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향 분명치 않으면 추동력 상실 "바른정당과의 관계 분명히 해야"
  •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1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배우자 유순택 여사와 함께 환영의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1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면서 배우자 유순택 여사와 함께 환영의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설 명절 동안 대외 일정을 자제한 채 장고(長考)에 빠졌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연휴 이후 지지율 반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반기문, 설 연휴 칩거… 향후 정국 대책 숙고

    범(汎)보수 진영의 유력 대권주자인 반기문 전 총장은 설 연휴 첫날인 27일 지구대·소방서 격려 방문 일정을 마지막으로 28~30일 사흘간 대외 일정을 잡지 않았다.

    고향인 충북 음성을 28일 당일치기로 방문해 선영에 성묘한 뒤로는 계속해서 서울 사당동 자택과 마포 캠프를 오가며 정국 구상 및 핵심 관계자들과의 대책 회의를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마포 캠프 관계자들도 연휴 첫날과 설 당일인 27~28일만 부분적으로 쉰 채, 29일부터는 정상출근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책 회의의 의제는 주로 설 연휴 이후의 정치 행보 등 정무적인 사안에 집중된 것으로 알려졌다. 귀국 20일이 다 돼가는 시점이지만, 애당초 기대했던 귀국 '컨벤션 효과'를 통한 지지율 1위 등극은 무산됐다. 되레 야권 대표주자인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의 지지율 간극만 커지고 있다.

    연휴 전날인 26일 SBS에 출연해 "지지율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고 의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내색은 않더라도 초조감이 없을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반기문 전 총장이 설 연휴 이후 보다 확실한 정치 행보를 보여주면서 지지율 반등의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범보수의 희망' '문재인에 맞설 유일한 카드'라는 현재의 지위조차 위협받을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신당 창당하거나 국민의당 가라" 괴문서 '파장'

    이 와중에 정치 행보와 관련한 괴문서까지 보도·유포되면서 반기문 전 총장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한 종합편성채널에 보도된 괴문서는 반기문 전 총장의 향후 정치 행보를 △신당 창당 △국민의당 입당 △바른정당 입당 △무소속 국민후보 △빅텐트 정당 가담 등 다섯 갈래로 정리하면서, 이 중 신당 창당이 가장 바람직하고, 기성 정당에 입당한다면 국민의당이 고려 대상이라고 정리했다.

    근거로는 "바른정당과 새누리당 등 보수정당 지지율을 합쳐도 20% 안팎에 불과해, 보수 대표주자로는 대선에 필패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공략 대상으로 이념적으로는 중도층, 지역적으로는 호남, 세대로는 젊은 층을 제시했다. 이 때문에 신당을 창당할 경우, 창당을 이끌 인물로는 민주당 김종인 전 대표나 정의화 전 국회의장 등 중도적 인사를 천거했으며 야당 출신 전직 의원~충청권 현역 의원~바른정당 의원의 순서로 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당이 안 될 경우의 차선책인 기성 정당 입당 중 국민의당 입당을 먼저 고려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호남과 젊은 층이 중요하기 때문에, 국민의당에 입당해 충청과 호남을 결합하는 '뉴 DJP 연대'를 하는 것이 선거공학적으로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괴문서는 정국에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 측은 "(해당 문서는) 반기문 전 총장의 사무실에서 작성한 것이 아니다"며 "반 전 총장에게 보고된 적도 없는 문건"이라고 즉각 선을 그었다.

  •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16일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환영나온 어린이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16일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환영나온 어린이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천정배 '진보모리배' 괴문건 파동과 판박이

    이러한 괴문서의 등장과 여파는 지난 2015년 당시 무소속 천정배 의원의 '진보모리배' 괴문서 파동을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이다.

    천정배 의원은 2015년 4·29 광주 서을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문재인 전 대표가 공천한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를 '더블스코어' 이상의 압도적인 격차로 누르며 호남의 반문(반문재인) 정서를 입증해보였다.

    이후 천정배 의원의 정치 행보가 주목되던 시점, 외곽 조직인 '당산동팀'에서 작성한 문건이 이번 '반기문 승리의 길'이라는 괴문서를 보도한 곳과 같은 매체에서 전격 보도되며 정국에 일대 파장을 일으켰다.

