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이정은 "유관순은 '만세운동' 주도한 열사" "평가절하돼선 안돼""유관순 열사는 식민지 교육의 실패와 독립정신이 살아있음을 보여준 사례"

  • '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존재인 유관순 열사를 재조명하고, 단순 나열식 기록이 아닌 내러티브가 있는 역사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끌고 있다.

    수십년간 3.1운동을 연구하며 유관순 열사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한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도산 안창호기념관에서 취재진을 만나 유관순의 '항일운동기'를 깊이 있게 다루지 못한 현 역사교과서에 우려를 표명하며 "입시 위주로 짜여진 나열식 교과서에서 벗어나, 감동이 있고 '풍성한 이야기가 실린' 교과서로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는 유관순 열사에 대해 이름 하나만 언급되거나, 한줄 정도 평이 기록된 게 고작입니다. 우리 교과서가 여러가지 사실만 나열식으로 가르치려다보니, 하나도 남는 것이 없어졌어요. 유관순의 이야기는 우리의 '독립이야기'이고, '정신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는 피부로 와 닿는 이야기가 전혀 없어요.


    이정은 회장은 "미국에선 역사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과거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도록 역사적인 장소를 탐방하는 '현장수업'을 병행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자신의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를 교과서에 실어 역사적인 이해와 지식의 폭을 확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회장은 "유관순 열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며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관순 열사에 대해, 정작 역사교과서는 단편적인 기록에만 그치고 있고, 게다가 일각에선 친일파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유관순의 행적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와 안타깝기 그지 없다"고 밝혔다.

    지적하신대로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이 자신의 친일 행적을 무마시키기 위해 이화여고 학생 중에 발굴한 인물이 유관순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의 행적이 과대포장돼 있어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의 인물이 아니라는 비판이 바로 그것인데요.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당시 일제에 항거한 '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회장은 "유관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영웅만들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며 "당시 17세였던 유관순은 일제 식민지 체제가 교육해서 길러낸 '첫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을 했고,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무산시키는 행위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관순은 일제 식민지 체제가 교육해서 길러낸 '첫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을 했습니다. 이화학당 학생이라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지만 항일운동을 했습니다. 그것은 식민지 교육을 무산시키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유관순이 원래는 그런 일을 한 게 아닌데, 친일파에서 유관순을 부각시킨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


    이 회장은 "나아가 유관순은 수동적인 자세로 참여한 게 아니라, '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이었다"며 "남들보다 체격이 컸던 유관순 열사는 앞장서서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부모의 죽음에도 일제에 굴복하지 않은 분이었다"고 추어 올렸다.

    3.1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일본군이 유관순의 부모님을 죽였습니다. 어린 나이의 유관순은 그정도 되면 겁을 먹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법정에서도 저항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평균키가 150cm 정도였는데 유관순의 키는 169.7cm였다고 나옵니다. 키가 컸던 유관순은 병천 아우내 시위를 준비할 때, 독립선언서를 구해왔고, 인근 지역을 다니면서 각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연락책 역할을 했습니다. 시위할 때 태극기를 들고 앞장을 섰고, 아버지와 삼촌, 동네 아저씨들과 같이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 이 회장은 "1919년 6월 30일 2심 판결문 명단을 보면 유관순의 이름이 조인원과 함께 가장 먼저 언급돼 있는데, 중요도로 볼 때 첫 번째 요주 인물이 유관순이었다는 의미"라며 "이는 유관순 열사가 단순히 시위에 참가한 수준이 아니라 '병천 아우내 장터 시위'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밝혔다.

    이 회장은 "유관순 열사는 항일운동을 하면서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일제치하 법원이 5년형이라는 중형을 내렸다"며 "이는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저항적 태도'와 '독립정신'을 잃지 않은 유관순에 대한 보복적 형량이었다"고 주장했다.

    일제치하 법원이 5년형을 내린 것은 유관순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나이 어린 소녀를 감옥에 집어 넣은 1심 판결이 과했다"며 2심에서 형량이 '3년형'으로 줄어든 것을 봐도, 당시 판결이 저항적 태도를 보인 유관순에 대한 보복적 형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유관순의 '독립정신'은 죽지 않았다는 증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서대문 당국에서 유관순을 '악질분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회장은 "유관순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서대문감옥에서 '만세를 부른' 전설적 인물"이라면서 "유관순이 고문을 당하면서도 만세를 부르는 것을 목격한 이화학당 박인덕 교사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설득을 하기도 했고, 1920년 3.1운동 일주년이 오자, 서대문감옥에서 또 다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소개했다.

