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正熙 선거 유세,
    “내가 집권하면 여러분에게 근면과 내핍,
    피땀 흘려 일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趙甲濟    
  •    1963년 5월 11일 공화당은 서울시내 교동국민학교에서 연설회를 가졌다. 군중은 9일 전의 야당 집회 때에 비해 절반 정도인 약 1만 5,000명이 모였다. 李孝祥(이효상·뒤에 국회의장), 尹致暎(윤치영·뒤에 공화당 의장) 등 연사들이 ‘박정희 의장의 민정참여 당위론’을 주장해도 청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연사들이 미국의 원조정책을 비판하고 “민족의 자주성을 찾자”고 할 때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1963년에 들어와서 정치활동이 자유화되면서 언론의 정부 비판도 가혹해졌다. 예컨대 1963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는 5·16 혁명 두 돌을 기념하는 정치, 경제, 역사학자 좌담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의 제목은 군사정부의 실적을 비판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군사혁명 두 돌…. 잘 해보려고 애는 썼는데’
      
       ‘이념이 없었던 공약’    
       ‘실패로 돌아간 경제정책’    
       ‘중대성명이 남발된 것도 큰 흠’    
       ‘민정이양의 방법…. 군 지지 필요 운운은 어불성설’
      
       사회자도 미안했던지 좌담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가운데는 혁명 2년의 功(공)은 없고 過(과)만 추리신 것 같군요”라고 했다.
      
       박정희는 정치활동의 재개와 함께 언론의 정권 비판이 거세어지자 “언론은 잘하는 것은 묵살하고 못하는 것만 찾아내어 침소봉대한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박정희는 지난 2년간 경제개발 계획의 착수, 울산공업센터 공사 착수, 각종 구조개혁, 외자도입, 자립심의 고취 등 도약의 발판을 놓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집권기간을 연장하고 정치안정만 보장되면 조국근대화를 이룰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던 박정희로서는 언론과 야당의 전면적 비판과 부정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후 학생, 언론인, 교수 등 지식인들에 대한 그의 거부감은 때로는 경멸적으로 표현된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는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商工農士(상공농사)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는 현대의 士(사)자 계층인 지식인층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5월 20일 박정희는 강원도 黃池(황지, 지금의 태백시)에서 황지본선 개통식에 참석했다. 桶里-深浦里(통리-심포리) 간 8.5km를 연결하는 이 철도 공사엔 험준한 지형 때문에 11개의 터널을 뚫어야 했다. 21개월의 공사기간, 연인원 85만 명이 들어간 이 철도부설로써 중앙선이 서울 청량리 역에서 출발, 경북 영주-강원도 철암을 거쳐 북평-강릉까지 연결되었다. 대관령 동부 지역의 발전과 이 지방의 석탄개발 촉진에 중요한 수송선이 완성된 것이다.
      
       혁명정부의 의욕이 담긴 이 철로 준공식에 참석한 박 의장은 致辭(치사)를 하기 위해서 단상에 오른 뒤 壇下에 정렬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마치 조회시간에 학생들을 야단치는 교장처럼 말했다.
      
       “본인이 치사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오늘 여기 식장에서 보고 느낀 몇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런 행사에서는 반드시 애국가 奉唱(봉창),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습니다. 아까 보니 뒤에 와 있는 인사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도 남의 일 보듯이 하고 있었고 애국가를 부를 때도 따라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방에 계신 분들은 이런 행사를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앞으로 이런 행사를 할 때는 사회를 맡은 분이 ‘지금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합시다. 모든 분들은 저 뒤에 있는 국기를 향해서 전부 오른손을 왼 가슴 위에 얹어 가지고 국기에 대한 경의를 표합시다’ 이렇게 하십시오. 오늘 이 식이 끝난 다음 마지막 순서 다음에 사회자는 다시 한번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봉창을 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1963년 여름, 박정희는 박상길이 대필한 《국가와 혁명과 나》의 원고를 작가 金八峰(김팔봉)에게 주어 監修(감수)를 받아본 뒤 朴 씨에게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퍽 좋습니다. 다만 원고 중에 내가 표시한 두 페이지만 삭제해 주십시오. 어쩌면 꼭 제 마음속을 다녀오신 것처럼 정확하게 써주셨습니까. 큰 수고를 했습니다.”
      
