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촌의 고생하는 사람들을 사랑한

    윤주영 사진전의 감동


    원로 사진작가 윤주영의 작품활동 35년을 담은 전시회
    <잔상(殘像)과 잠상(潛像)>이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4월15일까지 열리고 있다.
    다음은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설. 김승곤(조선pub 게재)     
      
    김승곤  
          
    사진가 윤주영이 정계에서 은퇴하고 사진을 처음 시작한 것이 1979년이니까, 금년이 만 35년이 되는 해다. 또 이번에 열리는 서른세 번째 개인전은 지금까지의 사진작업을 돌아보고, 그 동안 자신이 무엇을 보았으며 어떤 일을 해왔는지를 정리하기 위한 회고전 성격의 전시다.

  • ▲ 원로 사진작가 윤주영씨.
    ▲ 원로 사진작가 윤주영씨.

    사진전에 맞춰 펴내는 이 사진집은 ‘안데스의 사람들’과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 ‘동토의 민들레’, ‘탄광촌 사람들’, ‘석정리역의 어머니들’, ‘갯벌의 어머니들’, ‘변하는 5일장’, 이렇게 일곱 개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펴낸 스무 권의 사진집에서 그 숫자만큼의 서로 다른 모티브들을 다뤄왔으니까 여기 수록된 내용은 대략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 동안 쉬지 않고 찍어온 방대한 사진의 양으로 보자면 극히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그의 사진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망라된 집성적인 의미를 가진 사진집이다.
     
    그는 스물일곱에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서른셋에는 주요 일간지의 편집국장을 맡았다.
    그 젊은 나이에, 그것도 가장 영향력이 큰 언론사의 중책을 맡았다는 것은 한국 신문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당시 경제발전을 주도한 강력한 여당의 대변인으로 정치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 서른다섯 살 때, 그 이후로 무임소장관과 주 칠레 한국대사, 청와대 대변인, 문화공보부 장관 등 요직을 거치며,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한국이 한 덩어리가 되어 달려 나가던 시대의 맨 앞줄에 서 있었다. 국회의원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1979년 이후, 그는 오직 사진 하나의 길을 걷게 된다.
    무엇을 다시 시작해도 좋을 쉰한 살의 그가 선택한 것이 사진이었던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맨 처음 찾아간 것은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 과거에 화려한 고대문명을 꽃피웠던 남미 국가들이었다. 마야와 아즈텍을 비롯한 이타미아, 인다스, 황하문명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번영을 꽃피웠고 왜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는가, 지금 거기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그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내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남미 10여 개국을 시작으로 네팔과 인도, 터키, 중국,  베트남, 그리스, 이집트, 모로코, 튀니지아 등지를 돌았다. 아름답고 이국적인 관광지 같은 것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좋아서 시작한 사진이었고 또 남미에서 찍은 사진들로 두 차례의 작은 개인전을 열기는 했지만, LA 타임즈의 사진부장 키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키스의 조언은 윤주영이 걷게 될 사진인생의 축을 ‘인물’과 ‘다큐멘트’ 중심으로 기울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회는 연달아 찾아왔다. 패전국 일본의 수상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여송연을 입에 문 사진으로 라이프 지의 표지를 장식한 국제적인 보도사진가 미키 준(三木淳), 그리고 프로 야구선수에서 사진가로 전향해서 일본을 대표하는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이 된 이와미야 타케지(岩宮武二)가 그의 안데스 사진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일본에서의 전시를 제안한 것이다. 다음 촬영지를 네팔로 정하도록 권유한 것도 그들이었다.


    네팔은 모두 세 차례 갔고, 한 번 갈 때마다 열흘 정도를 촬영한 사진으로 첫 전시를 열기로 했다. 한국의 사진작가들 가운데에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아마추어’가 그렇게 빨리 개인전을 여는 일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발표한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진상 가운데 하나인 이나 노부오(伊奈信男) 상을 수상하게 된다. 1990년, 외국인 사진가로는 최초의 수상자였다. 이쯤 되면 그의 인생에서 사진가 이외에 다른 삶이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사진가의 길을 걸어 나온 그는 지금까지 32회의 개인전과 20권의 사진집을 펴냈다. 한국의 사진가로서는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이고, 앞으로 누구도 쉽게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안데스의 사람들

     

  • ▲ 원로 사진작가 윤주영씨.


