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承晩은 왜 김일성을 守舊매국노로 봤나?

  • 趙甲濟     
      
    <한 국가는 그가 배출하는 인물들뿐만 아니라 그가 존경하고 기억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다(A nation reveals itself not only by the men it produces but also by the men it honors, the men it remembers)>
      
       이것은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를 추도하는 자리에서 한 연설 중 한 대목입니다(월간조선 2000년 4월호 별책 단행본 「세계를 감동시킨 명연설들」에 全文 수록).
    14년 전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있을 때 명연설을 모은 책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링컨, 제퍼슨 같은 미국 대통령의 취임사를 原文(원문)대로 소개한다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취임사도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李承晩(이승만)의 制憲(제헌)국회 개회사,
    초대 대통령 취임사, 건국 기념식 축사를 찾아내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링컨 대통령의 게티스버그 연설은 제가 배운 국민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고 그 마지막 귀절은 많은 한국인들이 외우고 있을 정도인데 정작 자기 나라 대통령의 기념비적인 연설을 이제 와서 처음 읽고 있다니. 글을 써서 먹고사는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감격했습니다.
    李承晩의 3大 연설을 영어로 번역하면 링컨의 연설에 결코 빠지지 않으리란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대통령의 연설은 그의 인격을 반영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가 이끄는 나라의 인격, 즉 國格(국격)을 상징한다고 믿습니다. 1948년 우리의 선배들이 대한민국을 만들 때 안으로는 左右(좌우) 이념대결로, 바깥으로는 국제공산주의의 도전으로 소란스럽고 나라의 물질적 기반도 취약하기 그지 없었지만 李承晩 대통령의 말씀은 꾸밈없이 당당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 조국의 미래에 대한 낙관, 북한 공산 집단에 대한 경멸을 당당하게 설파한 그의 연설을 읽으면서 저는 가슴 속 깊은 데서 올라오는 어떤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 이런 분이 건국한 나라이기에 우리가 오늘 이렇게 버티고 있구나 하는 自覺(자각).
    저는, 민주주의와 근대국가의 경험이 全無(전무)했던 당시의 사정을 감안하고 본다면 李承晩의 이 연설은 링컨의 명연설에 비해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깊이와 높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교과서에 올려야 될 것은 게티스버그 연설이 아니라 바로 이 연설일 것입니다. 자기 손에 있는 금덩어리보다 남의 손에 있는 은덩어리를 더 귀하게 보는 사고방식, 이것이 바로 사대주의입니다. 사대주의란 자신이 딛고 있는 것들─조국, 현실, 문화, 역사를 卑下(비하)하도록 논리화한 사고방식에 다름 아닙니다. 후배와 후손들에게 李承晩의 연설을 읽힙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李承晩은 制憲국회에서 국회의장으로 뽑혀 개회사를 할 때 맨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미국처럼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독교 정신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역대 대통령 및 實權(실권)총리 열두 분 가운데 朴正熙, 崔圭夏, 全斗煥, 盧泰愚,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제외한 과반수가 기독교 신도였습니다. 남북한의 대결은 종교를 탄압하는 北의 無神論(무신론) 對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南의 有神論(유신론) 사이의 대결이기도 한 것입니다.
      
       저는 英美圈(영미권) 인사들의 英文(영문) 명연설을 읽으면서 「명연설의 공통점은 겸손함 속에서 우러나오는 단호함」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 겸손함은 기독교의 절대자 앞에 선 인간으로서의 자세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대통령과 같은 권력자는 이 세상에선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만나볼 수 없기 때문에 여간 自制(자제)하지 않으면 오만해지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란 존재는 하나의 채찍이자 브레이크가 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스스로 神(신)이 되어버린 金日成의 오만방자함과 李承晩의 겸손함이 바로 그런 對比(대비)이자 오늘날의 남북한 격차를 가져온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李承晩이 이 3大 연설을 할 때 최대의 고민거리는 조국분단의 문제였습니다. 링컨의 1861년 대통령 취임사가 합중국의 남북 분단 위기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두 偉人(위인)의 연설은 서로 비교할 만합니다.
      
