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제1회 우남 이승만 칼럼&독후감 공모전 수상작 발표회 및 시상식]이 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는 수상자들의 작품발표와 시상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대상을 수상한 경희대학교 경영학과 구태경씨의 독후감 [근현대사의 불가해, 이승만] 전문(全文)이다.



    책 제목 : 리승만 박사전 - 로버트 T. 올리버

    제 목 : 근현대사의 불가해, 이승만


    널리 쓰이는 말은 아니지만 오파츠 (OOPARTS, out-of-place artifacts) 라는 단어가 있다. 비주류 고고학에서 쓰이는 이 단어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유물’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이는 특정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유물을 총칭한다. 가령 어떤 유적에서 당시의 기술로는 만들 수 없어야 하는 미스터리한 유물이 나온다면, 그것은 오파츠로 분류된다. 물론 절대다수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용처를 알 수 없는 물건을 현대의 관점에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유물이란 과거 문명의 소산이고, 결국 그 문명이라는 틀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대부분이 오해로 밝혀지거나, 혹은 머지않아 그 진실이 규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진실이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아 여전히 그 신비로움을 보존하고 있는 유물들 또한 극소수 존재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그 평가가 가장 판이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이승만 대통령이다. 논쟁적인 인물들이야 몇몇이 존재하지만, 그 평가가 이승만만큼 극단적으로 나뉘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시장질서의 기틀을 세운 건국 대통령이라는 평가에서부터 분단의 원흉이자 민족의 반역자라는 평가까지, 극과 극의 평가다. 일반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다. 교과서에서건, 다른 매체에서건 그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간 이승만에 대한 고찰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자연인 이승만이 아닌, 일국의 원수인 대통령으로 살았던 인물이기에 대통령으로서의 공과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다만 인간 이승만에 대한 고찰이 없이는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공과가 오롯이 평가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당대라는 시대성을 생각보다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할 때는 당시의 시대상을 염두에 둬야만 한다. 천동설을 주장했던 플라톤이나 피타고라스를 현대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일도 없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67년 밖에 지나지 않은, 말하자면 신생국가다. 짧지 않은 세월임은 분명하나, 국가적 단위로 생각한다면 얼마 안 되는 시간일 수도 있다. 이런 연유에 대한민국의 역사 속 인물을 현대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우를 쉽게 범하곤 한다. 이는 우남에 대한 일반적 평가 역시 마찬가지다. 67년밖에 되지 않은 국가이긴 하나, 건국 당시의 대한민국과 지금의 대한민국 사이에는 말로 하기 어려울 만큼의 거대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외면할 때는 우남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기가 불가능하다.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짤막한 몇 줄 남짓으로 표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편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우남은 건국 즈음하는 1950년 전후의 우남이다. 인간 이승만에 대한 고찰이 없기에 의외로 많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데, 바로 우남이 1875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남은 사실 140년 전 구한말의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유소년시절 모두를 왕과 과거 제도가 있었던 조선에서 보냈으며, 그가 볼 수 있었던 세계란 전근대국가인 조선이 전부였다. 어린 시절부터 정립된 그의 세계관 또한 조선이라는 문명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이로서는 당대를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만 남겨진 기록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주요 인사들을 살펴봄으로써 어떤 시대였는가를 간접적으로나마 생각해볼 수 있다. 

    구한말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강화도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조선이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시기인 것이다. 1876년이 되어서야 강화도조약으로 문호가 개방되었고, 1880년에 비로소 미국, 영국, 독일 등의 열강들과 국교를 맺었다. 뒤늦게야 개방된 문호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저 조선이라는 문명 자체가 당대 열강들이 이룩한 문명과 비교해 너무나 뒤쳐져 있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런 문명에서 살아온 당대 사람들의 세계관이란 그 국가만큼이나 좁을 수밖에 없었다. 1883년에 최초로 미국에 방문했던 보빙사 일행은 전깃줄 가득한 하늘과 길가에 즐비한 가로등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깃불이 인간의 힘이 아닌 악마의 힘으로 켜진다며 전기 문명에 대한 충격을 표현한 바 있다. 보빙사의 일원이었던 민영익은 귀국 후에 그가 받았던 충격을 글로 남긴다. ‘나는 어둠에서 태어나 광명의 세계를 갔다가 어둠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구절이다. 이승만은 그런 시대에 살았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와 마주했을 때, 인간은 원초적인 공포와 경외감을 느낀다. 저 먼 옛날 원시인들이 불이나 번개를 보며 숭배하거나 두려워하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대의 조선인, 그 중에서도 외국 문물을 먼저 접해볼 수 있을법한 엘리트들이 그러했다. 별천지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거대한 문명과 조우했을 때, 그들은 공포를 느꼈다. 악마의 힘으로 켜지는 전구들이 어두워야 할 밤하늘을 밝히고, 굉음을 내지르는 철마가 광야를 달린다.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을 목도하고서 그들은 문명에 압도되었다. 오늘날 을사오적이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이완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친일파라는 범주에 속하기까지는 수많은 과정과 별도의 이야기들이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초대 주미 외교관으로서 비교적 오랜 시간을 몸소 겪었던 미국이란 문명의 기술과 제도 등을 보면서 느꼈을 조선에 대한 회의는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완용만이 아닌, 당대의 지식인 모두가 겪었을 충격이었다. 