    당시 감옥 안에서 만세 소리가 다 울려 퍼졌어요. 이화학당 박인덕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유관순이 감옥 안에서도 독립정신을 계속 유지했다는 건 사실입니다. 일본이 17살 소녀 하나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죠. 따라서 독립정신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회장은 "3.1운동은 레닌도 모택동도 없는, 모든 참여자가 영웅이 된 운동으로, 돌이켜보면 100년 정도를 앞선 '창의적인 운동'이었다"면서 "오늘날 대한한국이 세계를 선도해 나가는 것은, 그러한 3,1운동의 '특질'을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는 견해를 내비쳤다.

    3.1운동은 100년을 앞선 운동입니다. 우리가 그 운동에서 읽어내야 하는 이야기들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3.1운동에는 영웅이 없어요. 레닌도, 모택동도 없습니다. 모든 참여자가 영웅이 된 운동입니다. 지금와서 보면 정말로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지금은 영웅의 시대가 아닙니다. 3.1운동은 모든 구성원들이 창의성을 갖고 참여한 운동입니다. 21세기 한국에,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운동으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이 회장은 "일본 역사학자마저 3.1운동에는 '일본이 경험하지 못한' 문명주의가 담겨 있어, 일본인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고 전했다.

    일본 역사학자 미야지마 히로시(宮島博史)는 한국의 독립운동에는 '민족주의'에 국한되지 않는 '문명주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의 적개심을 부추기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상생주의, 평화주의, 너희는 파괴의 길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이런 차원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 회장은 "'문명'과 '야만'이 대비되는 3.1운동을 연구하면서, 이런 뿌리가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갑자기 이런 게 나온 것일까 하는 생각들을 해본다"며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이 어떻게 돼야 한다'는 가치 정립이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과 취재진과의 일문일답 전문


  • - 유관순 열사는 실제로 3․1운동에 참여한 인물인가요?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와 호적등본, 재판기록문 등이 남아 있어 실존 인물로 확인됐습니다. 이 자료들은 천안시 유관순기념사업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유관순은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화학당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때 시위에 참여했고, 그 뒤 3월 5일에도 담을 넘어 '만세시위'를 했습니다. 서울에서 그렇게 두 번 시위에 참여하고 휴교령이 내려졌는데요.

    고향으로 내려가서도 4월 1일, 또 시위를 했습니다. 교장이 나가지 말라고 문을 잠가도 유관순은 울면서 항의를 했고, 끝내 담을 넘어서 시위에 참여했다는 목격담이 있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여러 시위에 참여한 것은 확실합니다.

    - 시위에 참여할 당시 어떤 활동들을 했었나요?

    ▲충남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시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지를 표명했습니다.

    1919년 6월 30일 2심 판결문 명단을 보면 유관순의 이름이 조인원과 함께 가장 먼저 언급돼 있습니다. 인물의 중요도로 볼 때 1번이 유관순이었다는 얘기죠.

    당시 유관순의 삼촌과 조병옥 박사의 아버지 등도 함께 시위에 참여했는데 1번이 유관순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존재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병천 아우내 장터 시위도 유관순이 주도적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평균키가 150cm 정도였는데 유관순의 키는 169.7cm였다고 나옵니다. 키가 컸던 유관순은 병천 아우내 시위를 준비할 때, 독립선언서를 구해왔고, 인근 지역을 다니면서 각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연락책 역할을 했습니다. 시위할 때 태극기를 들고 앞장을 섰고, 아버지와 삼촌, 동네 아저씨들과 같이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 교과서 내용 중 어떤 부분이 (역사적 사실에서)빠져 있고, 또 어떤 점들이 개선돼야 한다고 보십니까?

    ▲네, 지금 교과서만 갖고서는 올바로 된 '역사의식'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실린' 교과서로 나아 가야 합니다. 설명과 사건 연대만 나오는 게 아닌, 이해를 시킬 수 있는 이야기 형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 속에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은 모든것을 다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니깐 두가지의 맥락을 빠뜨리게 됩니다. 하나는 사건의 전후 관계를 알 수 없어 맥락을 알 수 없고, 국제적인 맥락을 이해를 못해서, 둥둥 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 형식이 필요한 것이지요.

