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 추모식 31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 ▲ 성재 이동휘 선생.[사진: 보훈처 블로그]
    ▲ 성재 이동휘 선생.[사진: 보훈처 블로그]

    “나 자신조차도 공산주의가 뭔지도 아무 것도 몰랐다.”


    고려공산당을 세우다시피 한 성재 이동휘의 고백이다.

    이동휘 선생은 ‘민족 독립’을 명분으로 공산주의자들과 얽혔다가 사라진 독립운동가의 전형이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성재 이동휘 선생 78주기 추모식’을 오는 31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사)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회장 류준형) 주관으로 연다고 밝혔다.

    이동휘 선생은 187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났다.

    1899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를 졸업한 뒤 1902년부터 강화도 진위대장(進衛隊長)으로 활동했다.

    1906년 군에서 나와 강화도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결성하는 등 문화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08년 서북학회를 창립하고,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황해도 무의도로 유배됐다.

    1912년 유배지를 탈출, 북간도로 망명하여 국자가(局子街) 소영자(小營子)에서 김립․계봉우 등과 광성학교(光成學校)를 설립했다.

    1913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新韓村)을 중심으로 조직된 권업회(權業會)에 가담해 이상설, 이갑,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민족해방투쟁 활동을 벌였다.

    1914년에는 중국 왕청현(汪淸縣) 라자우거의 한인촌으로 거점을 옮겨 대전무관학교(大甸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문창범(文昌範)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1919년 8월 말에는 중국 상하이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및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1920년 말에는 간도 독립군이 일본군에 쫓겨 시베리아로 퇴각할 때는 1만 원의 긴급구호금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임시정부 국무총리가 된 뒤 변했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확장하고자 1920년 봄부터 공산주의와 손을 잡았다.
    당시 그는 대미외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이승만 박사의 노선에 반발했다고 한다.

    1921년에는 자신이 이끌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으로 개칭하고 소련의 레닌과 손을 잡았다.

    이때 국무총리로 재임하면서 소련의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원조를 받았고, 그 중 40만 루블을 고려공산당 조직기금으로 유용한 것이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발각돼 사임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다”고 고백했지만 소련과의 협력과 원조자금 유용을 덮을 수는 없었다.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뒤에도 독립운동을 했지만 1935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에서 62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이런 이력 때문에 다른 독립운동가와 달리 김영삼 정권 때인 1995년에야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이동휘 선생 추모식에는 윤두섭 서울남부보훈지청장, 기념사업회원, 하빈 이 씨 종친회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전봉독, 기념사업회장 식사, 서울남부보훈지청장 추모사, 헌화․분향 등으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