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학살 진상 공개, 사죄, 재발방지책 세울때까지 운동 계속""신원 확인자 몇명 안돼...한국 정부는 '희생국민' 돕는 일에 왜 안나서나"
  • [관동 대지진-조선인 대학살]90년: 일본 시민운동가 니시자키 마사오 인터뷰

    "만삭의 임부 배 가른 일본 계엄군,
     태아 울자 난도질 강에 던졌다"


    "일본 정부가 학살 진상 공개-사죄-재발방지책 세울때까지 운동 계속"
    "신원 확인자 몇명 안돼...한국 정부가 [희생국민] 돕는 일에 왜 안나서나"


  • ▲ 아라가와 강 주변 골목에 세운 추모비와 니시자키 마사오씨.
    ▲ 아라가와 강 주변 골목에 세운 추모비와 니시자키 마사오씨.


    독일 나치의 유태인 학살보다
    20년 앞선 일본의 조선인 대학살!

    그 학살 수법도
    나치와 비교할 수 없이 잔인했던 일본은
    과연 [인종 청소]의 원조라 할만하다.

    꼭 90년전(1923) 9월 1일 오전 요코하마 부근에서
    대지진이 발발하자
    그날 밤부터 도쿄를 비롯한 관동(關東)지역 일대에서
    [조선인 사냥]을 개시했다.

    미리부터 기회를 노리며 준비했던 것일까?

    경찰이 지역마다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주민들이 [자경단](自警團)을 조직,
    군부대와 경찰과 합세하여,
    조선인들을 찾아내 날마다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일본 특유의 엽기적인
    [나부리 고로시 嬲殺:곧 죽이지않고 희롱하며 죽이는 것]
    까지 동원한
    국가적 만행으로 확인된 유해만 6,600여명,
    미확인까지 최소 2만여명이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제(日帝)의 제물이 되었다.


    “군인들이 만삭인 임부의 배를 갈랐다.
    뱃속 아이가 울자 아이마저 찔러 강에 던졌다”


    “아라가와 강변에 줄지어 세워놓고 기관총을 쏘아댔죠.
    나는 구덩이를 팠어요.
    얼마나 죽였던지...
    석유를 끼얹고 불태워 묻었는데...
    지금도 땅속에 많이 남아있을 겁니다.”


    “전깃줄로 생선 엮듯이 줄줄이 묶어 강에 차 넣더니
    총을 쏴대니 강물이 핏물 되어...”


    “총성이 심하자 칼로 죽이라 하니
    군인들이 달려들어
    300여명을 마구 찔러댔죠”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일본인들의 몸서리쳐지는 증언들이다.

    이 증언들을 모아
    <증언집: 바람에 봉선화를 날려 보내라>
    펴 낸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고
    일본인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 53세)씨다.

    중학교 영어교사이던 그는,
    우연히 [희생자 유골 발굴 모임]에 참여하면서
    [일본의 잔학상]에 큰 충격을 받아 교직을 그만두고
    [희생자 추모와 학살 진상조사] 활동에 몸을 던졌다. 


  • ▲ 아라가와 강변에서 추도식을 올리는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 회원들.
    ▲ 아라가와 강변에서 추도식을 올리는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 회원들.

    매년 9월 추모행사를 진행해온
    시민단체 <봉선화>의 이사인 그는,
    일본정부와 구청이
    추모비 건립 요청을 거절하자
    2009년
    [대학살의 강] 아라가와 근처에
    땅을 마련하여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행사 때는
    한국 노래 <봉선화>를 부른다.
    관동 학살지역에서는
    십여개 시민단체들이
    9월 한달내내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다.

    오는 7일 아라가와 강변에서 열리는
    [봉선화 모임]
    준비에 바쁜 니시자키 마사오씨와
    <뉴데일리>가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다.



    [뉴데일리- 니시자키 마사오 이메일 인터뷰]


    ◆ 관동대진재 때 조선인 학살의 현장은
    도쿄(東京) 시내에도 여러 곳인데,
    아라가와(荒川) 강가에 추도비를 세운 이유는?


  • ▲ 아라가와 강변에서 추도식을 올리는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 회원들.

    ⊙ 시작은 개인적인 인연이지만,
    아라가와 강둑의 학살이 가장 대규모이고,
    국가 권력의 전형인 계엄군에 의해
    자행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동경의 소학교 교원인 기누타 유기에(絹田幸惠)씨가
    수업의 일환으로
    아라가와(荒川) 방수로 공사의 내력을 현장조사 하고 있을 때,
    스미다구(黑田區) 야히로 지구에서
    “아라가와의 공사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거기서는 관동대진재 때 더욱 대단한 일이 있었다.
    많은 조선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관동대진재 때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을 발기했는데,
    나도 그때 함께 하게 되었지요.
    1982년의 일입니다.