     안데스의 사람들_에콰도르,1980
     

    이 사진집의 첫 장에 나오는 ‘안데스의 사람들’은 1980년과 82년의 두 차례에 걸쳐서 촬영한 사진으로 구성되었다. 주로 해발 3,000미터가 넘는 건조하고 황량한 고지대에서 흙 집을 짓고 옥수수와 감자를 주식으로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 혹독한 자연환경과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순수성과 장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잉카의 후예들에게 초점을 맞춘 사진들에서는 사진가로서의 그의 사상의 중심을 지탱해온 인간에 대한 공감과 짙은 휴머니즘을 읽을 수 있다.


    유난히 작은 체구의 이들의 얼굴에 피어 오르는 순박한 표정에서는 손톱만큼의 악의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적에서는 무기가 출토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이들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자연과 대치하고 자연을 극복하려 했던 다른 지역의 문명국들과는 달리, 이곳 사람들은 자연의 힘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들이 이룩한 안데스의 문명은 스페인의 통치자들의 학정과 가혹한 광산노역과 착취, 유럽인들이 들여온 천연두와 디프테리아 같은 전염병으로 인해서 결국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채소와 가축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계를 꾸려가는 잉카의 후예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지키며 엄격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열악한 정책과 재정 상태로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는 많은 아이들이 공용어인 스페인어를 읽고 쓰지 못하는 현실을 그는 가슴 아파한다.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
     
     

  • ▲ 원로 사진작가 윤주영씨.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_카트만두,1989

     
    깨달음이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의식의 상태로, 불교와 힌두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경지가 이에 해당한다. 카트만두에서는 죽으면 시신을 화장해서 재를 강에 뿌린다. 강의 흐름을 따라 실려 간 재는 간디스 강에 이르러서 하늘로 오른다. 그리고 언젠가 비가 되어 지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힌두교도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영혼이 잠시 육체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커다란 윤회의 바퀴의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진 그들은 이 집으로 들어와서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팔에 링거 바늘을 꽂은 채 주위 사람들로부터 다시 건강하게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거짓 위로의 말을 들으면서 죽어가는 우리와,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다시 돌아올 내세를 믿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어느 쪽이 행복한 것일까.


    윤주영은 첫 번째 본격적인 테마를 수행하기 위해서 모두 세 차례 카트만두를 찾았다. 그곳에서 취재하는 동안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물이었다. 지금처럼 아무 데서나 미네랄워터를 팔지도 않았던 때여서, 배탈이 나지 않으려면 증류기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을 모아서 마셔야 했다. 며칠씩 이어지는 지독한 설사로 팔다리를 움직이기조차 힘든 상황에서도 오직 찍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카메라를 들고 매일 새벽부터 밤까지 바그마티 센터와 바로 근처에 있는 화장터로 나간다. 지독한 냄새와 열악한 위생 상태를 견디며 한 번씩 촬영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며칠씩 앓아 눕기가 예사였다.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 과 ‘안개 낀 카트만두’는 그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동토의 민들레 - 사할린에 버려진 사람들

     

  • ▲ 원로 사진작가 윤주영씨.