    - 그러면 교과서 양이 많아지지 않을까요?

    ▲그래서 프랑스 같은 곳에서는 초등학교 때에는 고대사, 중학교는 중세사, 고등학교 때에는 근대사를 배운다고 합니다. 그 속에서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정서적 교감을 싣기 위함인 것이죠. 우리도 교과서를 보면서 감동도 있고, 문제의식을 갖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은 객관식 시험 위주의 교과서로만 가는 것 같습니다. 교과서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통해서 무엇을 교육적으로 전달해야 하는가를 충분히 고려하는 교과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공동체 가치라는 것도 정립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혹자는 친일파였던 이화학당 출신의 박인덕이 자신의 친일 행적을 무마시키기 위해 이화여고 학생 중에 발굴한 인물이 유관순이라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유관순이 원래는 그런 일을 한 게 아닌데, 친일파에서 유관순을 부각시킨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영웅만들기'가 아닙니다. 유관순은 실제적으로 운동을 했습니다. 당시 17세였던 유관순은 일제 식민지 체제가 교육해서 길러낸 '첫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을 했습니다.

    이화학당 학생이라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지만 항일운동을 했습니다. 그것은 식민지 교육을 무산시키는 행위였습니. 3.1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일본군이 유관순의 부모님을 죽였습니다. 어린 나이의 유관순은 그정도 되면 겁을 먹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법정에서도 저항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항일운동을 하면서 무력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일제치하 법원이 5년형을 내린 것은 유관순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나이 어린 소녀를 감옥에 집어 넣은 1심 판결이 과했다"며 2심에서 형량이 '3년형'으로 줄어든 것을 봐도, 당시 판결이 저항적 태도를 보인 유관순에 대한 보복적 형량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유관순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서대문감옥에서 '만세를 부른' 전설적 인물입니다. 유관순이 고문을 당하면서도 만세를 부르는 것을 목격한 이화학당 박인덕 교사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설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20년 3월 1일 일주년이 오자, 서대문감옥에서 또 다시 '만세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당시 감옥 안에서 만세 소리가 다 울려 퍼졌어요.

    비록 감옥에 갇혔지만 유관순의 '독립정신'은 죽지 않았다는 증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서대문 당국에서 유관순을 '악질분자'라고 불렀습니다. 이화학당 박인덕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유관순이 감옥 안에서도 독립정신을 계속 유지했다는 건 사실입니다. 일본이 17살 소녀 하나를 굴복시키지 못한 것이죠. 따라서 독립정신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유관순의 이야기는 우리의 '독립이야기'이고, '정신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과서가 여러가지 사실만 나열식으로 가르치려다보니, 하나도 남는 것이 없어졌어요.

    미국에서 역사와 관련된 흥미로운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 시민들은 역사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자기와 관련된 사람이나 이야기에 대해선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또 일방적인 강의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역사를 조사할 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는 얘기도 나왔어요.

    한 마디로 주체적으로 조사하거나, 자신의 피부로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니면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 

    미국에선 역사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과거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감'할 수 있도록 역사적인 장소를 탐방하는 '현장수업'을 병행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더 잘 와닿고 흥미를 느낄수 있도록 교육해, 이해와 지식의 폭을 확장시키는 것이죠.

    우리는 그저 서술적으로만 배우니까 아무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그 시대의 사건을 상징할 수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려줄 때 그것이야말로 더 나은 교육 방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유관순도 마찬가지입니다. 3.1운동을 서술할 때 전혀 와닿지가 않아요. 사례를 들어가면서 수업을 하면 이해도가 더욱 높아질 겁니다.



  • - 현재는 교과서에 유관순이 어떻게 평가돼 있습니까?

    ▲이름 하나만 들어가 있다든지, 한줄 정도 평이 기록된 정도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면, 학생들이 3.1운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3.1운동에는 고귀하고 숭고한 국민들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총칼 앞에서 맨 몸으로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는 바로 그 점이죠.

