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묻지 않은 '정치신인'이기에 가능한 말… 범보수 표심 움직일까
  •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31일 기자간담회 도중 단호한 손동작을 취해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31일 기자간담회 도중 단호한 손동작을 취해보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스스로를 '정치 신인'이라 밝힌 만큼 터부(taboo)가 없었던 것일까.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우상화된 '떼촛불 광장 민심'에 대해 "변질됐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반기문 전 총장은 31일 오후 서울 마포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광장의 민심이 초기의 순수한 뜻보다는 약간 변질된 면도 없지 않다"며 "다른 요구들도 많이 나오는데, 그런 면은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기문 전 총장의 말대로 매주 주말마다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촛불집회는 처음과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극초창기에는 박근혜정권의 국정 운영 과정에서 최순실 씨 등 민간인이 개입해 농단한 것에 분노하는 순수함이 일면 있었고, 이에는 일부 보수층도 가담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변질'이 심해졌다. 그들의 구호대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돼 황교안 국무총리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이 됐는데도, 떼촛불들은 '박근혜 구속, 황교안 퇴진'을 외치며 나라를 무정부상태로 몰아넣으려 했다.

    급기야 이석기 전 의원의 석방 구호가 전면에 나오기도 했다. 이석기 전 의원은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정당 결정을 받아 해산된 구 통합진보당의 수괴다. "미국놈들과 붙는 민족사의 결전기에서 우리 동지부대가 통일혁명의 선두 역할을 한다면 명예가 아닌가" 등으로 내란을 선동한 혐의가 모두 유죄 인정돼 징역 9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며 헌법재판소에 심판을 회부하는 탄핵을 외치던 '촛불 민심'이 같은 장소에서 헌법재판소의 위헌정당 해산결정을 부정하는 '이석기 석방'을 외치는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이러고도 변질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상하다.

    반기문 전 총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내가 밖에서 10년 있었으니 국내 정치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정치 신인의 눈으로 보는 게 어떨 때는 더 정확하다"며 "어린아이로부터도 배울 게 있다고 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자칭 정치지도자들은 '광장 민심'이 변질된 줄 알면서도 '떼촛불'의 힘에 벌벌 떨며 맹목적으로 숭앙(崇仰)하고 있다. 마치 개헌안 전문에 '촛불 민심'이라도 집어넣어야 할 것처럼 우상화가 됐다. 기성 정치인으로서는 감히 비판할 수 없는 터부가 된 것이다.

    반면 이날 반기문 전 총장이 변질된 것을 "변질됐다"고 가감없이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말 그대로 본인이 때묻지 않은 정치 신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분석이다. 마치 어린아이만이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 ▲ 지난달 17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8차 촛불집회에서 이석기 석방을 요구하는 마스코트가 행진하자, 시위 참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지난달 17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8차 촛불집회에서 이석기 석방을 요구하는 마스코트가 행진하자, 시위 참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반기문 전 총장의 이날 "촛불 민심이 변질됐다"는 발언은 개헌추진협의체 구성 제안 직후 취재진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왔다.

    당초 기자간담회 주제에서는 벗어난 질의와 응답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준비된 발언인지 솔직한 자신의 심중을 터놓은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하지만 "촛불 민심이 변질됐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유력 대권주자를 국민들은 드디어 갖게 됐다. '떼촛불'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었던 보수층이 움직일 것으로 전망된다. 지지율 반등의 중대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비단 '태극기 집회'에 나서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보수층인 '침묵하는 다수' 사이에서도 촛불 집회는 이미 꼴불견으로 전락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돼서 직무정지가 됐는데도, 왜 계속 광장에 떼로 몰려나와서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고 민심을 불안하게 하느냐는 게 이들 사이의 솔직한 여론이다.

    지난 12일 바른정당 경기도당 창당대회가 열린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만난 박모(광명·50대·여)씨는 "촛불시위도 솔직히 못마땅하다"며 "국회에서 탄핵을 했으니, 이제는 헌법재판소에 모든 것을 맡기고 다들 생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바른정당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가세한 정당이다. 이 정당을 지지한다며 도당 창당대회에 온 보수적 유권자조차도 촛불시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이제는 끝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다만 "솔직히"라는 단서를 달아 토로해야 할 정도로, 우상화된 '떼촛불'을 비판하는 것은 함부로 꺼내놓기 어려운 주장이었는데, 반기문 전 총장이 이들 '침묵하는 다수'의 심정을 후련하게 대변해줬다는 평이다.

    정치권 관계자는 "그간 산토끼~집토끼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쫓아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반기문 총장이 마침내 범보수의 대변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 관계자는 "최근 회동에서 손학규 대표로부터 '보수 세력에 얹혀서 정치하려 하지 말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오늘(31일) 발언으로 단호하게 선을 그은 셈"이라며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모호함과 불분명함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향후 정치 행보에 대한 기대감이 급작스럽게 높아지게 됐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