       이 책은 1963년 9월 1일자로 출판되었다. 4×6배판 293페이지에 正裝(정장) 5,000부, 보급판 5,000부. 박정희는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정치철학과 국가 근대화에 대한 소신을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이 책은 박정희의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기록한 것으로 평가되어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 책에는 국가원수의 글로서는 너무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도 많다.
      
       <땀을 흘려라/ 돌아가는 기계소리를/ 노래로 듣고…/ 이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네 손이 밉더라.
      
       우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고운 손으로는 살 수 없다. 고운 손아, 너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만큼 못살게 되었고 빼앗기고 살아왔다. 소녀의 손이 고운 것은 미울 리 없겠지만 전체 국민의 1% 내외의 저 특권지배층의 손을 보았는가. 고운 손은 우리의 적이다>
      
       위의 시는 박정희의 自作(자작)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시를 인용한 것이다. 노동운동가의 시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다. 박정희의 국가 근대화는 그의 이런 반골정신에 기반을 둔 건설이었기 때문에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 전략을 추진하면서도 농민·노동자·소외층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는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 다가오는, 선거를 통한 민정이양 방식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단 1명의 사망, 단 1명의 부상도 없이 혁명의 全(전) 적대세력을 대등한 위치에 개방하고, 순리와 자유경쟁의 원칙에서 혁명의 결실을 시도한 예가 세계 혁명사의 그 어느 대목에 있는가>
      
       박정희가 이 책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 비판한 것은 민주주의를 실천이 없는 구호로만 외치는 구정치인들의 僞善性(위선성)이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건전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확립될 수 있다. 또 건전한 민주주의는 진실과 정직과 법률 본위의 정치적 토대 위에 설 수 있는 것이로되 우리의 그것은 허위와 과장과 부패, 무능, 독선으로 未備(미비)되어 민주주의의 허점을 역이용해서 왜곡된 ‘위장 민주주의’를 조장해놓았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일부 한정된 지식층의 전매특허된 玩賞物(완상물)이거나 직업 정상배의 생활 밑천처럼 되고 국민들에게는 불평의 배출구처럼 誤用(오용)되고 있다>
      
       박정희는 근대화 혁명의 공식을 ‘기성세력층 대 (국민의식+군인의 힘)’이라 설명했다. 군인이 권력기반, 또는 정치적 안정을 제공하여 국민들의 자립의지를 살려내고 조직화한 뒤 그 힘으로써 구정치인으로 대표되는 기성·수구세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전략이었다. 박정희는 군인에 의한 혁명이 국민혁명, 즉 근대화 혁명으로 발전·승화되어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어떤 사상적 지도자로 자처하려는 위인은 4·19 혁명을 대낮의 공사에 비하고 5·16 혁명을 밤의 거사에 비유하여 이 혁명에 흠을 잡으려 했지만 여기서 명백히 지적하려는 것은 (거사의) 시각이 밤이 아니고 새벽이었다는 사실이다. 새벽! 그것은 바로 이 혁명의 목적을 상징하는 시각이다. 민족의 여명! 국가의 새 아침! 김포의 革命街道(혁명가도). 30대의 청춘을 민족에 걸고, 오직 한 나라의 운명을 바로잡으려던 저들 모습은 눈물겹도록 성스러운 인간상이었다.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보며 본인은 그 강물이 어제 흐르지 않던 새 물결이었음을 깨닫기도 하였다>
      
       박정희는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았을 때 ‘마치 불이 난, 도둑맞은 廢家(폐가)를 인수하였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1961년도 예산의 52%가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가리키면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발언권은 52%를 차지하고 동시에 그것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관심도를 나타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고도 우리는 과연 독립된 자유, 민주주의의 주권국가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딱하고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이런 격한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요컨대 해방 후 19년간의 총결산-그것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은 반면에 단 하나의 소득이 있었다면 덮어놓고 흉내 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의 강제이식이 있었을 뿐이다. 피곤한 오천 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 위에 서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박정희는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불가피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함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민주주의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속에서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그것은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다> 
          

  •    1963년 10월 6일, 대구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고향에 돌아온 안도감 때문인지 상당히 고무된 기분으로 공격적인 연설을 한다.
      