    회가 결성되어 집중적으로 증언듣기 청문조사가 시작되자,
    그 지역의 나이 드신 많은 분들이
    조선인 학살의 현장을 목격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지진이 발생한 9월 1일 밤부터
    자경단(自警團:재향군인, 청년단등 일반주민으로 구성)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9월 2일, 3일이 되니까,
    이웃 치바(千葉)현에서
    나라시노(習志野) 기병연대의 병사들이 몰려와서,
    강둑에 기관총좌를 설치하고는
    하천부지에 조선일들을 묶어서 늘어 세워 놓고
    집단적으로 쏴 죽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임은
    여기에 추도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처음 모임의 발기로부터 25년이 지나서야
    부지 마련 등의 곡절을 거쳐
    2009년에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계엄군의 아라가와에서의 학살 장면을 몇가지 들려 준다면...

  • ▲ 관동대학살 당시 일본 자경단원들이 학살당한 조선인의 시체를 몽둥이로 건드리며 내려다보고 있다(사진 위). 자경단원은 칼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조선인을 수색했다(사진 가운데). 경찰이 압수한 자경단의 흉기. 이 칼과 창으로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다(사진 아래).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일본정부는 조선인 학살은 민간인들의 범행으로만 책임을 미루고 있다.
    ▲ 관동대학살 당시 일본 자경단원들이 학살당한 조선인의 시체를 몽둥이로 건드리며 내려다보고 있다(사진 위). 자경단원은 칼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조선인을 수색했다(사진 가운데). 경찰이 압수한 자경단의 흉기. 이 칼과 창으로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했다(사진 아래).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일본정부는 조선인 학살은 민간인들의 범행으로만 책임을 미루고 있다.

    ⊙ 용케도 남아있는 목격자 증언들이
    모든 것을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스미다(黑田)구 아라가와 방수로에서의 목격증언입니다.


    “아라가와(현 야히로 역)의 남쪽제방 위에,
    무더기로 끌어 온 조선인들을
    강을 향해 세워놓고

    군대가 기관총으로 쐈어요.
    총을 맞자 강둑 안쪽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굴러 떨어지지 않는 사람도 있었어요.
    얼마나 죽였을까.
    무지하게 많았어요.

    나는 구덩이를 파라 해서 팠어요.
    그런 다음 석유를 끼얹고,
    태워서 묻었습니다.

    그 후에 관(官)에서
    시체를
    한번 파 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 파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남아 있지 않을까요”



    다음은 카츠시카(葛飾)구 오토바시에서의 증언입니다.

    “오토바시에서 5~6인 조선인을 붙잡아서
    다리위 경비 건물에
    엮어서 집어 넣어 놨어요.

    청년회 간부들이
    조선인을 잡아서는 전부 집어 넣어 버렸어요....

    밤을 새워 아침이 되어,
    계엄령이 내려지자,

    조선인들을 다리위에서 살해해 버렸어요.
    착검을 해가지고요.

    누가 죽였겠어요?
    고꾸부다이(国府臺 , 사단주둔지)의 군대들…”



    다음은 북구(北区) 아까바네에서의 목격증언입니다.


    “내 처제는
    아까바네에서 조선인 부부 두 가족과 한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아무데도 안가고,
    집에 있었는데,
    3일쯤 헌병과 제복의 순사가 와서 데리고 갔는데,
    뒤에서 따라갔더니,
    아까바네의 강둑위에
    네 사람을 세워 놓고,
    헌병이 칼로 네 사람의 머리를 잘라내서는
    강속에 쳐 넣어 던져 버렸습니다.”



    다음은 고토(江東)구 카메이도(龜戶)에서의 증언입니다.

    카메이도 경찰서에서 일하고 있는
    라마루야마(羅丸山)가 목격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86명의 조선인이
    총과 칼로 베고 살해당하는 것을
    이 눈으로 보았다.

    9월2일 밤부터 9월3일 오전까지
    카메이도 경찰서 연무장에 수용된 조선인은
    300여명이었다.
    그날 오후 1시경 기병 1개중대가 닥쳐와서는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
    타무라(田村)라는 소위의 지휘하에
    군인들이 모두 연무장에 쏟아져 들어와서는,

    세사람씩 불러내어
    연무장 입구에서 총살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 지휘자는
    총성이 들리면 부근의 사람들이 공포를 느낄테니까,

    [총 대신에 칼로 죽여버려!] 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일제히 칼을 빼어
    83명 모두를 함께 살해해 버렸다.


