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를 잊어버린 통일박람회, 이승만과 김일성

  •    한 슬 기(1989년생)
       광주대학교 청소년상담평생교육학과 졸업
       거룩한대한민국네트워크 회원
       (사) 대한민국 건국회 청년단 회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꿈에서의 소원 역시 다르지 않다.
    안전한 대한(大韓)은 아이들을 핵과 대량살상무기 그리고 전쟁으로부터 보호할 것이다.
    꿈의 대한은 절망의 숲을 거니는 청년에게 ‘이상’의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하나 된 대한은 가족이 보고픈 어르신들의 지난 70년의 눈물을 닦아낼 것이다.
    그 소원을 이루고자 국가의 리더는 ‘통일대박’을 외쳤으며, 
    그 마음들은 아름다이 자라나, ‘2016 통일박람회’를 수놓았다. 
    「남북 음식 한마당」에서는 배고픈 이들이 음식으로 통일을 나눌 수 있었고,
    「통일 상상 놀이터」에서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체험활동으로 통일을 경험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통일을 거듭 상기시켜주었다.
  • 그러나 하나를 안타까이 생각했다.
    비어져버린 시간을 발견한 탓이다.
    통일한국의 청사진은 미래를 그려냈고 남북한의 음식은 현재를 품었지만,
    ‘과거’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전체주의의 미래를 경고한 <1984년>의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말했다.
    “과거를 지배하면 미래를 지배하고, 미래를 지배하면 현재를 지배한다.”
    과거를 조작하니 미래가 조종당했다. 
    미래가 정해지니 현재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다.  
    현재가 중요하다. 미래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이 둘은 과거를 빼놓고선 온전할 수 없다.
    통일의 현재를 논하고, 미래를 꿈꾸지만 그것을 결정하는 ‘과거’는 말하지 않았다.
    통일은 남과 북의 국토와 겨레를 하나로 묶는 것이다.
    하나로 만드는 것이 숙제라면 둘이 된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고, 이것이 과거다.
    둘이 된 한반도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다.
    이를 만든 ‘리더, 이승만-김일성’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켜야, 사태가 파악된다.
     권혁철 외 6인이 쓴 <이승만 깨기>는 세간의 의문에 답한다. 

     하나. 이승만은 항일투쟁을 했는가?
    이승만의 스펙은 이러하다. 조지워싱턴-하버드-프린스턴의 '국제법 박사' 
    이 정도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교수자리는 어렵지 않다. 더욱이 1900년대 초반이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그 시절. 그의 인생은 갈림길 앞에 놓여있다. 
    미국 유수대학의 교수냐, 망국(亡國)의 독립운동가냐. 
    그는 나라 없는 안락한 삶을 거부했다. 무던히도 거친 독립의 길을 주저 없이 걸어갔다.
       
     둘. 이승만은 한반도 분단의 원흉인가?
    1948년 6월 ‘정읍발언’이 분단의 시작인가. 
    1900년대 초반. 세계는 공산주의의 파도로 출렁거렸다. 
    공산의 쓰나미는 북한을 집어삼키고, 남한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붉은 물결이 자유(自由)를 덮치지 못하도록, 한반도의 허리에 방파제 건설이 시급했다.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자유의 방파제’였다.
    2016년. 애석하게도, 북녘동포가 누리지 못하는 ‘자유’가 방파제의 위대함을 변증하고 있다.
    다른 각도에서 살펴본다.
    1945년 9월. 소련 스탈린의 비밀지령문이 북한을 설계하기 시작한다.
    설계도의 밑그림은 ‘소련의 이익을 영구히 지키기’ 위한 정부이다.
    1946년 2월. 김일성은 소련의 꼭두각시 정부의 주춧돌을 놓기 시작한다. 이름은 분명 ‘북조선임시인민회’였으나, 토지를 개혁하고 법을 만들었다. ‘임시’는 가면에 불과했다. 
    이북의 공산정권은 완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남한에 이를 아는 이 없었다.
    1948년 6월에나마 남쪽에 정부를 세우자 한, 정읍의 외침은 이승만의 뛰어난 혜안(慧眼)이었다.
     셋. 이승만은 친일청산은커녕 친일파를 비호했다. 친일청산은 북한이 더 낫다?
    남한은 친일파 처벌을 위해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만들었고, 
    이들의 ‘선거권-피선거권’을 박탈했다.(1948년 9월 22일 공포)
    반면 북한은 공산당원이 되겠다면 이유 불문 등용시켰고, 
    목소리 큰사람이 이기는 인민재판 역시 서슴지 않았다. 
    법을 만들고, 사람을 골라 등용한 남한의 친일청산이 북한의 것보다 못한 것인가.
     넷.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이 제일 먼저 도망갔다?
    6.25전쟁의 이승만을 임진왜란 때 청(靑)으로 도망간 선조에 빗댄다. 
    선조는 왜(倭)가 쳐들어오자 식솔들과 함께 의주로 날랐다. 그 뿐이었다. 
    반면 이승만은 인민군의 야크기가 서울 상공에 날아다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방공호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대신 ‘국가목표를 위한 전쟁목표 4원칙 설정-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지원요청-미국의 장면 대사에게 트루먼대통령 보고요청’을 하며 전쟁에 맞섰다.
       