       <나는 아무리 미국과 우리하고 관계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거지 구걸하는 원조는 받을 수 없다, 이겁니다. (박수)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의 경제를 재건할 수 있는 계획을 딱 세워놓고 미국 사람들에게 원조를 받을 때에는 우리에겐 이런 걸 원조해 주시오, 이런 걸 좀 해 달라, 그리고 소비 물자만 주지 말고 건설자재를 좀 달라, 먹고 당장 없어지는 것보다도 시멘트 한 포라도 더 달라, 철근을 하나 더 달라, 그래서 공장이라도 하나 더 지어 달라. 그런 걸 우리가 사전에 계획을 딱 지어놓고 미국 사람들과 협조를 해서 우리한테 꼭 필요한 것을 받자 이겁니다.
      
       미국 시민들이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세금을 모아서 도와주는 게 이 원조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규모 있게, 계획적으로 효과 있게 잘 써야 되겠다 이겁니다. 그래야만 미국 사람들도 우리한테 도와준 보람이 있을 것이고, 우리도 또 우방국가로서 원조를 받아서 뒤에 무엇이 남아야 그 은혜에 대해서 보답할 수 있는 그런 길이 되는 것이지, 주면 똑 한강물에 돌 집어 던지듯이 어디로 들어갔는지 전혀 모르는 이런 식 원조, 모래사장에 물 붓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면 없어지고, 주면 없어지고….
      
       과거에 우리 舊정치인들이 미국에서 수십 억불의 원조를 받아다가 어디다 썼습니까? 얻어올 적에는 그런 거지 식으로 얻어와서, 가져와서는 돌아올 때는 국민들에게 노나(나눠)준다 그러고, 돌아온 뒤에는 저그들끼리 쏙쏙 노나(나눠) 묵꼬, 뭐가 남아 있습니까? (와-하는 웃음과 박수)>
      
       그 날 저녁, 숙소인 대구 수성 관광호텔로 돌아온 박정희 후보와 일행은 저녁을 마친 뒤 각자 다음 진주 유세를 위한 준비로 바빴다. 박정희는 유세요원 이만섭(전 국회의장)을 부르더니 ”여보, 이만섭 씨. 나, 오늘 한솔(이효상) 선생 처음 뵈었는데, 사회를 참 구수하게 잘하시데. 내일부터 그 어른 모시고 합시다”라고 했다.
      
       10월 7일 진주 유세부터 박정희 후보는 검은색이 옅게 깔린 안경을 쓰고 연단에 오른다. 연단에서 인사를 한 박정희 후보가 막 연설을 시작하려는 순간, 청중 속의 한 노인이 손나팔을 만들어 고함을 쳤다.
      
       “그, 박 의장요! 안경 좀 벗어보소. 관상 좀 봅시더.”
      
       박정희 후보는 그 노인을 향해 ”아, 그래요? 내 벗지요”라며 안경을 벗었다. 얼굴엔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박 후보의 연설이 끝나자 고함쳐 안경을 벗게 만든 노인이 다시 한번 고함을 쳤다.
      
       “아, 그 관상 보이 대통령 되겠다.”
      
       이 말에 박정희의 얼굴엔 짧은 미소가 돌았다고 한다. 이만섭은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참, 민주주의가 좋기는 좋다”고 혼잣말을 했다.
      
       진주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임진왜란 당시의 진주성 싸움과 6·25를 예로 들면서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지킨 것은 군인과 민중이요, 나라를 망친 것은 벼슬아치와 구정치인이었다고 비판했다.
      