       <공산당 韓人(한인)들에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줄 것이니 改過回心(개과회심)해서 全민족이 주장하는 國權(국권)회복에 우리와 같이 合心合力(합심합력)하면 우리는 前過(전과)를 잊어버리고 다같이 선량한 동포로서 대우할 것이요, 회개치 못하고 국가를 남의 나라에 附屬(부속)시키자는 主意(주의)로 살인, 방화, 파괴 등을 자행할진대 國法으로 준엄히 처단할 것이니 자기도 살고 남도 살아서 자유 권리를 같이 누리도록 法網(법망)에 복종해야 될 것이니 우리나라에서 살려면 이러지 않고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국회 개회사)
      
       <以北(이북) 동포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附屬하자는 불충한 사상을 가지고 국권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全민족의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 남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고 남의 도움을 받으려는 反逆(반역)의 행동을 버리고 기왕에도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賣國(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므로>(초대 대통령 취임사)
      
       <거의 1천만의 동포가 우리와 민국건설에 같이 진행하기를 원하였으나 유엔대표단을 소련군이 막아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 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치를 요구할 것이요>(건국 기념식 축사)
      
       위에 인용한 李承晩의 연설에서 그의 對北觀(대북관)이 뚜렷이 나타납니다. 그는 공산당과 북한동포를 구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공산당이 「全민족의 원수」인 이유는 이들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남의 선동을 받아 제 나라를 결단내는 賣國주의자」이기 때문이란 논리입니다. 李承晩은 金日成 집단을 철저하게 소련의 꼭두각시로 보고 있기 때문에 建國(건국)을 방해한 책임도 유엔대표단의 入北을 막아 남북한 총선거를 방해한 소련에 대해 따지고 있습니다.
      
       李承晩이 자신의 3대 연설에서 「소련의 꼭두각시」 金日成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소련을 질타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金日成의 생리를 정확하게 간파한 것입니다. 金日成이 서구의 공산당처럼 조국을 배반하지 않는, 말하자면 「애국적인 공산당」이라면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李承晩은 金日成이 남(소련)의 선동을 받아 조국을 소련에 附屬시킴으로써 제 나라를 결단내는 事大賣國(사대매국)세력이라고 正確無比(정확무비)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당에 대한 이런 본질적인 통찰력이 李承晩을, 자유세계의 대표적인 反共투사로 만든 것입니다. 李承晩의 이 통찰은 그 뒤 역사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金日成은 스탈린의 세계전략에 노리개로 동원되어 제 조국을 피바다로 몰고 가 300만의 목숨을 끊었고, 그의 아들은 사회주의 생산양식이란 남의 논리, 남의 선동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채 자신의 일신상 편의를 위해서 300만 명을 굶겨죽였습니다. 남(그것이 소련이든 外製 사상이든)을 위해서 조국의 국민들을 판 金日成 부자는 事大賣國주의자인 것입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일본기자와 인터뷰하면서 金正日을 「識見(식견) 있는 지도자」라고 부른 데 이어 독일 슈피겔誌와 인터뷰하면서는 그를 「실용주의자」라고 불렀습니다. 동양정치사에서 실용주의자란 중국 戰國(전국)시대의 管仲(관중·齊나라를 覇者로 만든 명재상), 세종대왕, 崔鳴吉, 鄧小平, 李光耀, 朴正熙 같은 사람들입니다. 실용주의자들의 행동철학은 金大中 대통령도 좋아하는 實事求是(실사구시)입니다. 정치인에게 實事求是란 「事實에 기초하여 現實을 직시하고 국민 전체의 이익을 기준으로 하여 是非(시비)를 가리는 자세」로 定義됩니다.
      
       이를 金正日에게 적용한다면 그는 「사회주의가 역사의 퇴보세력이란 사실을 인식하고 북한이 망해가고 주민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한 뒤 한민족 전체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판단을 내리는 지도자」란 뜻이 됩니다. 金正日이가 그런 지도자입니까. 그는 李承晩이 直擊(직격)한 대로 事大賣國的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외래사상인 사회주의에 內在된 선동의 논리에 포로가 되어 가장 큰 國益, 즉 국민을 먹여살리는 의무를 포기한 金正日은 가장 큰 賣國(이 경우 서양에서 나타난 공산주의 이념을 절대가치로 맹신하여 그 반동적인 이념에 국익을 팔아먹었다는 의미)을 한 者인 것입니다.
      
       이런 者를 「실용주의자」라고 칭찬하면 칭찬한 사람이 낮아집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다른 연설에선 북한에 비교하면 天國 수준이던 소련을 「惡(악)의 帝國」(Evil Empire)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호칭으로 해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외교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국가도 아닌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의 수괴를 향해서 왜 「실용주의자」란 월계관을 우리 대통령이 씌워주어야 합니까. 대통령은 어린이들에겐 가장 큰 교사입니다.
      
