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암살 전문가' 양성조직: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주요교육내용, 암살·자폭론·혁명역사교육·게릴라전술

    정리/金泌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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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엘리트 대남공작요원들의 대부분은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하 군사대학)에서 양성된다. 연간 100-200명의 대남침투 요원들을 양성해내는 것으로 알려진 이 대학은 1992년 학교 창립 35돌을 맞으며 북한의 교육기관 사상 처음으로 김정일의 이름을 사용했다.

    5년제 군사대학의 교과과정은 김일성·김정일 혁명역사를 비롯한 사상교양이 40%, 전투원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신체단련 사격·격술 등이 40%, 사진 운전 등 기술교육이 20%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인 교육과정은 우선 일상적인 정치사상교육 즉 당과 수령을 위해서는 자신의 육신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다는 사고의식을 가진 친위전사로 교육시키고 있다.

    실제로 김정일은 대남사업을 장악하면서 ‘자폭론’을 교과목에 집어넣도록 했다. 전투원이든 공작원이든 ‘자폭론’을 배워야 한다. 그 예로 ‘철학교재’를 들 수 있다. 전체 5장 21절로 된 이 책은 1장-철학이란 무엇인가, 2장-주체의 혁명적 세계관, 3장-주체의 혁명적 수령관, 4장-주체의 혁명적 인생관, 5장-혁명적 자폭관으로 되어 있다.

    군사대학과 봉화정치대학에서는 이 같은 내용을 1학년 때부터 배운다.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정보원들은 자폭을 ‘옆집에 물 길러 갔다 오는 정도’로 여기게 된다고 한다. 군사훈련의 내용은 기초적인 훈련을 단련하기 위해 태권도는 평균 3∼4단 이상이며, 수영은 먹을 것만 있으면 바다나 강에서 수십 시간 이상은 살 수 있도록 육성하고 있다. 또 하루 저녁 약 1백50리 정도는 지형지물에 관계없이 5∼6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군사전술 및 비합법 훈련의 내용으로서 육상에서 이루어지는 유격전술훈련, 습격, 매복, 암살, 납치훈련, 전투조훈련, 각종 군사 장비를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격전술훈련은 유사시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 산악 및 도시 게릴라전법을 말한다.

    습격훈련은 일정한 목표물을 불시에 매복 기습하며 암살 납치 또는 소규모 인원으로 다수를 테러하는 것이다. 전투조훈련은 2∼3명이 한 개조를 구성해 중요시설폭파, 군사정찰, 고정간첩간의 연락공작 및 일정한 장소까지의 안내와 공작장비지원, 암살, 납치 등의 훈련을 말한다.

    각종 군사 장비를 다룬다는 것은 육상에서 움직이는 각종 수송수단을 다루는 법, 아주 작은 권총에서부터 비반충포까지 발사할 수 있는 등의 기술을 말한다. 해상전술훈련에는 항해전술, 엔진운전법, 통신, 수중폭파, 수중잠수훈련 등이 있다.

    항해전술훈련이란 배가 정확한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항법, 즉 군사학적 측면을 접한 항해사 기술과 선박엔진 운전법 선박통신을 자유자재로 교신하여 단독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보통 5톤급 이상 2백 톤급 이하의 선박은 군사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나 단독으로 운전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한편, 김정일은 대남사업 지휘에 발을 들여놓은 79년 이후 전투원들에게 정신력과 함께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해에 전투원 3명이 남한에 침투했다가 나무꾼에 발각되어 10여 일간 국군 포로망에 걸려 있었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3명은 그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들 전투원 3명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정일은 “이번에 동무들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당에 대한 충성심이 높았고, 또 무쇠 같은 체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전체 전투원들이 훈련을 강화해 하룻밤에 40-80km를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때부터 전투원들은 매일 20kg이상의 모래 배낭을 메고 혹독한 행군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작원들에게는 이 훈련을 시키지 않았다. 고정간첩 활동을 주로 하기 때문에 정보활동 환경 자체가 자유스러운 사회생활이기 때문이다. 또 주요 활동도 자료수집이나 인물 포섭이어서 행군을 굳이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84년부터 이들도 행군을 해야 했다.

    이유는 그해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해 가을, 네팔 등지에서 활동하던 북한공작원이 노출되어 여권과 공작금을 챙겨 나오지 못한 채 북한으로 비상복귀하게 됐다. 이들은 40일간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중국국경 등 3개국 국경을 행군으로 돌파하고 북한에 복귀했다. 이들은 이후 영웅으로 부각되어 김정일을 접견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공작원도 행군을 강하하도록 지시했다. 이 때부터 북한의 공작원들은 물론 해외로 드나들면서 잠시 쉬는 초대소 인원들에 이르기까지 매일 4km, 주말 20km, 월말 40km미터씩 뛰게 됐다. 이처럼 군사대학에서 혹독한 교육을 마친 북한의 대남 공작요원들은 100% 작전부 등에 취직한다. 건강이 나빠 퇴교한 학생도 워낙 신분과 실력이 좋기 때문에, 각 군(郡)에 있는 조선로동당 군당 위원회 지도원으로 채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리/김필재(金泌材)/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