    이때,
    임신한 여자도 한사람 있었다.

    그 부인의 배를 갈랐는데,
    배속에서 아기가 드러나
    응아하고 우니까,

    그 아기까지 찔러 죽여 버렸고
    강물에 던졌다.

    살해된 사람들의 시체는
    다음날 새벽2시,
    트럭에 실어 어딘가로 싣고 가버렸다.

    그밖의 사람들도
    모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학살된 사람들의 성명과 본적은 전부를 알 수는 없었다.
    단지 몇 사람것만 알 수 있었는데,

    박경득(朴庚得 24) 경기도 개성군 장단면 구하리,
    김재근(金在根 44) 전남 순창군 풍산면 연승리,
    조묘성(趙妙城) 제주도 대정면 인성리(임신하고 있던 여인),
    조정수(趙正洙) 주소 위와 같음.
    조정하(趙正夏) 주소 위와 같음.




    마지막으로 고토(江東)구의 오나기가와(小名木川)서의 목격증언입니다.


    “3일은 아침 8시경부터,
    아버지와 함께 오시마(大島) 하마(浜)거리부터 형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루하치바시(丸八橋)까지 1, 2분 정도에 왔더니,
    빠빠빠빠빵, 타타타탕...하는 소리가 났어요.
    놀라서 가 보았더니,
    다리 저쪽에 군대가 20명 정도,

    [차렷!] [우향후]하며 정렬하여
    총을 메고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 다리의 오른쪽에 10명,
    왼쪽에도 10명씩 전선으로 묶여진...

    구리줄이니까 부드러워서 묶었던 것이죠.
    손을 뒤로 묶어서는 강 속에 차서 넣고서는,
    그들을 향해 총격을 끝낸 참이었어요.
    새빨간 피덩이들이 풀리지 않고 강물에 둥둥 떠있는 것입니다.

    오른쪽 먼저 쐈던가 봐요,
    그쪽은 피빛도 풀려 흐려져 있었습니다.

    [뭔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참혹할 수가...]
    숨을 삼켰습니다.

    강변의 북쪽으로 쳐 넣고
    남쪽에서 쏘았던 것입니다.


    오나기(小名木) 내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신카이바시(進開橋)입니다.
    그 조금 앞에,
    40~50미터,
    기껏해야 100미터 쯤 떨어진 곳에도 총살 시체들,

    10명 쯤 보았습니다.
    그건 벌써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았어요.

    피 같은 것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요.
    여기서 해치우고,
    마루하치바시(丸八橋)로 왔던 것이겠죠.

    그러나 이 부근은 (지진으로) 전연 불타지 않았던 곳이었는데요.
    강물에 떠있는 시체들은 전부 조선사람 뿐이었습니다.“




    ◆ 대학생 때 [유골 발굴-조사] 운동에 나섰다고 들었는데,  
    처음 [학살] 이야기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 ▲ 현재의 아라가와 강변 모습. 이 땅 속에 무참히 학살된 한국인들 유해가 지금도 묻혀있다.
    ▲ 현재의 아라가와 강변 모습. 이 땅 속에 무참히 학살된 한국인들 유해가 지금도 묻혀있다.

    ⊙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서는,
    학교 수업에서 배운 바 있어 알고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2년 대학4학년 때
    “살해된 조선인 유골이
    지금도 아라가와 하천부지에 묻힌 채로 있다
    "고 들었을 때,
    나 자신이 중학생 때 축구를 하며 놀던 그 하천부지가,
    그 같은 비참한 현장임을 처음으로 알고서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먼 역사의 한 콤마가 아니라,
    자신이 태어나 자란 지역의 구체적 역사,
     그 자체라는 실감,
    그것입니다.
    그때 이래 그 충격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 교사직을 그만두고 [추도-조사] 운동에 몸을 던지게 되는 계기는?

    ⊙ 교직을 그만둔 것은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부친의 유전으로 20대부터 생긴 녹내장 눈병이 악화되었지요.
    물론 확고하게 오래동안 마음에 두었던
    [추도비를 건립해야 한다]라는 구체적 과제가 눈앞에 있어,
    그것에 전념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운동]에 대해 이른바 우익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것에 대한 대책은?

  • ▲ 도쿄 신주쿠에서 '혐한데모'를 벌이는 일본인들.
    ▲ 도쿄 신주쿠에서 '혐한데모'를 벌이는 일본인들.

