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위 생각한다면, 헌법 71조 엄격하게 해석해야
  • ▲ 국회의사당 전경.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국회의사당 전경.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비선실세 국정농단 파문으로 초래된 국정 혼란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야당은 ‘대통령 퇴진’이란 구호를 당론으로 정했지만, ‘퇴진’의 의미가 즉각적인 자진 사임, 즉 하야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법정 절차에 따른 탄핵을 말하는 것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야당이 선택한 총리에게 대통령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넘기고 뒤로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것인지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야당이 통일된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성남 민심에만 기댄 체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사이, 청와대와 親朴은 “수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사퇴는 있을 수 없다”며, 국면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야당은 추미애 더민주 대표의 여야영수회담 제의 및 철회 과정에서 볼 수 있듯, 각 정파와 대선주자별로 찢어져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뿐, 합리적 해법은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당 역시 친박과 반박이 갈라선 채, 저마다 활로를 찾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혼란을 틈타 자신의 지지율을 올리려는 정치꾼은 있어도,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정치가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한국정치의 현실이다.

    미국 공화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승리로, 한미FTA 재협상 우려가 현실화되고, 차기 미국 정부가 무역장벽을 높일 것이란 어두운 전망이 나오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위기에 처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국정 혼란을 서둘러 수습하기 위한 해법 마련이 절실하다.

    상황이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각 정파별로 내놓는 대안도 제각각이다. 이 가운데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방안이 이른바 ‘대통령 권한대행’이다.

    이 방안은, 대통령이 야당 혹은 국회가 선택한 후보자를 총리로 임명한 뒤, 그에게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넘기고, 국정에서 완전히 손을 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일부 언론도 최근 사설을 통해 ‘대통령 권한 대행’을 가장 실효(實效)적인 해법으로 소개했다.

  • ▲ 박근혜 대통령에게, 헌법 71조에 근거한 '권한대행' 수용을 촉구한 조선일보의 사설. ⓒ 화면 캡처
    ▲ 박근혜 대통령에게, 헌법 71조에 근거한 '권한대행' 수용을 촉구한 조선일보의 사설. ⓒ 화면 캡처


    조선일보는 한발 더 나아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위한 법리적 근거도 친절하게 설명했다.

    조선일보는 15일, 朴대통령, 헌법 71조 '대통령 권한대행' 수용하길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현재의 혼란을 타개할 유일한 해법은 ‘대통령의 2선 후퇴와 권한대행 임명 뿐’이라고 했다.

    신문은 “성난 시민이 거리로 나오기 전 ‘2선 후퇴’를 선언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신문은 “현재 다수의 헌법학자는 박 대통령의 이 상황이 헌법 71조상의 '사고'에 해당한다고 해석하고 있다”며, 대통령 2선 후퇴와 권한대행 임명은 헌법에도 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가 그 근거로 내세운 것은 헌법 71조다.

    신문은 ‘대통령 권한대행’의 전제조건인 ‘대통령의 궐위 또는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를, 적극적으로 해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신문은 위 내용 중 ‘사고’의 의미를 넓게 해석해, 현재 박근혜 대통령이 처한 상황을 ‘사고’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 중앙일보도 “위기 극복의 첫걸음은 박 대통령 스스로 2선 후퇴와 국정 이양 의사를 명확해 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사설을 게재했다.

    속칭 진보언론들은 조선-중앙일보의 사설을 인용하면서, ‘대통령 2선 후퇴 및 권한대행 임명’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과 조선·중앙일보는 ‘대통령 2선 후퇴 및 권한대행 임명’이 ‘反헌법적’이란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87년 헌법이 대한민국의 정체(政體)로 정한 대통령 단임제 아래서 총리의 역할과 기능은,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헌법이 총리에게 부여한 권리를 봐도 알 수 있다.

    현행 헌법이 총리에게 허락한 권한은 대통령이 서명한 문서에 대한 부서(副署)권, 국무위원 및 각료 임명 제청권, 국무위원 해임 건의권이다(헌법 82, 86, 87, 94조).

    야당이 강조하는 총리의 ‘행정부 통할권’은, ‘대통령의 명’을 전제로 한 제한적 권리에 불과하다(헌법 86조2항).

    다만, 총리는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예외적으로 그 권한을 대행할 수 있다(헌법 71조).

    대통령 권한대행은 궐위, 즉 대통령의 직이 비었거나, 사고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에 한한다. 따라서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총리에게 그 권한을 넘기는 일은 그 자체가 헌법 위반이다.

  • ▲ 12일 오후, 서울광장 등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 뉴데일리DB
    ▲ 12일 오후, 서울광장 등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 뉴데일리DB
     
  • ▲ 12일 오후, 서울광장 등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촛불집회. ⓒ 뉴데일리DB
    ▲ 12일 오후, 서울광장 등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촛불집회. ⓒ 뉴데일리DB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수십만명의 시민이 광장에 모여 그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에 놓였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만약 야당 정치인과 조선일보의 주장처럼, ‘대통령 권한대행’의 전제요건인 ‘사고’의 범위를 넓게 해석한다면, 이로 인한 혼란은 막을 방법이 없다.

    복수정당제가 허용된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권 여당이나 정부, 혹은 대통령이 정국 주도권을 잃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현재와 같은 5년 단임의 대통령제는 이런 위험을 더욱 높이고 있다. 짧은 임기 안에 후세에 길이 남을 성과를 내려는 대통령의 과욕과, 5년 안에 그 동안의 희생을 보상받으려는 측근들의 욕망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이런 때마다 대통령이 2선으로 후퇴하고, 권한대행을 임명할 수는 없다.

    만약 헌법 71조의 ‘사고’를 넓게 해석해 ‘대통령 권한대행’의 요건을 완화한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에 아주 나쁜 선례가 된다.

    국가와 국민보다는 당리와 당략을 먼저 생각하는 여의도 정치의 후진적 행태를 고려한다면, 야당은 이번의 예를 들어 틈만 나면, 대통령에게 2선 후퇴와 권한대행 임명을 요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론적으로 헌법 71조를 근거로 한 ‘대통령 2선 후퇴’는 근거가 전혀 없는 위헌적 발상이며, 이에 터 잡은 ‘대통령 권한대행’ 역시 反헌법적이다.

    현재 상황을 헌법 71조의 ‘사고’로 봐야 한다는 주장에, 다수의 헌법학자가 동의하고 있다는 조선일보의 주장은 매우 위험하다. 조선일보 사설과 같은 주장은, ‘소수의견’일 수는 있어도 다수설은 아니다.

    우리 헌법은, 이번처럼 국정이 극심한 혼란에 빠진 경우에 대비한 수습책을 갖고 있다. 헌법 65조가 그것이다.

  • ▲ 12일 오후 청계천 모전교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규탄집회에 참석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 뉴데일리DB
    ▲ 12일 오후 청계천 모전교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규탄집회에 참석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 뉴데일리DB


    대통령이 직무를 집행함에 있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했다면, 이는 명백한 탄핵사유가 된다.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조사와 이어질 특검 수사에서 대통령이 위법행위를 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국회는 이를 근거로 탄핵을 추진하면 된다.

    야당과 차기 대권을 노리는 정치인들이 의지할 곳은 광장의 촛불이 아니라, 헌법전이다.

    헌법이 정한 기준과 절차를 무시하고, 국민들의 분노에만 기대 정권을 차지하려고 한다면, 청와대를 향하고 있는 분노의 촛불이 여의도로 방향을 돌릴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