       박정희 후보는 또, 그러한 위선적·사대적 정치인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는 서구에는 맞지만 한국의 토양에는 맞지 않는 ‘탱자 민주주의’라고 야유도 한다.
      
       <여러분. 이 책상 위에, 마침 이걸 누가 갖다 놨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아마 탱자일 겁니다. (“유잡니다. 유자!”-관중석에서) 유잡니까? 아, 잘 몰랐습니다.
      
       우리나라에 탱자라고 있지요? 어느 식물학자가 몇 년 전에 일본에서 밀감나무를 이식해다가 자기 집에 심어가지고 잘 가꾸어서 키워 놨는데 몇 년 지나고 난 뒤에 열매가 열렸다 이겁니다. 노란 게 열렸는데 따 보니까 이것은 밀감이 아니고 탱자가 열렸더라 이겁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에선 그것이 아무리 좋은 민주주의라도, 서구제국에선 가장 알맞은 그런 제도였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우리나라에 갖다가 완전히 밀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여건을 잘 만들어줘서 어느 시기에 가서 접목을 시켜서 이것이 완전히 우리나라에서 밀감이 될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갖다 여기다 꽂아 놓는 것은 민주주의가 되지 않고 탱자 민주주의가 된다 이겁니다.(박수)
      
       6·25 사변 때 공산군이 우리를 침략했을 때 이것을 나가서 총칼을 들고 목숨을 걸고 싸워서 나라를 지켰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당시의 우리 국군 장병이요, 자진해서 군에 입대한 우리 애국 시민, 학생, 학도병, 또는 저 시골 농촌에서 학교도 가지 못하고 지게 목발을 두드리던 불우한 청년들이 전부 끌려 나와서 지게 목발 대신에 총칼을 들고 전방에서 공산당과 싸워서 이 나라를 지켜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소위 구정치인, 과거에 정치를 했다는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할 줄 아는 것은 우리뿐이고,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우리고, 느그는 전부 가짜고, 이질민주주의고, 위험한 민족주의고, 심지어 나아가서는 빨갱이고, 공산당이고’ 이렇게 떠들고 돌아다닙니다.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전몰 장병들은 아직 한 번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우리뿐이다’하는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누가 진짜로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수호해 왔고, 누가 거짓말, 껍데기 민주주의를 해 왔느냐…. 국민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후보의 연설을 들어 보면 그의 연설은 기교가 없고 투박하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생이던 기자는 10월 9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있었던 공화당 유세를 들으러 갔다. 박 의장의 연설은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선동과 우스갯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 후보는 그냥 차분하고 깐깐하게 연설하니 청중은 흥분하거나 웃을 일이 없었다. 박정희는 또 대중 앞에 나타나 연설하는 것이 뭔가 어색한 듯 몸에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줍어하는 표정이었다.
      
       녹음 테이프로 다시 듣는 박정희의 연설은 달랐다. 그의 연설에는 구체성과 實質(실질)이 있고 비전이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열정이 느껴졌다. 그가 연설에서 약속한 것이 대부분 실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지금 그의 연설은 당시의 청중이 아니라 역사를 향해서, 미래를 향해서 토로한 웅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는 5대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군사문화의 효율성과 복종심, 그리고 희생정신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함석헌-이낙선 지상 논전에서도 잘 드러났지만 이 선거는 군사문화의 실천력과 민간문화의 명분론이 대결한 장이기도 했다. 10월 8일 마산 유세에서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
      
       <어제 어떤 소위 우리나라의 자칭 지도자라는 사람이 아마 이 고장에도 다녀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선거전이 벌어지기 전부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군인은 군복을 벗어도 한 3년 동안은 때가 벗겨지지 않는다, 군대 갔다 온 놈은 전부 집에 앉아서 한 3년 동안 물을 끓여놓고 때를 벗겨라, 이겁니다. 여기 지금 군대 갔다 온 제대군인들이 많이 계시죠. 완전히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여하더라도 이것은 옷만을 바꾼 군정이다, 그러니까 우리 야당 구정치인들이 정권을 잡아야겠다. 이거 여러분들이 혹 정신을 못 차리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지도 몰라요. 군인이 군대에 가서 무슨 지독한 짓을 했기에 3년 동안 벗겨야 할 때가 묻어 있습니까. 
       
