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계의 최대 현안 

    사교육 대책이 아니라 자율성과 전문성 확보다.

    최성재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헌법 31조 4항)

    지난 25년간 교육계만큼 정책이 많이 바뀐 분야도 없다. 그 사이 헌법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건만, 다섯 정권이 하나같이, 무슨 개그콘서트도 아니고, 5년도 못 갈 정책을 100년지대계라며 어지러이 정책을 바꾸었다. 문득 세종대왕의 촌철살인이 생각난다. 그는 고려공사삼일식 개혁을 위한 개혁보다 민심의 안정과 정책의 예측가능성을 중시했다.

    자고로 새로 벼슬에 오른 선비는 어지러이 고치는 것을 좋아해서 기존의 법을 변경하여 요란하게 하는 자가 자못 많다. (세종실록 10년 9월 25일)

      29세의 세종대왕이 영의정 이직(李稷)의 사직을 물리치면서 한 마디로 그의 입을 닫게 만든 일화도 생각난다. 이직은 3남 충녕대군(세종)의 세자책봉에 반대하다가 귀양까지 갔던 사람이었음에도 그에 대한 세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다.

    바삐 뛰어다니고 체력을 써야 하는 일이라면 나이 젊은 사람을 임용하는 것이 옳지만, 앉아서 도리를 논하는 일이라면 경(卿)을 버리고 누가 있겠소! (세종실록 7년 12월 10일)

     
    노태우 정부를 제외하고, 나머지 네 정권은 좌우 이념을 떠나 어쩌면 그렇게 똑같이 조선의 책상물림 신진 관료처럼 독선과 무지를 정의와 진리라 확신하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에 도취하여 스스로 무슨 짓을 벌이는지도 모르고 헌법의 지상명령을 아예 무시하고 교육정책을 어지러이 바꿨다. 교육에 대한 헌법의 지상명령은 무엇인가. 그것은 헌법 31조 4항에 명시된 대로 교육의 자율성과 전문성이다. 김영삼 정부 이래로 교육의 자율성과 전문성은 박물관의 창고에 처박혔다.

     
    헌법의 지상명령 대신 5년 단임 정권이 내세운 대원칙은 사교육 근절이란 신기루 목표를 향하여 공사립을 막론하고 초중고와 대학의 공교육을 ‘앞으로 나란히’시키는 것이었다. 결과는? 백전백패였다. 자율성 대신 타율성, 전문성 대신 획일성이 낳은 필연적 결과였다. 1인당 사교육은 계속 증가하기만 했고 공교육은 더욱 부실해졌다. 대졸의 절반은 예전의 고졸 실력도 안 된다. 그럼에도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고해성사하는 자도 한 명 없다. 예산배정의 당근과, 감사(監査)의 채찍으로 권리 없는 의무만 강요하던 교육 독재자들이 정권만 바뀌면 ‘나 몰라라’하고 그냥 증발해 버렸다.

      지난 20년간 5년 단임 정부들은 헌법의 지상명령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교육의 도리(교육철학)를 논하는 원로도 모시지 않았다. 권력에 아첨하는 자들에게 십상시의 권력을 쥐어주었다. 정치권만 아니라 교육계와 언론계도 교육의 도리를 논하는 원로(교육 전문가)는 배제했다. 사교육 근절이 입법 취지가 될 수 없고 교육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정치권만 아니라 교육계와 언론계 누구도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주호는 5년간 교육정책을 주도하면서 EBS 교재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70% 출제한다며 이전과 달리 실지로 그렇게 실천했다. 그렇게 하면 사교육이 근절되지는 않을지라도 사교육이 절감된다며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였다. 교과서도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 거의 대부분 검인정으로 바뀐 지가 언젠데, 교과서도 아닌 정부가 지정하는 일개 졸속 참고서에서 70%를 출제한 것이다. 자율성과 전문성을 이보다 심각하게 침해한 정책도 없다. 히틀러 정권도, 스탈린 정권도, 심지어 김일성 정권도 이렇게 불학무식하게 교육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침해한 적이 없다. 시장경제를 입에 달고 다니던 자가 의료와 더불어 교육이 21세기의 최고의 서비스업으로 부상하고 있건만(한국은 교육에서 연간 약 70억 달러 적자), 교육 시장을 그렇게 파괴할 수가 없다. 더 놀라운 것은 교육계와 언론계의 침묵이다. 사교육 절감이란 말만 나오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결국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아들 군대 안 보낸 것도 10년간 물고 늘어지는 진돗개 국민성이 일제히 실종되었다. 글자 한 자에 목숨을 거는 전문가의 전문가 집단을 자처하는 교수들이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출제위원이 되면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정부와 5년 내내 대립각을 세운 전교조마저 침묵을 지켰다. 자기의 아들딸에게 초등학교부터 EBS 교재 사 주거나 얻어 주기 바빴다. 사사건건 맞서는 조중동과 한경오(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도 일제히 침묵을 지켰다.

      6공화국 헌법과 더불어 민주화 열풍이 불었다. 정치 민주화가 제일 앞섰고 경제 민주화가 뒤따랐다. 경제 민주화는 노조 설립과 공기업의 민영화가 핵심이었다. 교육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헌법에 명시된 정치적 중립성을 무시한 전교조 설립이 교육 민주화의 알파와 오메가로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을 부끄러워하는 친북좌파 이념이 교육계에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따른 전교조의 불법은 노태우 정부에서는 지켜졌다. 교육의 자율성과 전문성은 교육부가 입시(入試)부가 되는 한 지켜질 수 없다고 보고, 노태우 정부는 시대에 맞춰 대학에 학생 선발권을 돌려주었다. 신설된 수능만 봐도 좋지만, 대학이 원한다면 본고사를 봐도 좋다고 한 걸음 물러섰다. 대학의 자율성이 크게 신장되고 대학의 전문성이 크게 존중된 것이다. 대학생의 과외금지도 해제되었다. 재학생의 학원수강도 다시 허용되었다. 그것은 국민의 교육 기본권을 침해하는, 멀쩡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는 악법으로 폐기되는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이것이 김영삼 정부부터 대부분 뒤집어진다.

      공교육이 공기업이라면 사교육은 사기업(私企業)이다. 공기업의 민영화는 대세였지만, 교육은 거꾸로 갔다. 공교육도 엄밀히 따지면 국공립만 공교육이다. 사립은 일반 기업처럼 일단 모든 요건을 갖추어 허가가 났으면 학생 선발이나 교과과정 편성이나 등록금 책정이나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 외국에선 선진국 후진국 없이 다들 그렇게 한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교직원 선발권 외에는 자율성이 거의 없다. 교사와 교수의 전문성은 조변석개하는 교육부의 입시정책에 따라 춤을 춘다. 교육부의 일개 과장이 대통령보다 높아야 할 대학총장보다 높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사교육마저 정부가 장악했다. 일개 사교육 기관인 EBS가 전국의 출판사를 초토화시킨 것이다. 학원의 교재도 EBS 교재로 통일되었다.

      선행학습 금지니, 중1 진로탐색이니, 하며 교육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무시하는 박근혜 정부도 교육정책은 매우 걱정된다. 교육에 관한 한, 주변에 도리를 논할 세종조의 이직 같은 원로가 전혀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