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경쟁이 낯선 정치권 풍토, 바로잡는 것부터 '새정치' 시작해야
  • ▲ 국민의당 유성엽 당헌기초위원장이 18일 확대기획조정회의에서 공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국민의당 유성엽 당헌기초위원장이 18일 확대기획조정회의에서 공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본지 〈뉴데일리〉는 그간 몇 차례에 걸쳐 국민의당 공천 제도에 이 당에 합류한 유성엽 의원(재선·전북 정읍)의 평소 지론인 숙의(熟議)선거인단 제도가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해 12월 28일에는 더불어민주당에서 △대의원 경선 △권리당원 현장투표 △여론조사 컷오프 △공론조사 선거인단 등 온갖 경선 방식을 다 겪어보고, 그 경험을 바탕삼아 〈공천 혁신 방안에 대한 연구〉라는 소책자를 펴낼 정도로 공천 제도에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있는 유성엽 의원이 국민의당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당시 유성엽 의원도 본지와 통화에서 "당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공천"이라며 "공정·투명·합리·민주적으로 공천이 이뤄지게끔 문제의식과 고민의 결과를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의욕을 드러냈었다.

    그리고 지난 13일 유성엽 의원은 당헌기초위원장으로 인선됐다. 정치권에서는 유성엽 의원이 국민의당 안철수 인재영입위원장에게 숙의선거인단 제도를 포함해서 평소 자신이 공천 제도에 관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풀어낼 기회를 얻었고, 이 과정에서 안철수 위원장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4·13 총선을 신당 진영에서 준비하고 있는 몇몇 예비후보자 및 그 관계자들로부터 문의 전화가 잇따랐다. "사실이냐" "숙의선거인단 제도가 도대체 뭐냐" "책자를 가지고 있느냐" 등의 질문이었다. 몇몇 관계자는 숙의선거인단 제도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고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관계자에게는 "만약 숙의선거인단 제도가 시행된다면 마땅히 대비할 방법이 없다"고 답했지만, 예비후보 본인이 연락해 온 경우에는 "숙의선거인단 제도가 기존의 여론조사 선거인단 경선과 다른 점은 정견발표와 토론 등 선거인단의 숙의(熟議) 절차가 존재한다는 점"이라며 "만일 채택된다면 지역 현안과 쟁점을 정견발표와 토론에서 충분히 녹여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좋겠다"라는 정도로 말했다.

    팁(Tip)이라고 할 수도 없는, 후보자로서는 당연히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다. 지역 현안과 쟁점을 제대로 토론하지 못하는 후보자라면 후보 자격 결격이고, 그런 후보를 제대로 걸러내는 것이야말로 경선 제도의 본래 취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비 방법'이 없어 답답해하는 예비후보 캠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정치권이 '공정한 경쟁'과 '깨끗한 승복'이라는 것에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새삼 실감했다.

  • ▲ 공정성이 의심되는 경선과 이에 따라 승복할 수 없게 되는 문화는 우리 정치권의 오랜 적폐였다. 사진은 지난해 4·29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에서의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경선 현장의 모습. 권리당원 50%·여론조사 50% 방식으로 경선이 실시됐으나,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실시된 두 여론조사의 지지율 격차가 ±15%p에 달하면서 경선 부정 의혹이 불거졌고, 김희철 전 의원(사진 오른쪽)이 결과에 진심으로 승복하지 못하면서 새정치연합 정태호 후보도 결국 선거에서 패했다.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공정성이 의심되는 경선과 이에 따라 승복할 수 없게 되는 문화는 우리 정치권의 오랜 적폐였다. 사진은 지난해 4·29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에서의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경선 현장의 모습. 권리당원 50%·여론조사 50% 방식으로 경선이 실시됐으나, 같은 날 같은 지역에서 실시된 두 여론조사의 지지율 격차가 ±15%p에 달하면서 경선 부정 의혹이 불거졌고, 김희철 전 의원(사진 오른쪽)이 결과에 진심으로 승복하지 못하면서 새정치연합 정태호 후보도 결국 선거에서 패했다.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이 제도를 고안한 유성엽 의원 본인도 토로했다. 2006년 실시된 권리당원 현장투표 제도는 당비대납이든 조직동원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권리당원을 최대한 많이 사전에 모집한 상황에서 경선에 돌입하는 게 절대 유리했다. '대비 방법'은 '권리당원 사전모집'이었고, 한 명도 권리당원을 모집하지 않은 상황에서 경선에 들어갔던 유성엽 의원은 참패했다.

    2014년에는 공론조사 선거인단 방식이 도입됐다. 이 때는 최대한 많은 지지자들에게 유선전화를 휴대전화로 착신전환하도록 지시해, 유선으로 걸려오는 선거인단 모집전화를 받을 수 있게끔 함으로써 선거인단에 '자기 사람'을 밀어넣는 게 필승의 비결이었다. '대비 방법'은 '지지자 조직화 후 착신전환'이었고, 이런 비결을 몰랐던 유성엽 의원은 또 졌다.

    이처럼 십수 년간 실시된 모든 경선 방식에는 반드시 '필승의 비법'이 존재했고, 그 방법을 사전에 알아내 '대비'하고 '준비'하는 자가 승리했다. 문제는 그 방법이 △지역민과 동고동락 △지역 맞춤형 공약 제시 △새로운 정책 발굴 △지역 현안 공부 등 긍정적인 방법이 아니라 ▲권리당원 당비 대납 ▲조직동원·착신전환 ▲지도부 줄대기 ▲유력 경쟁자 컷오프 등 부정적인 방법 일색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필승 비법'이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다보니 당연히 패자도 경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다. 당비 대납에 밀려 권리당원 투표에서 패했다는 것은 '현찰 박치기'로 진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누가 이걸 승복하겠나. 공천을 둘러싸고 정치권에 만연한 적폐는 결국 제도의 문제였던 셈이다.

