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의 젊은이들아, 부정적 사고(思考)에서 벗어나라!

    -‘헬 朝鮮’이 아닌 ‘헤븐 大韓’을 말하라- 

    최 응 표 /뉴데일리 고문 (뉴욕에서)

    조국을 디스토피아(Dystopia=암울하고,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는 세계)에 빗대 ‘헬 朝鮮’이라 부르며 탈출을 꿈꾸는 젊은이들(패배자들)에게 사무엘 울만은 詩 ‘청춘’을 통해 ‘헬 조선’에서 ‘헤븐 大韓’으로 건너갈 다리를 놓는 방법‘ 다시 말해 젊은이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에 대한 귀중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무엘 울만은 열정과 자신감을 잃는 순간 젊은이들의 기백(氣魄)은 죽고 마음은 시든다며, 영감(靈感)이 끊기고 정신이 희미해지고, 비탄이란 얼음(氷)에 갇힌 사람은 스무 살이라도 늙은이가 되지만,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파도(波濤)를 타는 한 여든 살이라도 늘 푸른 청춘이라고 말한다. 젊은이들의 특권인 신선함과 이상(理想) 그리고 열정과 기백과 용기를 잃으면 디스토피아로 추락한다는 뜻이다. 

    부정적 사고에 젖어 ‘헬 조선’에 매몰돼있는 젊은이들에게는 ‘꼰대의 말로 들릴지 모르나, ‘헬 조선’이라는 ‘죽음의 언어’는 한마디로 분에 넘치는 자유와 갑자기 주어진 풍요, 다시 말해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가난(조갑제 선생의 표현)의 충돌이 빚어낸 버려야할 유산이다.

    ‘헬 조선’을 되뇌며 자신을 괴롭히고 사회를 원망하며 국가를 미워하는 우리 젊은이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며 사무엘 울만의 詩 ‘청춘’을 생각해 보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역경을 이겨내는 강인한 의지, 미래를 설계할 긍정적 상상력, 세상을 한 몸에 끌어안을 수 있는 불타는 열정을 잃어버린 조국의 젊은이들이 안쓰러워 인생 선배로써 무언가를 들려주고 싶어서다. 

    우선 대한민국의 젊은이라면 기적의 시대, 감동의 시대, 감사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는 말부터 전하고 싶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헬 조선’이란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며 탈출만을 꿈꾸는 패배자들이 발붙일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금 수저’ ‘흙 수저’라는 계급 투쟁적(공산주의, 사회주의적) 신조어(新造語)가 유행병처럼 번지면서 ‘헬 조선’이라는 부정적 사고가 젊은이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일까?

    젊은이들에게는 무척 곤혹스럽게 들릴지 모르나, 우리역사의 고난의 짐은 지고 싶지 않고 축복의 열매만 차지하겠다는 이기심과 헝그리 정신(극기정신)의 실종과 공짜의식의 만연이 그 원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축복의 열매만 차지하겠다면 고난의 짐은 누가 지고 가나. 

    그리고 더욱 염려스러운 것은 ‘금 수저’ ‘은 수저’ ‘흙 수저’의 계급론이 자칫 공산혁명의 화두였던 계급투쟁론으로 변질돼 진짜로 디스토피아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40년 넘게 외국에 살고 있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젊은 감정에 휩쓸린 빗나간 생각과 잘못된 분노로 국가와 사회에 죄짓는 일만은 업게 해달라고 비는 마음, 이것이 80인생을 살아온 인생 선배로써 조국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간절한 기도다.

    故 조지훈 교수는 1962년 한국의 지식세계를 대변하던 ‘사상계(思想界)’ 12월 호에 ‘당신들만이 더 불행한 것은 아니다’라는 글로 국민소득 70불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아픔을 위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과연 국민소득 2만 불, 3만 불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도 70불 시대의 젊은이들처럼 위로의 대상이 되는지, 심정적으로 선뜩 동의할 수가 없다. 물론 70불 시대의 행복지수와 2만 불, 3만 불 시대의 행복지수가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는 저주를 받는다‘고 한 미국의 정체성과 새로운 미국문화를 주창한 조지 산타야나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태어나면서부터 행운을 업고 태어나 남보다 앞서 가는 자(금 수저)는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극소수의 경우만을 의식하며 자신을 괴롭히고 사회를 원망하기 보다는 그 불평등과 모순을 꿈과 열정과 의지와 기개로 뛰어넘는 것, 또한 젊은이들에게 만 주어진 특권이 아닌가.

    “길이 없으면 나 스스로 길을 만들겠다”는 프론티어 정신으로 세상 을 내 것으로 만든 철도의 아버지 조지 스티븐슨은 ‘끈기’와 ‘의지’가 성공의 바탕이 되었다고 했다.

    눈이 내린 후 눈이 녹기를 기다리면 패자(敗者)가 된다. 눈을 밟아 길을 만드는 자가 승자(勝者)가 되는 법이다.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승자가 된 스티븐슨의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와 하면 된다는 의지와 도전정신으로 ‘헬 朝鮮’이 아닌 ‘헤븐 大韓’을 말하라. 성공한 인류의 역사는 그런 도전정신의 산물이다. 