     동토의 민들레_조성호 씨,유즈노사할린스크,1991

     
    일본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은 예상 밖의 좋은 반응을 얻었고, 그로 인해 큰 상을 받게 되었지만 2년 안에 수상 기념전을 열어야 한다는 조건을 맞춰야 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의 사진전에 들른 일본의 한 주간지 편집장으로부터 그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사할린(일본명 카라후토)에 잔류한 ‘조선인’들을 취재하는 윤주영을 기자가 따라가서 그 촬영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잡지에 게재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음 소재를 찾는 일이 급했던 그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제안이었다. 당시 일본의 매스컴에서는 그곳에 잔류한 일본인들의 귀환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다뤄지던 때여서 시기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받던 조선에서는 1939년부터 수많은 젊은이들이 강제로 징용되어 사할린으로 끌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소련이 그곳을 점령했고, 미소간의 인도 협정에 의한 귀환 대상자는 일본인으로 한정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인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나 대부분 반도의 남쪽에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귀환하지 못한 채 현지에 계속해서 남아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소련과 국교가 없는 상황에서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사할린에 잔류된 동포들은 오래 동안 망각의 세월 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윤주영은 먼 이국 땅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가족과 단절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한 많은 삶을 테마로 해서 촬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1992년 9월, 사할린의 잔류 한국인을 촬영한 사진들이 사진집 서문에 실린 그의 설득력 있는 문장과 함께 일본에서 발행되는 주요 일간지들에 특집기사로 다뤄지면서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할린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귀국시켜야 한다는 일본 국내의 인도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들 정부는 한일협정에 의해서 전후 보상 문제가 모두 종결되었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일본적십자사가 나서서 조선인 귀국 희망자들을 위한 지원에 나서게 되었다. 이전에도 사할린의 잔류 일본인을 취재해서 발표한 일본의 사진가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윤주영의 기록과는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사진을 보는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힘이 달랐다. 파인더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동포에 대한 깊은 연민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할린은 사진가에게 있어서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땅이었다. 한국에서 소련으로 가는 직항 편이 없었던 당시에 사할린으로 들어가려면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 니이가타에서 하바로프스크로 간 다음, 거기서 다시 사할린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다. 말이 공항이지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허허 벌판이다. 카메라 장비에 그곳 동포들에게 줄 선물로 가득 찬 무거운 가방을 끌고 몇 십 분씩 그 벌판을 걸어가는 일은 연로한 그에게는 고행과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그를 괴롭힌 것은 물과 설사였다. 발목까지 빠지는 질퍽한 길을 걷기 위해서 장화는 필수품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결혼식과 장례식 같은 특별한 통과의식들에 입회해서 그들을 지근거리에서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는 지나친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스리며 차마 직시하기 어려운 괴로운 장면들을 하나씩 기록해나갔다. 그것은 사진으로 엮은 하나의 민족의 대서사시였다.


    한 때 4만 명 가깝던 동포들도 이제 수백 명으로 숫자가 줄었다. 그것도 거의 한국말을 모르는 2세대와 3세대가 대부분이다. 비록 그들이 돌아와서 이곳 땅에 묻힌다고 해도 성묘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몇 남지 않은 1세대 동포들에게는 조국의 땅에 묻히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다.
     
    탄광촌 사람들
     
     

  • ▲ 원로 사진작가 윤주영씨.


    탄광촌 사람들_강원 태백,1991

     
    언론인이었던 그는 격변하는 사회의 현실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이른바 사회적인 리얼리즘의 방식으로 그 현실을 기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카메라는 언제나 피사체와 지나치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중립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자극적인 저널리즘의 카메라 워크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양이 차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사진가로서의 그의 현실에 대한 스탠스다.


    사할린 다음으로 그가 선택한 무대는 한국의 탄광촌이었다. 해방과 함께 북한의 수력발전소에서 내려오던 유일한 에너지인 전기가 끊긴 지 오래다. 기차를 움직이고 추위와 연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석탄이었다. 196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화력발전을 위한 동력자원으로 석탄 탄광의 개발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고, 70년대 들어 석탄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산업화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석탄 자원의 고갈과 채굴 비용의 증가, 환경 문제가 대두되는 80년대부터 석탄 산업은 침체되기 시작했고, 80년대 말에는 정부는 사실상 석탄 산업을 포기하게 된다.


