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학사, 비상교육 2종만 업적 및 생애 자세히 서술...금성 등 일부 교과서, 이름만 들어가
  • ▲ 유관순 열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유관순 열사.ⓒ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3.1운동 100주년이 1년 앞으로 다가왔지만, 독립만세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 관련 한국사교과서 기술은 여전히 부실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금성출판사 등 일부 한국사교과서는 유 열사의 사진 없이 이름만 표기할 정도로 그 내용이 빈약했다.

    2015년 교육부는 고교 한국사교과서에 유관순 열사에 대한 설명 게재를 권고했다. 당시 보급된 8종의 검인정 한국사교과서에서 '유관순' 이름 석자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부 좌편향 역사학자들이 유관순 열사의 순국을 악의적으로 왜곡·폄훼한 결과다. 이들의 '유관순 비하'는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한국사교과서 대부분은 어린 소녀의 순국을 기록하는데 매우 인색했다.

    반미 감정이 깊이 스며든 좌파 역사학계는, 그녀가 미국 감리교의 지원을 받은 이화학당 출신이라는 사실에 불편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교육부의 권고 이후 한국사교과서의 서술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뉴데일리>가 현재 고교 학생들이 사용하는 한국사교과서 8종을 모두 확인한 결과, 유관순 열사 관련 서술은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모든 교과서에 유관순 열사의 이름이 포함된 건 그나마 개선된 부분이지만, 이마저도 3.1운동의 전개 과정이나 서대문형무소 소개 항목에서 달랑 이름 만을 넣거나 작은 사진을 게재하는 정도에 그쳤다. 유관순 열사를 비교적 자세하게 다룬 교과서는 지학사와 비상교육 2종에 불과했다.

    특히 '유관순 순국'이 갖는 역사적 의미, 그녀의 순국이 3.1운동과 그후 전개된 국내외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을 비중있게 서술한 교과서는 찾기 어려웠다.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류정우 회장은 “교육부의 지시에 형식적으로 서술한 측면이 강하다”고 평가했다.
  • ▲ 류정우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제22대 회장.ⓒ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류정우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제22대 회장.ⓒ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사진 없이 이름만 단순 언급한 교과서도 있어

    다음은 출판사별 유관순 열사 관련 서술이다.

    1. 『고등학교 한국사』 미래엔(MiraeN)
    “(사진 게재) 아우내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다 체포된 유관순은 일제의 고문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순국하였다. 이 사진은 수감자 기록부에 있는 유관순의 모습이다.”

    2. 『고등학교 한국사』 동아출판
    “(사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1902~1920])”

    3. 『고등학교 한국사』 리베르스쿨
    "(사진) 독립운동 혐의로 수감된 유관순(1902~1920)"

    4. 『고등학교 한국사』 비상교육
    “<유관순>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던 유관순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계속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가 남산에 있는 경무 총감부에 붙잡혀 갔으나,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3월 10일 모든 학교에 임시 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고향인 병천(현재의 천안시)으로 내려가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는 3,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는데, 유관순은 직접 만든 태극기를 나눠 주며 연설을 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만세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 헌병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아 댔고, 이때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헌병에게 체포된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형무소 안에서도 독립 만세를 외쳤고, 그때마다 매질과 고문을 당하였다. 결국 유관순은 1920년 9월 28일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사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의 수형 기록
    유관순 열사 기념관 http://yugwansun.cheonan.go.kr 유관순 열사와 관련된 유적과 기념행사에 대한 정보를 살펴볼 수 있다.

    5. 『고등학교 한국사』 지학사
    “<독립 만세의 횃불을 올린 유관순>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다니던 유관순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10일 모든 학교에 임시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인 충남 병천으로 내려가 동지를 규합하고, 3월 31일 저녁 병천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높이 올렸다. 유관순은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평화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총을 쏘아댔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명이 죽고 유관순은 체포되었다.
    유관순은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도 독립 만세를 부르며 옥중 동료들을 격려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계속되는 고문으로 1920년 9월 28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사진) 유관순(1902~1920)

    6. 『고등학교 한국사』 천재교육
    “<3.1 운동의 전개> 서울 외에도 평양, 진남포, 원산 등 각 지방의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선언과 평화적인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중략) 이 과정에서 유관순 등과 같은 학생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각종 비밀 결사가 조직되어 시위를 이끌어가기도 하였다.”

    7. 『고등학교 한국사』 교학사
    “(사진) 유관순(1902~1920)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민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는 등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8. 『고등학교 한국사』 금성출판사
    <독립정신과 민주주의 현장, 서대문형무소>
    “1908년에 만들어진 서대문형무소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간직한 곳이다...(중략) 김구, 안창호, 유관순, 한용운 등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 ▲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중 유관순 열사 서술 부분.ⓒ 뉴데일리DB
    ▲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중 유관순 열사 서술 부분.ⓒ 뉴데일리DB
    일부 좌편향 학자, 뚜렷한 근거 없이 유관순 열사 폄훼 

    류 회장은 ‘유관순 열사’ 인물 소개와 활동(업적) 서술은, 적어도 지학사와 비상교육 수준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관순’이라는 인물을 서술하려면 당연히 그 인물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설명이 붙어야 한다는 것이다.

    류 회장은 유관순 열사의 업적이 과장됐다는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유 열사의 만세 운동은 천안, 조치원 등지에 영향을 줬고, 이후 장날을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자주 일어났다. 유관순 열사는 어린 나이였지만,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이후에도 독립만세를 외쳤고, 일본의 재판권을 부정하며 끝까지 항거했다.”

    '유관순은 친일파들이 조작한 허구'라는 일부 좌편향 역사학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근거 없는 비하이며, 반미 성향 역사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사실을 왜곡한 결과”라고 밝혔다.
    “일본이 유관순 열사에게 한 짓을 보면 일본이 유 열사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 결국 18세 어린 나이에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의 스승인 박인덕이 친일파라는 논란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일찍 순국한 유 열사가 그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유 열사가 이화학당 출신으로 친미(親美)적 인물이고, 기독교가 3.1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일부 좌파 학자들이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앞서 2014년 8월,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한국사교과서 발행체제 개선안 토론회'에 참석해,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 업적을 전면 부정했다. 심지어 그는 “친일 경력이 있는 그녀의 선배가 해방 후 유관순을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주장도 폈다. 다음은 당시 김정인 교수의 주요 발언. 
    “북한에서는 당연히 유관순을 모르고,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1950년대 들어갔다는 게 최근의 연구 성과이다. 친일 경력이 있는 (이화여전 선배) 박인덕이 해방 후 발굴해 이화 출신 영웅으로 만들었다.”
    김 교수는 논란이 커지자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를 직접 찾아가 사죄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중심으로 '유관순 열사 서훈 올리기 범 국민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유관순 열사는 1962년 건국훈장 3등급인 독립장에 추서됐지만, 그의 공적과 상징성을 고려할 때 걸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현재까지 청원 참여 인원은 22,373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