    ‘미국인(美國人)의 저자 가토 히데도시(加藤秀俊)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면에서 불평등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물론 근면과 노력에 행운이 더해진 덕분에 남보다 월등하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 성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사이에는 명백한 낙차(落差)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은 그 낙차가 처음부터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출발점에서는 전적으로 같은 조건이었던 것이 그 뒤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의해 낙차는 벌어지는 것, 미국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기본적인 확신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젊은이들의 특권과 의무는 선배세대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달리기 경주에서 선수들은 같은 스타트 라인에서 출발한다. 결과에 따라 순위가 결정된다. 1등에서 3등까지는 상(賞)이 주어지지만, 그 밖의 선수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출발점은 같은 조건이었다. 달리기에 소질 있고 힘 있는 선수는 승리하고 그렇지 못한 선수는 패배했다. 그것뿐이다.”고 말하며, “이럴 때, 등수에 들지 못한 선수들이 누구를 원망할 수 있는가. 네가 1등하는 바람에 내가 상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저자는 인생에 있어서도 원리는 이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결과로 우열(愚劣)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본인의 능력과 의지가 성패를 결정 짖는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일류대학, 일류기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대학과 기업을 원망할 수 있는가? 입학시험과 입사시험에서는 응시자 누구에게나 똑같은 조건이 주어진다. 

    합격자와 불합격자의 차이는 순전히 본인의 능력과 실력에 달렸다. 일류대학, 일류기업 합격자 전부가 특권을 가진 자(금 수저)는 아니지 않는가. 빌 게이츠는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본인의 책임”이라고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행운을 업고 태어나 앞서가는 소수만을 의식하며 ‘헬 조선’이라는 ‘죽음의 언어’의 노예(패배한 인생)로 살기보다는 자기 눈높이에서 정직하게 살며 행복해질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 이 또한 젊은이들의 책임이 아닌가.

    ‘헬 조선’이라는 ‘죽음의 언어’에 정신이 빼앗기면, 자칫 “혁명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서는 용어를 혼란시켜야 한다”는 레닌의 공산혁명전술에 말려들 위험이 크다. 우리 모도가 경계해야 한다.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라고 한 간디의 삶의 교훈을 기억하면 ‘헬 조선’에 짓눌린 마음의 무계는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2012년 10월 2일, 중앙일보 뉴욕판에 영국 이코노미스트 특파원 다니엘 튜더의 저서 ‘한국, 불가능의 나라 (Korea, The Impossible Country)에 대한 소개 글이 실렸다.

    저자는 책 제목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두 가지다. 먼저 불가능한 기적을 이뤄낸 나라라는 뜻이고, 두 번째는 지금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성공에 대한 높은 기준을 달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불가능한 목표’에 시달리는 강남아이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조명하고 싶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한국의 실상이다.

    대한민국의 고난의 역사를 직접 보고, 몸으로 겪은 직접 경험자로써 오늘의 우리 젊은이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가난과의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풍요와의 싸움에서는 지고 있다”는 조갑제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1960년대 초 서독광부 500명 모집에 4만 6천명이 응시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 때 선배들은 그렇게 가난하고 힘든 시대를 살았다. 지원자 중 상당수는 4년제 정규대학 출신으로 한국사회의 중추(中樞)를 이루던 그룹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헬 조선’이란 부정적 사고에 젖어 국가와 사회에 대해 원망도 분노도 하지 않았다. 국민소득 70불 시대를 사는 그들에게 왜 불평, 불만, 원망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들에게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없는 것, 다시 말해 자기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지혜가 있었다. 이 점이 달랐다. 대한민국 성공의 역사는 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지혜’에서 시작됐다.

    일류병에서 벗어나라. 선배세대로부터 자기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는 지혜를 배워라. 그러면 지금 젊은이들의 정신을 혼탁케 하는 불만, 불평, 미움이 배부른 투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헬 朝鮮’의 부정적 사고가 ‘헤븐 大韓’의 긍정적 사고로 바뀌고, 축복의 열매만이 아니라 우리역사의 고난의 짐도 같이 져야겠다는 긍정적 역사의식이 생겨날 것이다. 

    선배세대들이 일류병에 걸려 ‘헬 조선’이라는 부정적 사고에만 빠져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에게 일류란 역겨운 사치였다. 그래서 찬란한 성공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 

    나라밖에 나와 대한민국을 바라보라. ‘죽음의 언어’의 노예가 된 젊은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모습의 대한민국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진짜 ‘헬 조선’을 살다 탈출한 탈북자들에게 물어보라. 대한민국이 지옥인가, 천국인가? 그러면 ‘헤븐 대한’을 말하게 될 것이다. 

    사무엘 울만이 말하는 젊은이들의 특권을 지렛대 삼아 선배세대를 뛰어넘어라. 그러면 ‘헤븐 대한’의 미래가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