    대부분 노동자의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석탄 채굴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과 병원, 학교 등이 마련되어 자연스럽게 취락이 형성되었다. 또 그들을 상대로 생긴 음식점과 풍속시설 같은 오락산업도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러나 연료가 나무에서 석탄으로, 그것이 다시 석유로 바뀌게 되면서 생활의 거점이 도시 부로 옮겨지게 되었고, 전통적인 방식의 탄광들이 하나씩 폐쇄되기 시작하면서 한때 번영과 호황을 누리던 광산촌은 단숨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한 시점에서 실시된 어느 여론조사에서는 70% 이상의 한국인이 자신을 ‘중산층’으로 생각한다는 응답이 나왔다. 풍요의 시대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산업화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탄광촌과 그곳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사람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진가 윤주영은 역동적인 한 시대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겨진 현실의 역사적인 의미에 대한 인식과 그곳에서 영위된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을 지닌 채,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나씩 기록해 나갔다. 어느 경우나 사람의 얼굴에 렌즈를 겨눈다는 것은 수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둡고 무더운 갱도에 들어가서 버릇처럼 석탄을 캐는 억센 광부들과 석탄가루로 인한 심폐증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완강한 환자들도 결국은 그의 열정과 카메라를 받아들였다. 한때 ‘검은 다이아몬드를 캐는 용사’들로 불리던 광부들을 촬영하면서 그들의 초라한 모습 위에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굴곡 많은 인생이 흐려지는 시야 속에 주마등처럼 겹쳐지는 것을 보았을 지도 모른다.
     
    ‘한강의 기적’과 어머니

     

  • ▲ 원로 사진작가 윤주영씨.

     
    석정리역의 어머니들_광주시,1992

     
    1950년,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은 3년 동안 괴멸적인 파괴의 흔적만을 남기고 정전되었다. 포화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폐허와 혼란과 가난뿐이었다. 그런 한국이 세계 최빈국에서 단기간에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을 가리켜 세계에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강력한 개발정책으로 경제와 산업,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의 계획적인 발전이 추진되었고, 단기간에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그 속도와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대가를 치러져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자신의 역할을 그런 부(負)의 현실을 드러내는 데서 찾으려고 하는 것과는 달리, 윤주영은 그 ‘기적’을 일궈낸 원동력이 무엇인가, 한국인의 유전자 가운데 짜여 들어 있는 근원적인 힘의 부분에 렌즈의 초점을 맞췄다. ‘우리의 시대를 이끌어온 사람들’, ‘백인 백상’이 그것이다.


    그가 사진 인생을 통해서 일관되게 추진해온 중심적인 주제는 바로 ‘어머니’ 였다. 우리의 땅은 비옥하고 삼면을 둘러싼 바다는 풍요로운 에너지로 가득 채워져 있다. 자연에 순응하며 거기서 생산되는 곡식과 채소와 물고기를 먹는 한국인은 근면하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온화하고 참을성 많고 결코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는 한국의 여성들의 강한 내면이 오랜 세월 그런 환경 속에서 길러졌다. 남성들의 유전자 가운데에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강한 육체적 정신적 힘이 짜여 들어 있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강한 생명력과 보호본능을 가지고 있다. 출산과 육아, 집안 살림, 남편과 시부모 돌보기, 자식들의 교육 같은 과중한 역할을 묵묵하게 해 나온 것이 바로 우리의 어머니들이다. 근현대의 생활사를 통해서 남존여비의 유교적 사상으로 언제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 받아온 우리의 어머니들이 본능적인 끈질긴 힘으로 역경을 이겨내고, 가족과 사회와 나라의 미래를 열어간 원동력이 되어 온 것을 우리는 보아왔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은 가족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베푸는 그런 한국의 어머니들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어머니라는 말 속에는 항상 아득한 울림이 담겨 있다. 가족은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다. 자애롭고 현명한 어머니와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식들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예의와 효도를 가장 큰 가치로 생각하며 자랐다. 자식들을 자신보다 아끼고 지식과 가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우리의 어머니 상이다. 그들은 배우지 못한 것을,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을 원죄로 안고 살아왔다. 모진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살아온 그들은 자신이 겪어야 했던 지긋지긋한 가난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일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자식들에게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배움의 길을 열어주는 것은 모든 어머니들의 유일한 꿈이고 희망이다. 윤주영은 그런 어머니들의 원상(原象) 같은 것을 찾아내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의 전 작업의 중심에 놓여있다. 국내에서의 거의 모든 작업이 어머니와 관련된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어머니’의 존재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석정리역의 어머니들
     
