사이에서는 이해찬처럼 카리스마 있고 정치 경력이 많은 거물급 인사가 당 대표로 있어야 잡음이 덜할 것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 ▲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신임 당대표.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신임 당대표.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학생운동하다 투옥… 민주화 재야운동에 투신

    이해찬은 1952년 7월 10일에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아버지 이인용과 어머니 박양순의 3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찍이 서울로 상경해 1971년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섬유공학과에 진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자퇴한 뒤 이듬해인 1972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 선포를 계기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은 그는 2년 뒤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돼 1년을 복역했다. 징역으로 군대는 면제받았다. 출소 후 이해찬은 생계를 위해 무역회사에 다녔으며,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이 차린 번역실에서 번역을 하기도 했다. 1978년 동문인 김정옥 씨와 결혼하고 광장서적을 설립했다. 이듬해 출판사 '돌베개'를 설립하고 주로 사회과학 서적을 냈다.

    이해찬은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투옥됐다가 수감 2년 6개월 만에 특사로 석방됐다. 이후 재야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반독재 운동과 출판 활동 등에 종사했다. 1987년 이해찬은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에 선출됐고, 6월 항쟁 당시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았다.

    ◆80년대 말 정치 입문, 노무현과 청문회 스타로 화제

    이해찬은 1987년 말 한겨레신문 창간발기인을 지내고,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에 섰던 재야인사들과 함께 평화민주당에 입당했다. 1988년 총선 서울 관악구에서 평민당 후보로 당선된 이후, 연속 5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해찬은 노무현, 이상수 의원과 함께 13대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이른 바 '노동위 3총사'로 활약했다. 1988년 5.18 광주 청문회 당시 국회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간사에 선출됐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발포 사건과 녹화사업 등을 두고 당시 5공화국 관련자들을 집중 추궁해 노무현과 함께 청문회 스타의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1995년 6.27 지방선거 때 조순 서울시장 후보 캠프에서 선거 전략을 담당하면서 후보 당선을 이끌어 처음으로 선거 기획 능력을 인정받았다. 선거 전략 관여로 대통령 세 명을 배출한 '킹 메이커'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조순 서울시장 당선 5개월만에 12월 당의 부름을 받아 서울시 정무부시장직을 사퇴하고 새정치국민회의 총선기획단장을 맡았다.

    이해찬은 김대중이 1995년 9월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입당했다. 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맡아 자민련과의 정책공조를 이끌었고, 1997년 7월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선 기획본부 부본부장에 선출됐다. 12월 대선에서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 간사에 임명됐다. 1998년 2월까지 이해찬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책분과담당 간사로 활동했다.

  • ▲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신임 당대표와 김진표 의원(왼쪽), 추미애 전 대표(오른쪽).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신임 당대표와 김진표 의원(왼쪽), 추미애 전 대표(오른쪽).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교육부 장관에 총리까지… DJ·노무현 정부 시절 정치계 정점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이해찬은 48세에 교육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장관 재임 기간 동안 공무원 성과급 제도·고교 평준화·보충수업 폐지 등의 개혁안을 추진했다. 교원의 촌지 근절 및 교원 뇌물 수수 집중 단속으로 교직 사회 비리 근절을 꾀했고, 입시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성급한 개혁으로 '이해찬 세대'를 대거 양성해 그들이 수능에서 참패하게 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대학교 입시 목적으로 고등학교에서 강제로 시행되던 야간 자율학습과 월말·학력·모의 등 각종 고사를 전면 폐지했고, 중학교에서도 일부 잔존하던 연합고사와 학력고사, 모의고사 등을 폐지했다. 그의 개혁안에 반발하는 일선 중학교, 고등학교 교사들의 비난이 제기됐으나 강행했다. 교원 정년을 만 65세에서 만 62세로 단축하는 등의 교원개혁을 추진하고 완료했다. 또한 학교폭력 집중 단속을 내세워 가해 학생들에 대한 징계와 퇴학 등의 강력한 처벌을 추진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해찬은 당시 노무현 후보의 선거대책반에 들어가 활동했으며, 2003년 11월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에 가담했다. 그는 창당기획준비단 단장을 역임하고 창당 후엔 열린우리당 국회개혁추진단 단장에 선출됐다.