    이승만이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그 충격으로부터 온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남 역시도 초기에는 일반적 조선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여타 선비들처럼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1895년 그의 세계관을 바꿀만한 계기를 맞는다. 바로 서재필과 배재학당이다.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서양에 대한 흥미를 갖도록 만들어줬으며, 또한 서재필은 이승만에게 미국유학을 적극 권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20대에 접어든 이승만이 조선의 세계관을 벗어던질 수 있게끔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그 문명을 이루는 정수들을 흠뻑 흡수하고,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미국의 선진 문명을 누리며 공부했던 이승만은 그 우월함에 짓눌리지 않았고, 그것을 활용하는 것만이 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이라는 이름으로 빛을 발한다. 

    교과서에도 실리는 이승만의 최대 공은 시장경제를 이룩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다. 당시의 환경으로서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일이라는 기술이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1948년에 공포된 제헌헌법을 보면 당시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이 어떤 수준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제헌헌법에는 무역통제, 자원·산업·민간기업에 대한 국유화, 균형 있는 국민경제, 사회정의 실현 등 사회주의 경제체제에 가까운 조항들이 있다. 참담했던 국가 경제사정도 거기에 한몫을 했지만, 시장경제라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국민들과 지식인들의 인식 수준이 더 본질적인 문제였다. 그 당시의 대한민국은 글도 모르는 이들이 전 국민의 80%를 상회하고, 국민의 78%가 공산주의 사상을 선호하던 시절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은 공산화의 물결에 휩쓸리고, 어제의 동포들은 공산주의를 채택해 북한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사회주의적 헌법을 제창하는 지식인들과, 공산주의를 염원하는 국민들을 다독이며 데려가고자 했던 우남의 필사적 몸부림이 바로 제헌헌법이었으리라.

    이후 적산기업의 민영화와 농지개혁을 통해 시장경제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시행했던 이 정책은 시장경제를 향한 이승만의 확신이었다. 당대의 그 어떤 지식인도 문명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고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도자를 자청했던 여러 지식인들 중에 장기적 국가 발전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이승만이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인 셈이다. 우남은 문명에 압도되어 휩쓸리지 않았고, 한 국가가 스러져가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미래에 대한 비전과 약소국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국제정세의 안목이 있었다. 세월이 흐른 오늘, 시장경제라는 우남의 비전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규모가 북한을 넘어서던 때까지, 소련이 멸망하던 때까지도 시장경제를 부정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걸 넘어서 오늘날까지도 시장경제에 대한 회의를 갖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를 감안하면 우남 이승만은 가히 미스터리에 가까운 인물이 된다. 140년 전에 태어나 조선이라는 국가의 멸망을 지켜봤던 사람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전근대에 태어났으나 현대까지도 이어지는 비전을 진즉에 깨닫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앞서 말한 유물의 예와 비슷하다. 선수든 유물이든 결국 그것이 속한 팀이나 문명 속에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지력은 그 사회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우남의 예를 보자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우남은 건국을 전후하는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당대를 초월했다. 지력이 그 국가를 결정한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우남 1인 국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멀게만 느껴지지 않던 이승만은 알면 알수록 멀게 느껴진다. 대한민국 문명사의 오파츠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파츠의 진실 규명은 대부분 오해를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어느 순간에 도태 내지는 절전되어버린 과거의 기술들이 다시금 발견되어 의문이 해소되고, 그걸 바탕으로 문명사가 정정되는 경우 또한 존재한다. 역사는 재평가되기 마련이다. 머지않아 이승만 또한 연구를 통해 그 진실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건국 이후 67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명쾌한 해석은 없다. 우남이라는 문명사적 위인이 문명사로 편입되기 보다는 고고학 속에 있는 하나의 오파츠로 남아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기우이기를 바랄 뿐이다.


    우남 이승만 명저 속 문구

    "우리의 공동목표는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뤄야 하는 평화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단지 패배와 인간 자유의 종말을 초래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표상은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지켜야하는 정의이어야만 합니다.정의란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서는 획득할 수 없는 평화, 옳은 것의 승리, 그리고 자유에 이르도록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모두를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바쳐야합니다."  - 이승만의 <이승만 대통령 방미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