     

  • ▲ 원로 사진작가 윤주영씨.


    (왼) 갯벌의 어머니들_충남 태안,1996
    (오) 변하는 5일장_강원 양양,2008

     
    석정리역에는 역사(驛舍)도 역무원도 없다. 그러나 매일 아침 7시 44분에 이 역을 지나는 남광주행 ‘비둘기호’ 열차가 어김없이 이곳에 선다.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의 남광주역 근처에서 아침나절에만 잠깐 열리는 번개장터에 나가는 어머니들을 태우기 위해서다. 그들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과 무게의 채소와 과일을 이고 진 채, 눈이 오나 비바람이 부는 날이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석정리역으로 나온다.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화덕에 몇 차례 나눠 삶은 강냉이를 함지박에 넣어서 머리에 이고, 뜨거움을 참으며 십 리 길을 걸어야 하는 날도 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객지에 나가서 공부하는 자식과 손주들의 이야기다. 누구 한 사람도 고단한 삶을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이는 없다. 남광주역에 도착하는 것은 8시 반, 열 시에 남광주역을 출발해서 다시 석정리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한 시간 안에 가지고 온 채소와 과일들을 모두 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 손에 쥐는 것은 하루에 많아야 3, 4만원, 하지만 어머니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 돈을 써본 적이 없다.


    어디 석정리의 어머니뿐이겠는가. 윤주영은 18년 동안, 바닷가 갯벌과 탄광촌과 논밭과 시골 장터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서 묵묵하게, 그러나 결코 꺾이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프레임에 담아왔다. 1970년대 초의 어느 여름날, 공사장에서 보았던, 젖먹이를 업은 채 자갈을 이어 나르는 여인을 그는 회고한다.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그 여인의 등에 업힌 아이는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고… 중략 …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지금 그 젖먹이 아이는 대학생 자식을 둔 어엿한 중년의 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이다.”(‘어머니의 세월’ 서문에서) 그렇게 태어나고 성장한 그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세월을 과연 기억하고 있을까?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도 쉽게 따르지 못할 업적을 이루었음에도, 이른바 한국의 사진 계라는 곳에서 그는 오래 동안 아웃사이더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훨씬 먼 곳에 와 있는 그에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누구보다도 확실한 목표와 사명감을 가지고 있으며, 결코 적당히 타협을 하는 일이 없다. 작품을 프린트하거나 사진집을 만들 때도 그는 유난히 고집스런 기준을 가지고 있다. 사진의 선정이나 편집은 말할 것도 없고, 프린트에서 액자와 인쇄, 제본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계획한대로 완벽하게 컨트롤하기를 원하며,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앞서 말한 것처럼, 광각렌즈를 사용해서 장면의 극적인 효과를 높이려고 하지도 않고,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대상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는 것도 모든 사진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촬영 스타일이다. 상대적으로 ‘불행한’ 경우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찍고 있지만,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서 비분강개하거나 격앙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고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과장이나 왜곡도 볼 수 없다. 그가 사진적인 기교나 수사법을 구사하지 않는 것은 그 방법이나 효용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주관의 개입에 의한 왜곡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그것이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가능한 한 정직하고 직접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최선을 다 했는가, 더 잘 할 수는 없었는가?’ 그쯤이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는 거기서 그만두지 못한다. 만족감이나 성취감보다도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부과한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캄보디아를 취재하는 동안에 만났던 일본인 여성이 그곳에 매몰된 수많은 지뢰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약초를 재배하게 해서 그것을 일본으로 전량을 들여가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사진이 분명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실현 가능성도 없는 ‘이상향’을 꿈꾸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왔다. 그런 그가 사진의 무력한 힘에 절망감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 동안 베트남에의 ‘라이따이한’들을 한국에 취업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주도록 관계 요로에 여러 차례 제안했다. 전쟁이 끝난 지 40년, 한국어를 배우면서 아버지의 나라에 가서 일하게 될 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그들은 이제 청년기를 넘어 중년이 되었다. 베트남 여성과 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는 그곳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모두 미국으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에 버려진 가족과 아이들을 찍은 사진을 몇 군데의 대도시들을 돌며 전시했을 때, 누구 한 사람 나서지 않는 한국의 현실을 그는 지금도 가슴 아파 한다.