    ⊙ 예전과 달리 지금의 시점에서는
    추도비에 해꼬지를 한다든지,
    나쁜 장난을 하는 일은 이제 없습니다.
    이건 나 혼자가 아니고,
    주민들이 함께 비를 지켜주는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새 한달 정도,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와서 추도비 주변의 잡초를 뽑거나,
    주변의 자갈을 씻어서 깨끗하게 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위험한 풍조는 지금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공격이 있어도
    나는 사실로서 대항할 뿐입니다.
    내 자신이
    30년 전에 지역 어르신들로부터 직접 들은 목격담을
     우익들과 함께 계속 얘기하는 것이 대책이라고 할까요.

     


    ◆ 한-일 양국민의 우호선린을 위해 지금 당장 손써야 할 것은?

    ⊙ 전후의 역사 속에서,
    일본정부는
    전쟁책임이나 식민지지배의 책임을 십분 반성하지 않고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종군위안부] [강제연행] 등에 대한 일본정부의 자세를 보아도
    명백하게 불충분합니다.
    사실을 감추고서 진상을 왜곡하고 있어요.

    그 같은 정부의 자세가
    일본사회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증오를 조장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역으로 말하면,
    올바른 역사인식을 일본사회에 계속 호소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은 그 한걸음으로써,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사건의 진상을
    일본사회에 계속 호소-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 ▲ 일본 우익들의 '혐한 데모' 구호도 가지가지. '조선반도에 돌아가' '조선인을 죽여라' '강간하라' 등등.(SBS TV화면)
    ▲ 일본 우익들의 '혐한 데모' 구호도 가지가지. '조선반도에 돌아가' '조선인을 죽여라' '강간하라' 등등.(SBS TV화면)


    ◆ 언제까지 [추도-조사]를 계속하는가?

    ⊙ 함께 활동하고 있는
    재일(在日)2세의 여성은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 모임의 활동에 참가하고 있는 것은,
    나의 아이나 손자가 살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많은 재일 코리안이
    일상적으로 불안을 안고서 생활하고 있어요.
    그건 신오꾸보(新大久保: 동경 시내 신주꾸 인근) 등에서 벌어지고 있는
    [혐한(嫌韓)데모]를 보지 않아도 명백합니다.

    일본사회가
    그 같은 불안이 없는 다문화공생(共生) 사회가 될 때 까지,
    우리들은 활동을 계속합니다.

    ◆ 일본정부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가 
    [신주꾸(新宿)의 배외주의 데모] 현상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나?

    ⊙ 일본정부가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에 사죄하고
    희생자의 조사를 행하고,
    재발 방지책을 세울 때까지,
    배외주의(排外主義) 데모와 같은 현상은
    개선되지 않을 것입니다.

    2010년에 발족한
    [관동대진재 조선인 학살의 국가책임을 묻는 모임]에서는
    지금 일본정부에 제출할 서명을 모으고 있습니다.
    관동대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에 관해
    일본 정부가
    진상을 밝히고,
    희생자의 실태조사를 행하고,
    조사결과를 공개하고
    자료를 영구 보존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나도 이 모임의 일원으로서 진력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도 한마디 한다면...


  • ▲ '조선인 대학살' 진상 조사와 희생자 추도 캠페인에 전념하는 니시자키씨의 강의 모습.
    ▲ '조선인 대학살' 진상 조사와 희생자 추도 캠페인에 전념하는 니시자키씨의 강의 모습.

    ⊙  나 자신은
    한국 정부에 대해
    발언할 입장에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한 가지만
    얘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난 6월에
    한국의 국회 의원회관에 가서
    지금까지의 [책임을 묻는 모임]의
    경과를 보고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홍동선 씨와 만났습니다.
    그는 이런 사연을 말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유골을 찾아달라.
    할아버지는 관동대진재 때 동경에 유학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신 중이므로 고향에 남았다.
    관동대진재 후에 할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끝내 돌아가실 때까지 남편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어떻게든 남편의 유골을 찾아내어 나와 같은 무덤에 묻어주기 바란다.“

    그후 나는
    늘 할아버지의 유골의 행방을 찾고 있으나,

    오늘까지 도대체 아무 단서도 없다.
    어떻게 좀 함께 찾아 주었으면 좋겠다”


    이 같은 유족의 소리를 들어서
    힘이 되어 주는 것이
    한국 정부의 일이 아닐까 생각 됩니다.

     

  • ▲ '조선인 대학살' 진상 조사와 희생자 추도 캠페인에 전념하는 니시자키씨의 강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