    이해찬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때 권한대행을 맡았던 고건 전 총리가 사임한 후, 국무총리로 발탁, 청문회를 거쳐 임명됐다. 총리 재직 때인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군 지역에 산불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국무조정실 직원들을 데리고 경기도 포천의 한 골프장에 골프 하러 갔다가 언론의 집중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같은 해 남부 지역에 홍수로 수해를 입고 있었는데도 제주도에서 골프를 치는 바람에 빈축을 샀다.

    노 전 대통령은 매주 열리는 국무회의에 한 달에 한 번꼴로만 참석해 국무회의 부의장인 이해찬이 의장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해찬은 총리 재직 시절 '실세 총리'라는 평에 걸맞게 자기 주관과 소신을 밝혀 여야 원내외와 수시로 갈등했다. 노 대통령과 생각이 다를 땐 언쟁도 불사했다.

    또 제1야당인 한나라당에 맞서 직설적인 발언으로 국회 파행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해찬은 이번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을 때 이때의 모습들을 거론하며 '야당과 잘 지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 그는 "당시 야당의 질의가 너무 수준 이하여서 그랬다"고 반박했다.

    이해찬은 세종시 설계 및 추진을 하며 2년 가까운 기간 동안 총리 임기를 수행했다. 하지만 2006년 3.1절, 세 번째로 '골프 파문'에 휩싸여 총리직을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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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신임 당대표.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친문 패권주의' 핵심 인물로 지목돼 탈당… 여의도 복귀해 문 대통령 당선 도움

    이해찬은 2008년 18대 총선에 불출마하고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했다. 2009년 시민주권 상임대표, 2011년 12월 시민통합당 창당을 주도했다. 2011년 12월 21일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됐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세종특별자치시 선거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로 돌아왔다.

    2012년 19대 총선 땐 본인의 5선 지역구 관악구 을에 다시 나오지 않고 세종시로 내려가 당선됐다. 당시 한명숙 지도부가 19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같은 해 6월 9일 열린 민주통합당 임시 전당대회에서 이해찬은 경쟁상대인 김한길 후보를 누르고 당 대표에 당선됐다. 이후 18대 대통령 선거 관련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에서 지도부 인적쇄신론이 나오면서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당대표 대행을 맡기고 사퇴했다.

    20대 총선 한달 전인 2016년 3월, 민주당 김종인 지도부가 그의 지역구인 세종시를 '전략공천 지역'으로 선정해 이 의원을 쫓아내면서 다시 그의 존재감이 되살아났다. 이해찬은 자진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결국 김종인 지도부는 그를 쫓아내기에 이른다. '친노 패권주의'를 청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친노계 좌장인 이해찬을 제거한 것이라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해찬은 곧바로 무소속 출마하고 당선될 경우 복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새누리당 박종준 후보를 누르고 당선돼 7번의 선거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전승한 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16년 9월 30일 열린 더불어민주당 당무위원회의에서 이해찬과 징계를 받았던 세종시당 당원들의 일괄 복당을 의결하면서, 더불어민주당에 복귀했다. 그리고 11월 2일 더불어민주당이 당 국정자문회의를 외교안보통일 자문회의와 국가경제 자문회의로 이원화한 뒤, 이해찬을 외교안보통일 의장에 선임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경선에선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선거 캠프에 참여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고 중립을 지켰다. 이후 문재인 대선 후보 확정 이후에 선대위원장이 됐다. 지난해 5월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선거의 제왕이라는 타이틀을 이어가게 됐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집권 여당의 원로로써 예전처럼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2선으로 물러난 모양새를 보였다. 중국 특사로 임명돼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한 것을 제외하면 언론에 비추는 빈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이해찬은 20대 국회 전반기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중 국회 결석률이 매우 높은 편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국회 결석률 상위 20명 중 유일하게 민주당 소속으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6.13 지방선거가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난 이후, 추미애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8월 전당대회에서 차기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예상돼 왔다.
     
    당 안팎에서 지속적인 출마를 권유받은 이해찬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후보 등록 마감을 앞둔 지난달 20일 본격적으로 당 대표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달 26일 민주당 전당대회 당 대표 후보 예비 경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했다. 더불어민주당 제3대 당 대표직을 끝으로 30년 정치 일생을 마무리할 뜻을 밝힌 그가 향후 2년간 맡게 될 당 대표로서의 행보는 어떨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