    '천정배 신당 5단계 시나리오'라는 제목의 당시 괴문서는 "새정치연합을 '진보모리배' '교조진보'로 몰아붙이면서, 중도개혁 노선을 추구함으로써 이념적 중간 지대의 지지를 얻을 것"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천정배 의원은 "문건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고 문건을 보고받거나 내용을 구두로라도 보고받은 일이 없다"며 "합리적 개혁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도 내 생각과 다르다"고 즉각 부인했었다.

    이번 '반기문 승리의 길' 괴문서 파동과, 문건의 제목부터 방향, 그리고 당사자의 대응까지 판에 박은 듯이 똑같다. 결과적으로 이후 정국은 '천정배 신당 5단계 시나리오'라는 괴문서대로 진행되지 않았으며, 천정배 의원도 독자 신당 창당의 추동력을 끝까지 확보하지 못했다.

    천정배 의원 본인이 진보 이미지가 확고한데,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히는 것처럼 '중도향 우클릭'을 하라는 것은 정치인 본인이 둘 수 없는 무리수를 훈수했던 셈이다.

    오히려 본인에게 해가 됐던 문건이고, 천정배 의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새정치연합의 분당이 가속화되면서 몸값이 폭락하고, 결국 국민의당에 '1인 입당'이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통합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정당行 미루고 불분명한 성향 행보가 괴문서 불러

    '반기문 승리의 길' 괴문서 파동도 여러모로 '천정배 괴문건' 사태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게끔 한다는 지적이다.

    선거공학적으로 아무리 진보와 보수를 다 아우르려고 해도, 반기문 전 총장을 바라보는 정치권과 국민의 시선은 '범(汎)보수의 대표주자'로서의 이미지가 확고하다.

    새삼 '중도향 좌클릭'을 하려고 해도, 급진부터 중도진보까지에는 이미 이재명 성남시장·문재인 전 대표·안희정 충남도지사 등이 빼곡하게 자리한 채 정치적 영역을 남김없이 차지하고 있어서 반기문 전 총장이 치고들어갈 자리가 없다.

    범보수 대표주자의 자리마저 위협받는 마당에 중도에 자리잡고 호남과 젊은 층을 공략한다는 신당 창당 시나리오는 넌센스다.

    특히 이렇게 반기문 전 총장이 제5당을 창당하면, 국민의당 안철수 전 대표와 국민의당 유승민 의원은 각각 중도와 보수에서 대선을 독자적으로 완주할 것이 분명하다. 반기문 전 총장이 아우를 영역이 없는 것이다.

    ◆연휴 이후 행선지 또렷이 해야 지지율 반등 계기 마련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일고의 가능성도 없는 괴문서가 난무하면서, 대권주자의 이미지를 마치 '간보는' 것마냥 실추시키는 것일까.

    천정배 의원이 2015년 4·29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뒤 다음해 2월 국민의당과 통합할 때까지 10개월에 가까운 기간을 좌고우면만 하면서 보냈듯이, 반기문 전 총장의 정치적 행보가 뚜렷치 못해 행선지를 놓고 소모적인 '밀당'을 유발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반기문 전 총장 측에서 "무시해주기 바란다"고 해도, 반 전 총장의 정치적 행선지가 윤곽을 드러낼 때까지 제2, 제3의 괴문서 파동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반기문 전 총장은 얼마 전 측근들에게 "나는 역시 (성향은) 보수 쪽인 것 같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또 "어차피 당을 함께 할 것이라면 굳이 (별도 세력을 구축한 뒤 기성 정당과 통합하는) 2단계로 추진할 필요가 있느냐"고도 물었다고 전해진다.

    여권 관계자는 "대권주자에게는 '핵심 지지층'이 있어야 하는데, 반기문 전 총장은 아직 전통적인 보수층조차 핵심 지지 세력으로 다 끌어안지 못한 상황"이라며 "설 연휴 이후로는 바른정당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서, 먼저 본진(本陣)을 튼튼히 한 뒤에 외연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