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의 리더십과 여성들

    골다메이어와 엘리자베스1세

    한정석 /미래한국  
          
    그리스 신화에는 한 여신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사랑의 기록이 있다. 바로 그리스를 수호하고 방직과 산업을 일으킨 여신 ‘아테나’다.

    그런 아테나의 탄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올림푸스의 최고신 제우스는 어느날 대지의 여신 가이아로부터 제우스의 씨를 임신한 메티스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이 제우스의 지위를 얻게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제우스는 가이아의 예언이 불길하다고 생각돼 임신한 메티스를 삼켜버렸다.

    그런데 예정일이 되자 제우스는 심한 두통을 앓았고 프로메테우스에게 도끼로 자신의 머리를 좀 부숴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머리를 부수자, 그의 머리에서 여신 아테나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를 든 채 함성을 지르며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 아테나는 평생 처녀로 살면서 그리스의 국가 수호신이 된다. 그녀는 올림푸스의 신들을 위협하고 아테네를 침입해 사람들을 삼키는 괴물 자이언트들을 상대로 전투에 나서 그들을 정복하고 지옥에 가두어 버렸다. 당시 올림푸스의 남신들조차 이 자이언트들을 두려워해 눈치만 보며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여신 아테나는 땅의 사람들을 정복하려는 해신 포세이돈의 음모도 막아냈다. 아테네의 샘들을 소금물로 만들어 시민들을 굴복시키려는 해신 포세이돈과 일전을 벌여 그를 바닷속으로 도망치게 했던 것.

    아테네는 그런 호국의 여신이었지만 동시에 지혜의 여신이어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방직과 세공기술을 가르쳐 산업도 일으키게 했다. 오늘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서있는 동상은 제우스신이 아니라 창과 방패를 든 여신 아테나다.

    수천 년 전 가이아의 예언대로 그녀는 아버지 제우스를 넘어 그리스인들에게 가장 존경과 사랑을 받는 안보와 산업의 수호신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된 것이다. 이러한 아테나의 신화는 이스라엘에도 있다. 그것도 살아있는 신화로 말이다.

    ‘이스라엘의 어머니’ 골다 메이어

  • 70년대 초 이스라엘과 아랍 간에 피비린내 나는 갈등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 다비드 벤구리온 이스라엘 초대 총리는 71세 고령의 한 여성 정치인을 가리켜 ‘우리 정부에 있는 단 한 명의 남자”라고 말했다. 바로 4번째 총리로 수상직에 오른 골다 메이어. 그녀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어머니’라고 불리는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건국 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1967년 6일전쟁에 이어 1973년 4차 중동전쟁인 욤키푸르 전쟁이 일어났고 아랍세계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테러가 빈발했다.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강점했다는 국제적 비난과 아랍세계의 공격에 대해 골다 메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동정을 받으며 죽거나, 미움을 받으며 살거나. 이 둘 중에서 택해야 한다면 나는 미움을 받고라도 살겠습니다. 생존의 문제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겁쟁이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말한 골다 메이어는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함으로써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아랍 테러조직 ‘검은 9월단’을 끝까지 추적해 전원 사살하는 명령을 모사드에게 내린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골다 메이는 전쟁광이 아니었다. 73년 4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선제공격을 받았지만 골다 메이어는 보복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더 이상 침략자라는 비난에서 벗어나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골다 메이어는 인간미 넘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랍 포로 병사들에게 관대했으며 그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탈했다. 외국 순방길에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던 이야기는 세계의 화제가 됐다. 그런 골다 메이어였기에 그녀는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될 수 있었다.

    1978년 12월 8일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조사(弔辭)에서 이렇게 말했다. “왜 사람들은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가. 대부분은 권력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이어가 지도자가 된 이유는 달랐다. 그리고 단순했다. 국민에게 봉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위기는 날개다’ 엘리자베스 1세
     

  • 국민에 대한 봉사로 국가의 부흥을 이끌고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여성 지도자로는 역시 엘리자베스 1세를 빼놓을 수 없다. ‘영국인 누구도 엘리자베스 1세에게는 돌을 던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 엘리자베스 1세지만 그녀의 탄생과 성장은 지극히 불행했다. 마치 아테나 여신처럼 말이다.

    1533년 9월 7일 잉글랜드 런던 근처 그리니치(Greenwich) 에서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난 엘리자베스1세는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된 뒤 궁정의 복잡한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또한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정책이 불만을 사게 되어 와이어트 반란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때,그녀도 반란 가담의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유폐(1554)되는 등 다난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엘리자베스1세가 즉위하던 당시의 잉글랜드는 약소국이었다. 잉글랜드는 전통적으로 강대국인 스페인과 동맹하여 강대국 프랑스와 대적하는 국가였다.

    하지만 헨리8세에 의해 교황과의 신뢰가 깨지면서 스페인과의 동맹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무적함대를 통해서 신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이로 인해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던 스페인을 대적하기엔 잉글랜드는 무력도 약했고, 재정도 어려웠다.

    엘리자베스1세는 이러한 영국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무엇보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뛰어난 판단력은 조세정책에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 왕립학술원 연구원인 사빈(Sabine)교수가 1980년에 출판한 ‘세금의 略史’ (A short history of taxation)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놀라운 혜안이 기록되어 있다. 여왕은 세금을 국가가 정하지 않고 국민들이 주는대로 받겠다고 약속했고 이를 실천했다. 그 결과 당시 영국의 세금은 유럽에서 가장 낮았다. 이러한 영국의 세금제도는 놀라운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내게 된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위협하자 엘리자 베스 1세는 국민들에게 전비 모금을 호소했다. 당시 영국 왕실의 재정은 빈약했고 이로 인해 스페인에 맞설 전함구축 비용이 부족했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시련이 올 때 어떤 자는 두려워 떨고, 어떤 자는 날개를 펴고 비상하죠.”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무적함대를 이끌고 영국을 향해 다가올 때, 젊은 여왕은 국민들에게 전비 모금을 호소했다. 상인들과 목축업자들이 먼저 적극 호응하며 외쳤다.

    '마음과 뜻과 몸과 생명과 재화를 다해 여왕을 돕자!'

    그 결과 여왕이 제시한 금액보다 훨씬 많은 34만 파운드의 모금이 이뤄졌다. 영국인들의 높은 애국심은 그 해 아르마다 해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이를 계기로 제해권은 영국으로 넘어갔다. 지지않는 영국의 태양은 그렇게 떠 올랐다.

    젊은 여왕의 내면에는 그러한 지혜와 강인함이 감추어져 있었다. 시련 앞에서 그야말로‘날개를 펴고 날아오른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서 비로소 영국의 ‘황금시대’가 시작되고 르네상스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엘리자베스1세는 16세기 영국의 부흥을 이끈 위대한 버진퀸(virgin queen)이었다.

    (미래한국) 한정석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