       저부터 수십 년 동안 군에서 복무를 했고 군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군인이 군대 가서 배운 것은 또한 여러분들 자제가 군에 입대해서 2~3년 동안 배우는 것은 그야말로 앞으로 국민으로서 건전한 정신적인 기초를 군대에서 닦아주는 것입니다. 자기 맡은 임무에 대해서 충성을 다하자, 국가에 대해서 충성을 해라, 상사의 명령에 대해 복종을 해라, 동료, 단체를 위해서는 희생정신을 발휘해라, 모든 일에는 감투정신을 발휘해라. 이런 모든 것은 국민들이 모두 갖춰야 될 훌륭한 정신적인 덕목입니다. 그런데 뭐, 모처럼 배운 것을 집에 와서 뭐, 3년 동안 또 벗깁니까(와 하는 폭소). 그리고 나서 구정치인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렁뚱땅하니 그저 남을 속이기나 하고 사기나 하고 협잡이나 하고 하는 그런 재주를 또 배우란 그 말입니까?>
      
       10월 9일 부산 유세에서 박정희 후보는 낭만에 빠질 여유도 없는 것이 조국의 현실이라고 했다.
      
       <어제 마산에서 유세를 마치고 부산으로 자동차를 타고 왔습니다. 沿道(연도)의 풍경은 대단히 아름다웠습니다. 오곡백과가 대풍년을 이루었습니다. 연도에는 코스모스가 한없이 피어서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단히 부드러운 기분을 주었습니다. 한 곳을 지나오면서 보니까 땅에 납작하게 붙은 쪼매난(조그만) 오막살이 주막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코스모스가 피었는데 그 코스모스 키가 오막살이집보다 오히려 더 클 정도로 납작하게 붙은 주막집입니다. 거기 어떤 농부 같은 한두 분이 앉아서 막걸리를 이래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맑고 높은 가을하늘, 오막살이 주막집, 코스모스, 두 사람의 농부, 막걸리. 이 광경이 아주 낭만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하나의 낭만이라고 듣고 버려둘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냐. 금년과 같이 이렇게 풍년이 들었더라도 우리나라는 식량 하나 자급자족을 못 하는 그런 형편에 있다 이겁니다>
      
       이 선거를 취재하러 한국에 온 재미동포 언론인 피터 현은 그때 <뉴욕 헤럴드 트리뷴> 특파원이었다. 그는 윤보선 후보를 먼저 인터뷰했다. 피터 현의 집안과 윤보선의 집안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피터 현은 장면 정부 시절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의 文政官(문정관)으로 일하다가 5·16 쿠데타가 터지자 ‘장면 정부 임명자’로 찍혀 면직되었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악감정을 품고 왔다.
      
       피터 현은 윤보선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대단히 실망했다. 국가운영에 대한 비전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란 질문에 윤보선은 “내가 대통령이 당선되면 모든 게 잘 될 것이다”, “그런 것은 대통령이 당선된 뒤 생각해볼 문제이다”는 식으로 대답하여 기사화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피터 현이 1963년 10월 6일자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쓴 선거관련 기사에도 윤보선의 말은 한마디만 소개되어 있다.
      
       “나는 군사정부에 가장 강력하게 대항한 사람이고, 박정희 일파가 몰고 온 해악을 치유할 능력이 있으므로 출마했다.”
      
       피터 현은 박정희 후보가 대구에서 유세할 때 따라 내려가서 그와 인터뷰했다. 朴 의장의 집권에 의해 失職(실직)이란 피해를 입었던 피터 현은 국가 건설에 대하여 설명하는 박정희의 진지성과 열정에 감복하여 선입견이 바뀌었다. 그는 私情(사정)을 끊고서 윤보선보다는 박정희에게 유리한 기사를 쓰게 된다.
      