       「외교적 언사」였다고 할지 모르지만 외교적 언사는 신중함과 정확성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지 사실 왜곡을 합리화하는 데 쓰일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하여는 그런 言辭(언사)도 허용될 수 있다고 한다면 저도 인용할 말이 있습니다. 별책 단행본에 실린 위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 중 한 대목입니다─「正義는 평화보다도 더 소중하다」(The right is more precious than peace).
      
      
       링컨 대통령은 별책 명연설集에 소개된 첫 취임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가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조직도 자신의 소멸을 위한 조항을 기본법 안에 규정한 적이 없다」 「다수가 헌법상에 보장된 소수의 권리를 빼앗는다면 이는 혁명을 정당화한다」 「헌법상의 견제에 따라 自制(자제)할 줄 아는 多數(다수)야말로 진정한 주권자이다. 다수결 원칙을 거부하는 사람은 필연코 무정부주의나 暴政(폭정)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민주사회에서 만장일치란 불가능하다」 「정부가 유지된다는 것은 한 쪽이 다른 쪽에 순응하는 것을 말한다. 소수가 순응하지 않으면 다수가 순응해야 한다」 「한 개 州에서 일어나는 행동이라고 해도 美 합중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武力(무력)행동은 反逆(반역) 내지 혁명이다」
      
       변호사인 링컨은 남부의 州들이 분리해 나가려는 행동이 反헌법적이고 反민주적이며 反국가적이기 때문에 반란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란의 법률적 定義(정의)는 헌법에 반역한다는 뜻입니다. 「士官(사관)과 신사」란 영화에도 나오지만 미국 장교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헌법에 대한 충성을 통해서 맹세합니다. 국가에 대한 충성이라고 하면 충성의 定義가 애매하여 너무 포괄적이지만 헌법에 대한 충성이라고 한다면 구체적이고 객관적입니다. 지난 호 편집장의 편지에서도 강조했지만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논리, 북한을 反국가단체로 보지 않겠다는 논리는 헌법의 영토조항과 배치됩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이 가진 正義감각하고도 맞지 않습니다. 북한을 주권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률이 딛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관을 뒤엎는 것으로써 善惡 구별이 모호한 사회를 만들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입니다.
      
       月刊朝鮮의 「386세대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 출마자 8명의 국가관 검증」 기사에 따르면 8명 중 네 사람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는 것은 통일을 포기하는 길을 열게 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때 우리 사회에서 통일 至上(지상)주의의 바람을 일으켰던 주인공들이 통일의 가능성이 높아진 지금 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지극히 우려할 만한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헌법과 법률을 바꾸고 제정할 수 있는 국회로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 가운데 우리 헌법의 가장 기본 前提(전제)에 대한 생각이 이처럼 顚倒(전도)되어 있다면 남한이 경제력에서 북한을 아무리 앞서고 있다고 하더라도 안심하기엔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링컨의 연설을 읽어보면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링컨을 잘못 보는 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링컨은 노예해방을 하기 위해 남북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합중국이 유지될 수만 있다면 노예해방을 하지 않아도 좋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의 제1의적인 관심사는 합중국의 유지였습니다.
      
       그는 첫 취임연설에서 「한쪽에선 노예제도가 정당하고 확대시행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반면에 다른 쪽에선 확대되어선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들 사이의 유일한 쟁점이다. 그런데 왜 이런 문제로 남부가 분리하려고 하느냐」고 말합니다. 즉, 당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노예해방의 찬반이 아니라 남부에서만 실시되던 노예제도를 북부로 확대할 것인가, 이를 저지할 것인가였습니다.
      
       물론 링컨은 마음 속 깊이 노예제도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고, 그런 생각은 남북전쟁중 노예해방 선언으로 나타납니다. 미국인들이 링컨을 존경하는 첫째 이유는 전쟁을 감행해서라도 합중국의 분열을 막아 국가적 통합을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통일대통령입니다.
      
