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도처에 청산은 있는데, 선운사는 왜?

    이법철 /대불총 지도법사

  •   Ⅰ. 序 論: 선운사의 다례제(茶禮齊)

      고창 선운사(禪雲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에서는 매년 음력 2월 29일에는 茶禮齊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떠난 스승, 조사스님들의 부도전에서 합동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선운사는 물론 선운사 외 각 지역에 거주하는 문도(門徒) 승려들은 대부분 이날에 선운사 다례제에 참석한다. 필자 역시 선운사에서 출가위승(出家爲僧)하였기에 해마다 참석해온다.

    필자처럼 멀리 사는 승려들은 茶禮齊 전날에 선운사 가까운 곳에 도착해 있는데, 필자는 거의 정읍시(井邑市)에서 내장산 벽련암에 주석하는 시인 이대우(李大愚)스님을 만나 밀린 담화를 나누며 밤을 새우고 함께 익일 일찍 선운사를 찾는다.

      다례제는 오래전에 선운사의 전통으로 지내왔는데, 선운사 문도회에서는 근세의 고승인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 조사(祖師)스님의 제사일을 기준하여 먼저 선운사 대웅전에서 제사를 모시고, 이어 부도전에서 합동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석전(石顚) 朴漢永스님은 1870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박한영은 독실한 불자인 어머니가 위봉사(威鳳寺)에서 생사법문(生死法門)을 듣고 집에와서 전해주었는데, 큰 감명을 받아 출가를 결심하였다. 19세에 전주 태조암(太祖庵)으로 출가하여 금산(錦山)의 제자가 되었고, 21세에 백양사의 환응(幻應)에게 4교(四敎)를 배웠다. 이후 선암사의 경운(敬雲)에게 대교(大敎)를 전수 받았으며, 구암사(龜巖寺)에서 처명(處明)의 법(法)을 이어 받았다.

      1914년에는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1916년에는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의 강사가 되었으며, 1926년에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開運寺)에 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의 영재들을 배출하였다. 1929년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불교계를 지도하였고, 1931년에는 불교전문학교[동국대학교 전신]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8·15해방 이후 조선불교중앙총무위원회 제1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다가 1948년 2월 정읍시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박한영스님에게 교학을 전수받은 제자 가운데는 청담대종사를 위시한 기라성같은 승려제자와 시인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등 제자가 있었다.
    필자의 은사인 裵雲起스님은 박한영스님이 가장 아끼는 전강제자(傳講弟子)였고, 필자는 박한영조사님의 손자 상좌인 셈이다.

      부도전에서 합동제사를 시작하기 전 나와 이대우스님은 부도전을 살펴보는데, 이대우스님이 추연(惆然)한 얼굴 음색으로 “우리가 마지막 다례제에 참석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꺼내서 필자 또한 슬퍼지면서 긍정의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은 물론 사형들이 거의 유명(幽明)을 달리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한한 생명이 영원히 다례제를 모실 수는 없지 않은가.

  •   Ⅱ. 전생에도 승려가 되었을 선운사 도량

      선운사는 도솔천을 의미하는 도솔산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수행, 전법도량의 백제시대의 고찰이다. 불교인은 이세상 모든 인간의 인연결과의 행․불행(幸, 不幸)은 전지전능한 신이 결정하여 주는 것이 아닌 인간 스스로 인연작복(因緣作福)에 의해 결과를 얻는 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전생에 지은 인연법에 의해 60년대 중반 선운사에서 행자 생활을 했고, 선운사 대웅보전에서 당시 선운사 주지인 운기(雲起)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아 승려가 되었다.

      필자의 소싯적에는 눈만 뜨면 도량청소, 법당청소, 석유 그을음에 까맣게 된 장명등 유리를 깨끗이 닦고, 석유를 부어 불을 붙이고, 불을 끄고, 새벽 도량석과 조석 예불을 하면서 말단으로 사찰 심부름에 정신이 없어 경서(經書)를 볼 수가 없었다.

    특히 당시 선운사 밑에는 선운여관이라는 작은 재래식 집의 여관 외에는 숙식 시설이 전무했다. 따라서 선운사를 찾는 관광객은 사찰에서 숙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깨달음의 경서 보다는 관광객의 밥상을 나르는 것이 업(業)같은 환경에 어느 날 이대우스님은 “진리의 생활이 아니다.”
    분격하여 밥상을 내동이치고 선운사를 떠나갔다.

      어느 날, 은사인 운기스님은 필자를 조용히 불러 “붉은 사상가가 되지 말라”고 엄명했다. 상좌 가운데 한 명이 부처보다는 공산주의자가 되어 북한 길일성을 찾아 떠났다는 것이다.