    사할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작곡가와 시인, 화가, 소설가, 사진가, 드라마작가, 영화제작자 같은 예술가들이 사할린에 가서 참혹하게 살아야 했던 동포들의 이야기를 듣고 각자가 그들의 일생을 작품으로 만들어낸다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얼마나 많은 작품들이 나올 것인가. 그러나 그 꿈도 허망하게 깨졌다. 정치와 언론의 현장을 떠나서 카메라를 손에 든 자신이 이때만큼 초라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고 심경을 토로하는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그가 말하는 ‘잔상과 잠상’이란 사진이 가진 잠재적인 힘과 사진 영상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사진가 윤주영의 카메라는 그의 눈과 머리와 가슴에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그가 렌즈를 통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살아 있는 현실이지만,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현실의 훨씬 안쪽에 있는 역사적인 기억이다. 그 흑백의 계조로 옮겨진 사진들은 우리에게 짙은 서정성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그가 입회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초월해서 그 현실에 내포된 깊고 복합적인 것들이 우리들의 감정에 강하게 호소하는 무엇인가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붙인 이름, ‘아마추어사진가’


    자신을 아마추어와 프로의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는지를 그에게 물었을 때, 바로 돌아온 것은 “나는 항상 아마추어였다.”라는 대답이었다. 남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 사진을 찍어왔고, 세속적인 보상을 위해서 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분명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세상에서 존경 받아야 할 어떤 사진가에 못지않은 진정한 프로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카메라를 손에든 명확한 이유와 목표 의식을 갖고 있으며, 어느 경우에도 도중에 단념하는 일이 없이 자신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왔다. 끊임없이 다음 목표를 세우고 모든 일에 열정을 기울여 최선을 다했으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강한 신념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휴머니즘에 입각한 긍정적인 생각, 그리고 미래를 들여다보는 넓은 시야와 긴 안목을 가진 그를 어떻게 아마추어로 부를 수 있겠는가.


    그는 오직 인간에 초점을 맞춰왔고 사진에 헌신해왔다. 베트남과 중국, 네팔, 사할린, 바다와 남도의 갯벌, 탄광촌, 시골장터로 향하는 새벽열차, 한국을 지탱해온 어머니들을 묵묵히 그러나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찍어왔다. 그는 자신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지만, 자신이 사진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 짧은 글에서는 주옥같은 한 장 한 장의 사진에 대해서 내 생각을 말할 여유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보다도 그가 단 한 장의 걸작사진이나 결정적인 순간을 노리는 사진가가 아니고, 그가 다루는 주제들은 어느 것이나 역사적인 크고 넓은 문맥 가운데에서 읽혀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년에 미수를 맞는 그는 누구보다도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폐암과 척추 디스크로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은 그는 아직도 통원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잠상’이란 앞으로 남은 시간 찍어나가야 할, 그의 머리와 가슴 속에 들어 있는 아직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상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 ‘잠상’이 어떤 뚜렷한 형체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인가, 긴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일어서는 그가 “내년 음력 정월에는 베트남에 가야 하는데….”라고 혼자 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그가 찍어오는 베트남 사진들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