    그런데 숙의선거인단 제도는 달리 '필승 비법'이 없다. 지난해 12월 31일 국회에서 의결된 개정 공직선거법에 따라 이동통신사에 안심번호를 요청해 선거인단을 성·연령·거주지 비례로 무작위 추출하고, 이들이 모여 예비후보자들 간의 정견발표와 토론 등을 지켜보며 숙의(熟議)한 뒤 공직후보자를 선출하게 된다.

    선거인단 추출 과정에서는 누가 누군지 알 수 없게 안심번호를 활용하므로 착신전환을 할 수도, '자기 사람'을 특별히 많이 밀어넣을 방법도 없다. 선거인단이 구성된 뒤에는 정견발표와 토론 등이 진행되므로 단순한 '깜깜이 투표'나 '인지도 경선'이 될 우려도 적다. 설령 인지도 높은 현역 국회의원이나 거물급 인사가 있더라도, 400명 내외의 선거인단이 참신한 정치 신인의 정견발표나 토론을 접하다보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적지 않다.

    '공정한 경쟁'보다는 '필승 비법을 알아내 완벽한 대비를 통한 확실한 승리'를, '깨끗한 승복'보다는 '불복'이 익숙한 우리 정치권에서는 낯선 제도다. 그러나 반드시 숙의선거인단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공정한 경쟁' '깨끗한 승복'은 반드시 우리 정치권에 정착돼야 할 문화다.

    숙의선거인단 제도를 제안한 유성엽 의원 본인도 경선에 넣어만 준다면, 즉 컷오프만 하지 않는다면 그 경선 결과에 100% 승복하겠다고 미리 공언했다.

  • ▲ 국민의당 안철수 인재영입위원장의 의지에 따라 당내 불화설이 잦아드는 것도, 신당의 성패도 결론난다. 새정치의 시작은 무엇보다 컷오프·단수공천·전략공천 없는 깨끗하고 투명하며 공정한 경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지적이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국민의당 안철수 인재영입위원장의 의지에 따라 당내 불화설이 잦아드는 것도, 신당의 성패도 결론난다. 새정치의 시작은 무엇보다 컷오프·단수공천·전략공천 없는 깨끗하고 투명하며 공정한 경선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지적이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유성엽 의원의 지역구인 전북 정읍은 인구 미달로 오는 4·13 총선에서 이웃한 고창군이 선거구에 편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지역에서는 3선 제한에 걸린 이강수 전 고창군수가 박주선 창당준비위원장의 통합신당 소속으로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유성엽 의원이 정읍에서 열린 이강수 전 군수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당장 한 달 뒤면 경선에서 맞붙을지도 모르는 잠재적 경쟁자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축사하는 것은 이례 중의 이례에 해당한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유성엽 의원은 "경선에서 내가 이기면 이강수 군수가 총력을 다해 돕고, 반대로 이강수 군수가 이기면 내가 총력을 다해 돕겠다"며 "사라졌던 경선 승복의 아름다운 정치 문화를 우리가 되살려보자"고 제안했다.

    비단 유성엽 의원 뿐만 아니라 국민의당에 합류한 의원 중에서 "나는 현역 의원으로 탈당해서 합류했으니 무조건 공천을 해달라"고 하는 사람은 확인된 바로는 한 명도 없다. 다들 공정한 경선에 보장된다면 깨끗이 승복하겠다는 태도다. 그 중에서는 '따놓은 당상'처럼 여겨지던 도당위원장 자리까지 "그냥 받지 않겠다"며 "경선을 하겠다"고 자처하는 사람마저 있다.

    그런데도 '안철수 측'으로 칭해지는 곳으로부터 연일 이상한 메시지가 언론에 흘러나온다. "현역 의원이 불출마를 해야 한다"며 사실상의 컷오프를 압박하는가 하면 "경선보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공천 방법을 검토하고 있다"고 전략공천이나 단수공천을 시사하기도 한다.

    국민의당 안철수 인재영입위원장 본인도 지난 11일 광주광역시 상록회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공직후보자에 대한 공천은 투명하고 혁신적으로 하겠다"면서도, 방향을 종잡기 어려운 아리송한 말을 남겼다.

    안철수 위원장은 "기존의 경선 방법으로는 정치 신인이 진입할 수 없다"며 "광주에서 구청장 경선을 했는데 기존의 구청장들이 신인을 누르고 모두 당선됐다"고 토로했다. "투명하고 혁신적인 경선 (방식)이 있으면 좋은데 기존 (경선 방법)은 신인은 진입하지 못하고, 전략공천은 또 문제가 있다"고도 했다.

    컷오프·단수공천·전략공천은 대표적인 구태 정치의 '3종의 신기'인데도 이러한 메시지가 흘러나오는 곳이 '새정치'를 주장하는 '안철수 측'이라는 것이 경악스럽다. 문병호 의원이 14일 CBS라디오 〈뉴스쇼〉에 출연해 "정말 없는 게 어떻게 그렇게 바깥으로 와전됐는지 모르겠다"며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는데도, 국민의당의 '당내 불화설'이 계속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돌아다니는데는 그러한 배경이 있다.

    경선 기회도 주지 않게 잘라내겠다는 것은 이른바 '인위적 물갈이'를 하겠다는 것인데, 그러한 구태 정치를 하고서도 불화나 갈등이 생기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고, '당내 불화설'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투명하고 공정하며 모두에게 참여 기회가 보장되는 경선을 통해 공천을 하겠다는 선언이 먼저 나오는 게 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