    한국전 때 선운사가 있는 도솔산에는 좌우익의 총격전이 치열했고, 상호 학살극이 잔인했던 곳이었다. 훗날, 필자는 운기스님의 걱정과는 달리 공산주의자가 아닌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승려로 변신하였다.

      필자가 처음 선운사를 찾았을 때, 목화송이 같은 눈이 내리는 겨울날이었다.
    상기도 기억이 뚜렷한 것은 눈발 속에 들려오는 목탁조(木鐸鳥)소리이다.
    독자 여러분, 속세를 떠나는 청소년이 눈속에 들려오는 목탁조 소리를 들으며 선운사 산문을 두두리는 것을 상상해보시라. 노승이 되어 인연법을 깨달으니 선운사를 찾은 것도 모두 전쟁에 지은 인연의 결과요, 일장춘몽(一場春夢)이었다.

      Ⅲ. 선운사 주지 호명(浩明)스님의 비극 

      필자가 처음 불문에 귀의했을 때, 호남의 고찰들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출가자들이 부지기수로 함께 있었다.

    첫째, 나같이 인민군과 붉은 완장의 토착 빨갱이들에게 부모와 친척이 죽창 등으로 무참히 살해 당한 사람들의 후예이고,

    둘째, 제주 ‘4,3 반란’과 여순 반란사건, ‘6,25 전쟁 때 붉은 완장을 차고 지주 등을 살해 하다가 군경에 토벌된 토착 빨갱이들의 후예들이 있었다.

    당시 불가(佛家)는 비통과 원한에 차있는 좌우의 후예인 우리들을 자비로 받아 주고, 숙식은 몰론 불교교육을 시키면서 재능에 따라 승가대, 동국대, 일본 불교대 까지의 공부할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불가는 우리에게 좌우익의 정치를 잊고, 불교중흥을 이룰 수 있는 인재가 되라는 뜻에서 공부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내가 선운사에서 행자 생활을 마치고, 沙彌戒(사미계)를 받은 후의 일이다.
    오래전에 고인이 되셨지만, 향엄(香嚴) 노스님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솔산의 참극을 은밀히 들려주었다.

  • 첫째, 선운사 뒷산 골짜기 내원골(內院谷)에서 1백여명의 남녀노소들이 인민군의 총과 토착 빨갱이들의 죽창 등으로 강제 끌려와 집단 학살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토착 빨갱이들에 의해 자비무적(慈悲無敵)이라는 논평을 듣는 노스님인 선운사 주지 호명(浩明)스님을 토착 빨갱이들이 개끌듯 하여 ‘희애재’라는 골짜기의 나무에 결박하여 낫으로 열두 토막으로 살해했다는 증언이었다.

      필자는 선운사 부도전에서 호명노스님의 비석을 찾았다.
    작은 비석에는 이렇게 비문이 쓰여 있었다. <禪師의 法名은 佳誠이요, 俗姓은 陳氏茂長人이다.(중략)…. 庚寅年에 六二五動亂을 逢着하여 火坑중에 全燒당할 禪雲寺를 換身救出하시고 壬辰九月 二十七日 世緣己盡 하시여 入寂하시니 法臘七十三이요 世歲 八十六이러라> 비문에는 상좌 향엄스님은 빨갱이들이 86세의 浩明노스님을 열두 토막 내어 죽인 것을 적지 않았지만, 선운사를 위해 운명을 달리했다고 새겨져 있었다.

      선운사에는 호명노스님의 학살이 역사가 엄연한데도 젊은 승려들 가운데는 불교계의 가장 큰 좌파단체인 ‘실천승가회’ 간부가 있었다.
    도대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을 왜 저주하는 것인가?
    북한처럼 대한민국의 모든 사찰이 국유화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진짜 수도승이 단 한명이 없는 북한 불교계같은 세상을 대한민국에 열기 위한 김일성 왕조의 혁명전사들인가?

      Ⅳ. 북한불교를 망친 붉은 승려들이 한국에 등장했다

      북한정권은 한반도에 김일성왕조를 세우는 혁명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베트남의 호치민 전술전략을 원용하기로 했다.

    첫째, 종교계를 이용하여 반미(反美)운동과 반(反)대한민국 운동을 일으키고, 중북운동을 확산하는 것이다. 월남에서처럼 승려, 신부, 목사 등이 반정부 운동을 벌이고, 미군철수 운동을 벌이도록 공작을 시작한 것이다.