    예전에 외국 선교사들이 한국은 (일본에 의해서)근대화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3.1운동은 그러한 관점을 바꾼 계기가 됐습니다. 국민들의 의사 표명을 무력으로 탄압하는 일본의 '야만'을 목격한 뒤, 그것을 '자국'에 보고서로 전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한국의 항일운동 속에는 '문명주의'가 있습니다. 자유, 인권, 평화, 인류 평등을 담고 있는 것이죠. 그것을 탄압한 일본은 반대로 '야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관순이야말로, 아우내 장터의 탄압과 감옥에서의 비인도적 처사와 고문 속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고, 호소했던 인물입니다. 유관순에게는 3.1운동의 '상징성'이 있습니다.

    - 정부 방침에 의해서 교과서가 국정화로 바뀐다면 어떤 내용이 담길까요?

    ▲앞으로 어떤 교과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기대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교과서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시험 위주의 교과서가 안 됐으면 좋겠습니다.

    - 유관순의 이야기는 교과서보다는 위인전을 통해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위인전에서 사실 관계를 정리한 뒤 시험을 봤던 기억이 있어요. 따라서 '이야기 구조'를 교과서에 도입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린 아이들에게 얼마나 먹힐지는 의문입니다.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어떤 시대에 어떤 것들을 가르쳐야 할지 기획이 잘 돼 있어야 합니다.

    - 국정화 교과서에 대한 찬반이 분분한데, 박사님이 보시기에 검인정 8종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인지, 국정화가 왜 필요하다고 보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올해 발행된 한국사 교과서에는 유관순에 대한 이야기가 좀 더 보강이 됐는데요. 이번 일을 계기로 역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넓히는데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 국가기록원에 보관된 유관순의 항소심 판결문 얘기가 나왔는데요. 그것 말고 또 다른 기록들은 없을까요?

    ▲제가 유관순 전기를 썼습니다. 다 정리가 돼 있는데, 조사 결과 판결문이 있고, 서대문 감옥에서 찍은 사진과 수용자 카드가 있습니다. 국가기록원의 1심 판결 형사일지도 있습니다. 어윤희 열사 등 주변 인물의 증언과, 조병호가 남긴 회고록 등 다양한 자료들이 있습니다.

    - 그러면 검인정 집필자들은 어떤 자료를 근거로 만든 것일까요?

    ▲춘천대 모 교수는 한 연구자의 논문을 찾아보고, 그것을 근거로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유관순기념사업회에 찾아와서 사과하고 그랬습니다. 지금 고3까지는 개정되기 이전의 교과서로 공부를 했어요.

    - 유관순 전기는 어떻게 쓰시게 된 건가요?

    ▲천안시로부터 2002년도에 써달라는 제의를 받아서 2004년에 출간됐습니다.

    3.1운동은 100년을 앞선 운동입니다. 우리가 그 운동에서 읽어내야 하는 이야기들을 충분히 읽어내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3.1운동에는 영웅이 없어요. 레닌도, 모택동도 없습니다. 모든 참여자가 영웅이 된 운동입니다. 지금와서 보면 정말로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지금은 영웅의 시대가 아닙니다. 3.1운동은 모든 구성원들이 창의성을 갖고 참여한 운동입니다. 21세기 한국에,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는 운동으로 삼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은 모두가 참여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주도적으로 내는 그런 시대입니다. 돌이켜보면 100년 앞선 운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늘날 대한한국이 세계를 선도해 나가는 것은, 그러한 3,1운동의 '특질'을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일본 역사학자 미야지마 히로시(宮島博史)는 한국의 독립운동에는 '민족주의'에 국한되지 않는 '문명주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3.1운동이 그렇다고 봐요.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의 적개심을 부추기는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상생주의, 평화주의, 너희는 파괴의 길로 가지 말아야 한다는 이런 차원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역사학자 이야기로는 "일본은 문명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이같은 3.1운동을 이해할 수 없던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문명'과 '야만'이 대비되는 3.1운동을 연구하면서, 이런 뿌리가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갑자기 이런 게 나온 것일까 하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차후 교과서는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를 계획하고 잡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하다가는 하나도 못 가르치는 꼴이 됩니다.

    이 문제는 형식상의 문제, 포맷상의 문제, 공동체 가치의 문제가 있는 것이죠. 제일 문제가 되는 게 그런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의 건국정신에 비추어 볼 때 '무엇이 어떻게 돼야 한다'는 가치 정립이 필요합니다.




  • 인터뷰이 =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인터뷰어 = 오현지 기자
    취재/정리 = 조광형 기자
    사진 = 이종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