       국가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代價(대가)로서 약 60만 명의 미국인들이 戰死(전사)했습니다. 그 뒤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1,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및 월남전쟁의 전사자수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생명이 미국의 통일 유지를 위해 희생되었던 것입니다. 왜 평화를 위해 正義를 양보하지 않았느냐, 즉 왜 남부의 분리를 허용해주지 전쟁까지 했느냐 하고 따지는 미국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1984년 미국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여성으로 유엔 대사를 지낸 진 커크패트릭은 『좌우지간 그들은 항상 미국을 먼저 비난합니다』란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민주당의 위선성을 공격합니다. 민주당이 美蘇관계에서 소련의 침략성을 비난하지 않고 항상 그들의 조국을 먼저 비난한다는 뜻에서 그는 민주당원들을 「미국을 먼저 비난하는 군중」(blame America first crowd)이라고 작명하기도 했습니다. 커크패트릭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민들은 우리가 일으키지도 않은 끔찍한 문제들 때문에 스스로를 自責(자책)한다는 것이 대단히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미국 국민은 저명한 프랑스 작가 장프랑수아 레벨과 마찬가지로 끝없는 자기비판과 자기모욕의 위험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자신의 모든 實在 그리고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문명은 스스로를 방어할 활기와 신념을 잃게 될 것이 확실하다』>
      
       우리나라에서 지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북한 관계를 말하면서 북한의 침략근성에 의해 빚어진 일들까지도 모두 남한의 잘못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소위 진보세력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죄책감을 강요하고 있는 사람들을 진보세력으로 대우해주는 사회는 自衛(자위)능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 목소리의 10배, 100배를 북한을 향해서 외쳐야 합니다. 무장간첩과 잠수함을 보내고 외국순방중인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참모들을 죽이려고 했던 북한정권, 그리하여 보안법의 존립을 불가피하게 만든 그들에 대해선 한 마디도 않고 예외적인 사례를 들어 이 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을 항상 먼저 비난하는 사람들」의 변태적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金瓊元(김경원) 전 駐美(주미)대사의 말대로 한반도의 냉전해체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북한 공산주의 체제가 소멸해야 냉전체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북한의 냉전체제 해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남한만의 냉전체제 해체는 무장해제이자 국가적인 자살행위입니다. 한반도의 냉전체제는 거의 전부가 북한 지역에 존재합니다. 대한민국 안에 무슨 냉전체제가 존재합니까.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는 국군과 국가보안법을 냉전체제라고 비난할 수 있습니까. 히틀러보다도 못한 金日成-金正日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냉전식 사고방식이라고 비난할 수 있습니까.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냉전적 사고방식입니까. 북한에 대해 상호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냉전적입니까.
      
       냉전체제 해체 요구는 북한을 향해서 해야 하는데 북한이 들어줄 것 같지 않으니까 만만한 대한민국과 그 애국시민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냉전적이다. 그러니 自省(자성)하라』면서 죄책감을 심어주려고 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선동의 계절입니다. 이런 논리를 전개하는 이들은 북한의 만행을 비난하는 남한의 언론을 매카시즘적이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헌법질서와 대한민국 체제를 지키겠다는 애국세력을 향해서는 파쇼, 우익, 守舊(수구)세력 운운하더니 김대중 정권에 들어와서는 드디어 당당하게(?) 「反共=惡」이란 論法(논법)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어떤 자신감(권력자, 수사-정보기관, 언론, 非정부단체가 자신들을 밀어준다는 식의 자신감)을 갖지 않고서는 하기 어려운 너무나 反헌법적인 행동입니다.
      
       <안보 이데올로기가 한국의 시민사회를 규율하는 초법적 메타법 이데올로기로 군림하고 있다. 분단시대 한국 현대사의 반공주의적 교육은 체제와 이념 문제에 대한 개인의 어떠한 자율적 판단의지를 허용하지 않았다>
      
       <언론은 분단의식과 냉전문화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다. 보수언론은 남북관계에서 적색공포의 신화를 창조하는 매카시즘의 진원이 되어 왔다>
      
       <남북한 관계에서 우리 정부의 상호주의 원칙은 대북 불신감에 기반한 대결과 갈등의 냉전의식의 소산이다>
      
       <국가보안법은 냉전시대의 산물로 이제 그 역사적 존재이유를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보안법은 「외부의 적」을 상대로 「국가안보」를 지키는 법률이라기보다는, 「내부의 국민」을 상대로 「정권안보」를 지키는 법률로 기능해왔다는 비판을 극복하기 어렵다>
      
       이상의 발췌문은 통일부 산하 통일연구원에서 펴낸 「한국사회 냉전문화 극복방안 연구」(저자 曺敏)란 제목의 논문에서 따온 것입니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 연구소에서 이런 주장이 나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가는 사회라면 自衛능력을 의심할 만합니다. 이 논문의 저자는 보수언론이 남북관계에서 적색공포의 神話를 창조했다고 했습니다.
      