     다섯. 미국의 앞잡이 이승만?
    소련은 김일성에게 장군의 감투를 씌어주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독립에 미친 늙은이’로 불렀다. 심지어 이승만을 제거하려, 
    1953년 에버레디(Ever Ready Project)작전까지 계획했다.
    '앞잡이론'은 북쪽에 더 어울리지 않나.
     여섯. 부정선거로 당선된 이승만?
    가위 가는 대로 헌법을 재단한 사사오입, 
    비밀투표 대신 사전투표-대리투표-3인 투표의 총체적 부정선거 3.15
    최종 책임자는 이승만 대통령이었으나, 최대의 수혜자는 자유당이었다.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6.25때 나라를 지켜내며, 미국의 원조로 국민을 먹여 살린 
    이승만은 명실상부한 국부(國父)였다. 
    문제는 국부의 그늘이었다. 자유당은 국부의 이름으로 부(㷆)를 축적해나갔다.
    부패의 뚜껑은 열리지도 깨져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연로한 대통령의 눈을 가리기로 마음먹는다.
    사사오입과 3.15부정선거는 이를 위함이었다.       
     일곱. 독재자 이승만?
    1960년 4월 25일 국민은 외쳤다. “이승만 하야하라.”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야지.” 이승만은 국민이 물러나라고 물러나버리는 독재자였다.
    벤 알리(Zine El-Abidine Ben Ali)정권은 튀니지를 23년 동안 독재한다. 
    튀니지의 민주화 바람, 재스민혁명이 꽃을 피우기까지
    수천-수만 명의 젊은 피는 땅에 뿌려져야만 했다. 진짜 독재자는 그러하다. 
       
    이어 북한이다. 아시아투데이 최영재 기자의 <김일성 바로알기>를 펼쳐본다.
     하나. 민족의 태양 김일성 수령?
    1937년 6월 보천보에서 김일성은 일본 군경을 전멸시키고 민족의 태양이 된다.
    그러나 당시의 보천보는 인구1,300여 명의 작은 마을에 일본 순사는 5명뿐이었다.
    일제의 함흥 지방법원 형사부 재판기록은 보천보전투를 대단한 항일무장투쟁이 아니라,
    단지 물자 보급 투쟁이라 말한다. 그들은 친일세력을 가려 처벌하기보다,
    약탈에 반항하면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고 방화했다. 
    같은 편 중국공산당의 평가는 냉혹하리만큼 정확하다. “비적과 반혁명집단.”
     
     둘. 자수성가형 민족영웅 김일성 수령?
    영웅의 이름 앞에 굳이 자수성가를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가항력적인 환경을 이겨낸 사람만이 자연스레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닌가. 
    영웅은 원래 자수성가한다. 단, 만들어지지 않았을 경우에 말이다.
    소련의 붉은 군대가 북한에서 일본을 격퇴시킨다. 그들은 스탈린의 통치를 이행하기 위해 평양 땅을 밟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소련의 이익보다 조선의 이익을 더 크게 생각하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때문이다. 이들을 대신할 소련의 충신에 김일성이 발탁되었다. 소련군88여단으로 소속된 5년 동안의 경력은 그가 스탈린의 대리인이 되기에 무엇보다 적합했다.
     셋. 항일투사 김일성 장군?
    스탈린의 대리자 김일성은 본인이 북한에서의 스탈린이 되고자 했다.
    마스터키는 ‘항일운동의 정통성’이다.
    그는 동맹과 배신을 거듭하며 항일운동가의 목을 베어나갔다.
    박헌영을 ‘제국주의 미국의 스파이’로, 박금철과 이효순을 ‘제국주의 일본의 간첩’으로.
    그는 항일투사가 아니었다. 항일투사킬러였다.
    넷. 보천보 전투의 사단장이 김일성 주석이다?
    보천보사건의 수사 책임자였던 이치하라 경부, 동북항일연군 제6사장 김일성 사살 현장에 있었던 만주군 장교 야기하루오, 보천보 사건의 길잡이 박금철은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 사건의 대장 김일성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소련군정과 미군정 역시 김일성(본명:김성주金聖柱)을 가짜라고 보았다. 
    진짜 김일성(본명:김성주金成柱), 동북항일연군 제6사 사단장은 만주군과 접전 끝에 사망한다. (1937.11.18 경성일보 보도)
    과거는 달랐다.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듯 김일성은 민족의 영웅이 아니었다.
    조작된 과거는 왜곡된 미래를 그려냈고 오류투성이 현재를 생산해냈다.
    통일의 과거를 되짚어보아야 함이 이 때문이다.
     처칠의 말처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돌리자 시계태엽을! 째깍 째깍 째깍.”
    과거를 잊어버린 통일박람회에겐 통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