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시대의 가장 자랑스러운 말, ‘나는 大韓民國 國民이다’

     최 응 표 /뉴데일리 고문 (뉴욕에서)
      
     2천 년 전의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이다’란 말이었고,
    20세기에는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가 가장 자랑스러운 말이었다면
    21세기에는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란 말이 가장 자랑스러운 말이 돼야 되지 않겠는가.
     
     2차 대전 후, 140여개의 독립국가 중 당당하게 성공의 역사를 쓸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밖에 없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그런데 이런 위대한 역사를 왜 걸레로 만들지 못해 안달들인가.
     
     1963년 6월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라고 외친 케네디 대통령의 자유와 평화의 상징인
    이 한마디는 ‘통한의 벽(베를린 장벽)’에 갇혀 죽음의 공포에 떨던 서베를린 시민들에게
    희망으로 다가갔다.
     
     그런가 하면 “오늘의 불안과 위험을 넘어 내일의 희망을 바라봅시다.---베를린 장벽 저 너머의 정의로운 평화의 날, 너와 나를 넘어서서 인류를 생각 합시다”라는 케네디 대통령의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 또한 세계인의 눈을 베를린 비극의 현장으로 향하게 했다.
     
     이어서 1987년 6월, 레이건 대통령은 베를린 비극의 상징인 브란덴브르크 문 앞에서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향해 “당신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소련과 동유럽의 번영을
    원한다면, 그리고 자유화를 원한다면 이리로 와서 이 문을 여시오,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금세기 최고의 연설을 했다.
     
     그로부터 2년 5개월이 지난 1989년 11월 9일 ‘통한의 벽’은 무너졌고,
    26년 전 서 베를린 시민을 향해 “오늘의 불안과 위험을 넘어 내일의 희망을 바라봅시다”라는
    케네디 대통령의 희망의 메시지 그대로 통독의 길이 열리는 역사적 대사건이 일어났다.
     
     1월 13일,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문을 읽으면서
    왜 케네디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이 回想(회상)되는 것일까.
     
     고르바초프가 1989년의 東獨(동독)상황을 ‘뚜껑이 꼭 닫힌 채 과열된 보일러’에 비유한 것처럼, 우리의 현실이 바로 그 때의 동독 같다는 위기의식이 20세기의 상징인 두 대통령을 불러 낸 것 아닌가 싶다.
     
     어쩌면 그것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惡의 帝國’ 소련을 붕괴시킨 힘의 원천이 협상과 대화라는 구걸평화전략에 있었던 게 아니라 힘에 의한 평화전략에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라는 준엄한 ‘역사의 훈계’인지도 모른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선언’ 후, 북한의 핵억제를 위해 대화는 숫하게 이어졌고,
    한국과 국제사회는 북한이 달라는 대로 퍼 주었고, 도 넘은 깡패 짓도 同胞愛(동포애)와 인도주의라는 이름으로 감싸왔지만 얻은 것이 무엇인가.
     
     4차 핵실험으로 대한민국의 심장을 짓누르며 국제사회를 협박하는 국제깡패의 고약한 버릇을
    바로 잡기 위해,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단칼에 극복한 케네디 대통령의 지혜와
    ‘惡의 帝國’ 소련을 무너뜨린 레이건 대통령의 대소전략을 신중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 핵 위기 대처방안으로 ‘쿠바 해양 봉쇄 령’을 내리지 않고
    대화를 통한 평화전략을 취했어도 ‘쿠바의 핵 위기’가 그처럼 말끔하게 해결되었을까.
     
     소련의 경제파탄을 꿰뚫어본 레이건 대통령이 ‘무기경쟁’ 선언으로 소련을 경제적으로 압박하지 안했다면 소련이 그처럼 맥없이 무너졌을 까. 우리가 여기서 ‘역사적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시대의 가장 자랑스러운 말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가 ‘상식’이 되는 영광의(위대한)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인류의 역사는 유약한 협상이나 저자세 대화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력한 ‘힘의 논리’에 의해 진화하면서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워왔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역사를 경험해 왔다.
     
     북한이 4차 핵실험까지 감행한 국가존망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대화’와 ‘평화적 해결’만을
    고집하는 反국가세력에게 묻는다.
     
     ‘화해를 구하는 것은 力量(역량)을 비축하기 위한 수단이며, 평화는 전쟁준비를 위한
    일종의 휴식방법’이라는 레닌의 ‘協商詐欺術(협상사기술)’을 아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13일 대국민담화에서 두 얼굴의 중국을 향해 어렵고 힘들 때 손을 잡아주는 것이 최상의 파트너라는 말의 깊은 의미, 정치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정치권은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는 힐책 성 경고, 월남이 패망할 때 지식인들은 귀를 막고 있었고, 국민들은 현실정치에 무관심했다는 박 대통령의 날선 비판 등에 대한 국민적 차원의 고민이 없다면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가 걸레 되고, ‘나는 대한민극 국민이다’란 말이 가장 자랑스러운 말이
    아니라 ‘가장 수치스러운 말’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성숙한 국민이라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감안해서 우리의 안보와 국익에 따라
    사드 배치문제를 결정하고, 핵보유문제는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위반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다는 국가원수로서의 고민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성공한 대한민국의 위대한 역사가 ‘걸레’ 되는 불행을 막고,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가 우리시대 가장 자랑스러운 말이 되는 영광의 순간을 위해서는 국민의 결의는 대통령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드 배치와 핵보유는 중국에 치명적이다. 和平崛起(화평굴기)란 사기극을 벌이며 원조교제(북한을 상대로) 재미에 빠져 덩칫값을 못하는 중국(되놈)에 우리가 들이댈 수 있는 카드는 사드 배치와 핵보유라는 비대칭 무기 아닌가.
     
     1953년, 6. 25전쟁의 당사국인 한국을 무시하고 휴전협정을 체결하려는 미국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과 ‘반공포로석방’이라는 극약처방을 들이대
    한미방위조약과 전후복구원조와 한국군현대화를 이끌어낸 이승만 대통령의 고도의 정치기술에서 타개책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박 대통령이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방위공약을 힘주어 언급한 것은 중국과 북한에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한미연합 방위력 강화를 통해 북한의 고약한 버릇을 고치겠다는 북한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로 들린다.
     
     지금은 안팎으로 국가적 위기가 옥죄어오는 상황, 박 대통령의 성공(국가의 미래)을 위해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이지 분열할 때가 아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시대정신에서 길을 찾으면
    미래가 보인다는 말이다.
     
     함석헌 옹은 1958년 사상계 8월호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에서 “역사적 사건이 깨달음으로 되는 순간 그것은 지혜가 되고 힘이 된다”고 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온 역사적 사건들을 올바로 깨닫는 순간 모든 악재는 호재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중국의 시진핑은 레이건 대통령의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에 응답해 베를린장벽을
    허문 고르바초프 같은 신사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 이승만의 정치기술을 바탕으로 對中, 對北전략의 패러다임을 새로 짜야할 때다.
     
     이승만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국제사회가 용납하리라는
    판단 하에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극약처방을 꺼내든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실질적으로 중국 압박용으로 사드배치와 핵보유라는 비상카드와 북한의 40배, 50배 경제력의 무기화라는 극약처방을 범국민차원에서 주장하고 나서야 한다.
    이승만은 그렇게 해서 위대한 대한민국 성공의 길을 열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가 우리시대 가장 자랑스러운 말이 되는 영광의 시대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의 깊은 뜻을 헤아려 스스로 행동하는 성숙된 국민에겐
    위대한 역사의 새章이 열릴 것, 항상 바른 길을 가려는 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