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사](秘史)

    미국(美國)으로 이주한

    642명의 [나치(Nazi) 과학자들]

    폰 브라운 박사와 <페이퍼클립 작전>

    金泌材     


         


  •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군이 독일을 점령했을 때,
    이들은 나치가 완성 직전에 있었던 전쟁 무기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뉴욕을 공격하기 위한 잠수함 발사용 로켓-대공 미사일-가변익 제트 항공기-대륙간 탄도 미사일-생화학 무기 등, 당시 독일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보다 수십 년은 더 앞선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이 조금만 더 많은 자금과 시간이 있었다면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기술들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독일의 과학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작전을 감행하는데
    이것이 바로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 1945~1946)이었다.

    <페이퍼클립>이라는 작전명은 미국으로 이송될 나치 과학자 및 정보기관 출신 인사들의 서류를 페이퍼클립으로 표시해놓은 데서 유래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러시아보다 한 발 앞서 독일의 쓸모 있는 과학 기술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물론 인적 자원까지 포함됐다.


    총 642명의 나치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이주


    <페이퍼클립 작전>이 모집한 독일 과학자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폰 브라운 박사다.
    폰 브라운은 미국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그는 미국으로 오기 전에는 독일의 V-2로켓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폰 브라운은 1937~1945년까지
    독일의 악명 높은 피네문데의 로켓 연구센터의 기술 감독으로 일했다.
    이곳에서 폰 브라운은 대공미사일과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했으며,
    A-4로켓(V-2 로켓의 원형)을 개발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 NASA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페이퍼클립 작전>이 진행되면서
    [외국 기술자와 전문가] 642명이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이 가운데 폰 브라운이 데리고 온 로켓 기술자 132명은 단일 그룹으로 최대 규모였다(실제 인원은 이 보다 더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음).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미국에 이송된 과학자의 상당수는 친(親)나치주의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더 루돌프(Arthur Louis Hugo Rudolph)로,
    그는 새턴 로켓 팀의 또 다른 주축 멤버였다.

    그러나 그는 2차 대전 기간 내내 노예 노동으로 악명 높았던 수용소 내 공장 감독을 맡았던 인물로 당시 공장 일꾼으로 동원된 노예들은 굶주림과 고문에 시달렸고 지나친 노동으로 과로사하는 일이 허다했다.

    미국은 초기 평가에서 루돌프를 [100퍼센트 나치주의자]라 평가했고, 그를 억류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루돌프는 1984년 자신의 과거가 폭로되자 서독으로 망명해 1996년 1월 1일 함부르크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페이퍼클립 작전>에는 나치의 악명 높은 생체 실험에 참여했던 과학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례로 쿠르트 블룸은 강제 수용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유행병 백신을 실험했으며,
    몸이 아픈 죄수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블룸은 전후 미국으로 건너와 미 육군 화학전단에서 일했다.

    이와 함께 강제 수용소 죄수들을 대상으로 실행된 인체 실험을 감독하고 지휘했던 왈터 슈라이버 소장은 미 공군 의과대학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는 1952년 자신의 과거가 폭로되자 미국을 빠져나가 나치에 우호적인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독일의 핵폭탄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과학기술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는 나치의 핵 개발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2005년 3월 14일 독일의 슈피겔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최초로 원자탄을 개발했고 초보적인 원자탄 실험을 세 차례나 했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라니어 칼쉬(Rainer Karlsch)박사에 관해 보도했다.

     



  • 그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6명의 미래 노벨상 수상자들을 포함해 12만 5천명의 인원이 동원되고 프랑크푸르트시 넓이의 우라늄 농축 플랜트를 갖춘 보안구역에서 300억불 상당의 비용을 투입된 것에 비해 나치는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과 소수의 과학자들을 통해 원자탄을 개발했다”는 지론을 폈다.

    <히틀러의 폭탄>(Hitler`s Bombe)이라는 책을 저술한 칼쉬 박사는 과거 나치 과학자들과 군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1944년 독일 동북부 끝자락에 위치한 류겐섬에서 첫 원자탄 실험이 시행됐고 1945년 3월 투링기아(독일 동부 소재)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실험을 했으며 이 과정에서 7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기술했다.

    칼쉬 박사는 또 투링기아 주민들을 상대로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이 지역에서 소형의 원자탄 실험을 자행했음을 밝혔다.
    그는 당시 주민들이 투링기아 소재의 나치 친위대(SS)가 비밀리에 이 곳에 두개의 완벽하게 제조된 원자탄을 보관하고 있었고, 그 폭탄들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됐음을 주장했다고 밝혔다.(2007년 5월20일자 보도)

    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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