      종북좌파 종교인들은 자신이 소속된 종교계에 진지(陣地)를 확보하여 투쟁하는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 종북좌파들이 합창하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을 외치면서 대한민국에 맹렬히 도끼질을 해대도 정부는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속수무책이다.

      최초로 모택동을 인터뷰한 책 ‘중국의 붉은 별’ 저자의 아내인 ‘님 웨일즈’의 명저(名著) ‘아리랑’을 보면,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의 승려인 김산(金山: 본명 장지락(張志樂)은 사찰에서 승복을  입었으나, 내심은 종교를 부정하는 붉은 전사였듯이,
    해방직전 직후 부지기수의 승려들이 생계(生計)가 어려워 임시 사찰에 시줏밥을 먹으면서 불경 보다는 공산당이론을 암송하여 오다가 때가 되니 부처 보다는 김일성을 추종하였다.

      북한의 붉은 승려들이 김일성에 충성하여 앞장 서 진짜 불교승려들을 인민재판에 세워 학살하고, 교화소 등에서 염불보다는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암송하다가 죽게 하고, 사찰은 모두 국유화 해버리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 붉은 승려들 음모에 의해 북한불교는 전멸했다.

    그 붉은 승려들을 이용하는 대남공작이 한국불교계에 등장하여 노골적으로 불교와 나라를 망쳐도 불교 내부에서 자정(自淨)할 능력은 전무하다시피 한다.

      종북불교가 대세라고 생각하는 듯한 한국불교, 대한민국 수호의 호국불교를 외치고 주장하는 승려와 단체는 필자와 대불총(大佛總: 회장 박희도장군)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와 무관히 시줏돈만 챙기는 자들은 정치를 초월했을까?
    북한 정치탓에 숙청되고 모든 사찰은 국유화 된 것은 어찌 보는 것인가?
    종북불교가 대세라고 생각하는 사부대중이 늘어날 때,
    한국불교는 3∼4위의 한국종교로 전락하고 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Ⅴ. 結 論: 계엄령이 아닌 한 종북 좌파를 척결할 수 없는 불교계

      종북좌파 승려들은 이제 자신의 진면목을 숨기지 않고 정부와 세상을 향해 당당히 외친다.
    ”대한민국은 나의 부모를 죽였다! 대한민국의 멸망을 위해 최후까지 싸우겠다!“

    예컨대, 제주 4,3 사태 때 대한민국 군경을 향해 죽창과 충을 발사하여 살해하던 빨치산의 아들이 승복을 입고, 제주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벌이면서, 자신은 이제 제2 ‘4,3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정부와 국민을 향해 사납게 외쳐도 불교계와 정부와 사회는 소 먼 산 보듯 할 뿐이다.

      오늘의 불교인들은 예측해야 한다. 대한민국 내에 종북 좌파 승려들이 전성기를 이룰 수록 북한의 붉은 승려들이 북한의 모든 사찰을 국유화 하는데 앞장 서고, 진짜 수도승들은 파멸시켰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대한민국 내 불교를 망친다는, 분석과 전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일평생을 불경(佛經)과 선교(禪敎)의 서책을 불립문자(不立文字)사상으로 멀리하고, 겨우 염불이나 몇 가지 외워 생계대책으로 삼고, 오직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외워 실천하는 승려들이 한국불교를 장악할 때, 한국불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예측, 우려(憂慮) 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도 민심에 의해 존중받는 승려의 상은 서산,사명대사의 호국사상(護國思想)이다. 왜?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바쳐 희생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종북좌파 승려들이 조직화 하여 한국불교의 간판과 표상이 되는 작금의 불교계에 대해 내부의 자정 능력 없음을 거듭 통탄, 개탄한다.

    끝으로, 필자는, 제행무상으로 은사스님과 사형들이 다례제에 볼 수 없듯이, 이제는 필자의 차례로 선운사 다례제에 참석치 않는, 홀로 은둔의 길을 걸어야 할 것같다. 도처(到處)에 청산(靑山)이 있는데, 굳이 출가본사에서 입적하고, 화장(火葬)할 필요가 있을까?

    필자는 선운사에서 출가위승한 지 50년이 흘렀지만, 무너져가는 선운사 말사조차 주지노릇을 한 적은 없다. 오직 가난한 비구승으로, 서산.사명대사의 호국정신으로, 불교를 존재하게 하는 국민에게 진실로 감사하며, 대한민국을 뜨겁게 사랑하다가 “도처청산(到處靑山”을 말하면서 사라질 뿐이다. ◇

      李法徹(bubchul.kr/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