       새벽에 기습을 당하여 수백만의 생명과 재산을 잃은 남한, 그 뒤에도 국가원수의 생명을 노린 직접적인 테러를 세 번(1·21청와대 기습기도사건, 陸英修여사 피살사건, 아웅산테러 사건)이나 자행한 북한정권, 이런 남북한 관계에서 한국의 보수언론이 도대체 어떤 보도를 했기에 赤色(적색)공포의 신화를 창조했다는 것인지.
      
       매카시즘이란 1950년대 초반 미국의 매카시 의원이 주동이 된 査問會가 공산주의와 연관성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 공직에서 추방한 일을 가리킵니다. 우리나라 보수언론이 무슨 힘이 있어 그런 공직자 추방을 했습니까. 북한주민 300만이 굶어죽은 기사를 철새 한 마리가 독을 먹고 죽은 것보다도 작게 다룬 것이 한국의 보수언론인데 赤色공포를 창조했다니.
     
       수년 전 교육방송의 장학퀴즈에서 이런 요지의 문답이 오고갔습니다.
      
       ♥질문:여순사건은 어느 지역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거부해서 일으킨 사건일까요?
      
       ♥학생들:대답 못함
      
       ♥사회자:여순사건은 제주도 4·3 항쟁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배워야겠습니다.
      
       방송국에선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여순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일으킨 반란인지, 사건의 성격이 무엇인지도 이야기하지 않은 대신에 제주도 공산폭동, 또는 제주도 폭동이라고 해야 할 것을 항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抗爭이란 일으킨 쪽이 正義이고 진압한 쪽이 不義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방송을 본,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학생들은 여순사건은 「제주도민의 의로운 항쟁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不義한 명령에 저항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붕괴시키려면 이런 시각을 확산시켜 국가의 정책으로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그런 다음 제주도 폭동과 여순반란 사건을 진압한 사람, 즉 애국세력을 찾아내 처벌하면 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자신의 건국과정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정통성을 포기하게 되고 정통성을 스스로 포기한 국가는 단체나 패거리, 또는 협회 수준으로 전락합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가 자살하는 길입니다.
      
       수년 전 서울의 유력 신문 사설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金鍾泌(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진보주의자가 장관이 되더니 6·25 때 왜 대항했느냐고 해서 우리가 경질토록 야단친 바 있다』고 한 발언에 대한 비판적 글입니다.
      
       <우리가 그들(편집자 注-그런 장관들과 같은 사람을 가리킴)을 용인하고 그들을 투표로 뽑아 정부를 구성토록 한 이상 그것이 좌(左)든 우(右)든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도 이제는 진보적인 색깔의 인사들이 정권을 잡아도 될 만큼 성숙하고 폭이 넓어졌다고 생각한다. 지금 와서 그런 낡은 색깔론에 불을 지펴 보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기도 하거니와(下略)>
      
       이 사설의 필자가 가리키는 진보란 전후 문맥으로 보아 親北左傾(친북좌경)으로 해석됩니다. 우리는 친북좌경 세력이라 자처한 사람들을 선거로 뽑아 정권을 맡긴 적은 없습니다. 지금 정권도 보수를 자처했지 좌파를 자처하진 않았습니다. 좌파를 자처한 정치세력이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잡았다면 「左든 右든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말이 다소 이해되지만 保守(보수)로 위장하여 정권을 잡은 뒤 좌경적인 정책을 펴고 그런 언동을 공공연히 한다면 국민을 속인 것이 됩니다. 당연히 중대사태가 되지요.
      
       여기서 정작 문제의 핵심은 친북 또는 좌파를 진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進步」가 애매하게 쓰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회주의 이념을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공산당의 전형적인 언어전술입니다. 물론 사기이지요. 역사발전의 운동법칙을 거슬러오르다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하고 있는 것이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념이니까요.
      
       대한민국을 파괴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守舊반동이라고 불러야 과학적이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의 체제파괴적인 행동을 격려·고무하는 것이 됩니다. 좌익을 진보라고 부르는 한 한국에선 영원히 이들의 행패를 저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을 진보라고 부르는 한 反共(반공)은 범죄가 되고 그들의 범법행위는 진보적 義擧(의거)가 될 것입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