       10월 12일 오후 <동아일보> 金聖悅(김성열·동아일보 사장 역임) 정치부장은 박정희 후보 측을 맡고 있던 柳赫仁(유혁인·대통령 정무 수석비서관 역임·작고) 기자에게 “박 후보가 유세를 마치면 인터뷰를 하되 이 질문을 꼭 하라”고 지시했다.
      
       질문은 ‘만약 낙선되어도 국민의 심판을 따르겠습니까’였다. 김 부장은 박정희가 선거에서 패배하면 과연 군부가 결과에 승복하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으므로 박정희의 답은 뉴스거리라고 판단했다. 몇 시간 뒤 유혁인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박 의장과 단독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타사 기자들이 몰려와 마지막 질문을 못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은 있습니다. 저 같은 평기자는 안 되고 부장께서 오시면 단독 회견에 응할 것 같습니다.”
      
       오후 7시 장충동 의장 공관에 도착한 김 부장은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유혁인 기자는 미리 와 있었고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자리를 권했다. 잠시 후 유세장에서 돌아온 양복차림 그대로의 박 의장이 나타났다. 의자에 앉자마자 박정희는 쏘아붙였다.
      
       “<동아일보>는 완전히 야당편이더군요. 부산·대구 유세 현장 취재 기자가 아무리 청중이 몇 십만 명이라고 기사를 보내도 서울에 앉아 있는 정치부장이 마음대로 결정한다면서요?”
      
       김성열 부장은 속으로 ‘아 그 일 때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김 부장은 유세장의 청중수를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해서 유세장의 면적을 미리 파악하고 항공사진을 찍어 평당 인원수를 추정하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애썼는데 박 의장이 오해를 하고 있구나 하고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보니 인파수가 주최 측에서 발표하는 것보다 항상 적게 나왔다. 수십만 인파라고 발표된 것도 따져보면 그 10분의 1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김성열은 이렇게 회고한다.
      
       “대구 수성천변에서 박정희 후보가 유세를 할 때 이 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사회부 기자들도 별도로 보냈습니다. 신문 降版(강판) 직전에 내가 현장의 사회부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청중수를 물었더니 한 5만~6만 명이라고 합디다. 정치부 팀에 물었더니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수십만으로 송고하는 걸 확인했다고 하는 거예요. 다시 사진부 팀장에게 ‘전번 윤보선 후보 때와 비교해서 어떠냐’고 물었더니 ‘비슷합니다’라고 해요.
      
       그래서 윤 후보 유세 때 현장에 있었던 여덟 명의 기자들에게 일일이 물었습니다. 네 명은 ‘윤보선 때가 많았다’, 네 명은 ‘지금이 더 많다’고 해요. 마지막으로 대구 지사장에게 물으니 ‘전과 같다’고 해서 ‘대체로 10만 대는 넘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가장 많다’고 써넣었어요. 다른 신문들이 ‘80만’, ‘100만’ 식으로 보도하는 통에 우리 쪽만 청중수를 줄여 보도한 셈이 되니 박 의장이 화를 낸 겁니다.”
      
       박정희는 김 부장의 설명을 듣더니 “<동아일보>는 공화당 집회를 과소평가한 거죠?”라고 또 따지고 들었다.
      
       “항공사진까지 찍어서 정확을 기하려 했습니다.”
      
       “우리 공군에서도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걸로 청중 수 문제가 일단락되는가 했더니 박정희는 다시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왜 빨갱입니까.”
      
       박정희는 답을 기다리지 않고 “왜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신문에서 보도합니까”라고 다그쳤다. 어느 새 박 의장의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고 김 부장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김 부장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평상시에 언론은 사건이나 뉴스에 대해서 일일이 검증하여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할 때 보도합니다만 선거기간 중에는 후보들의 주장이나 말 그 자체가 뉴스입니다. 박 의장께서 유세장에서 하신 말씀도 여과 없이 보도했습니다.”
      
       박정희 의장의 손이 담배와 함께 덜덜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나면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이때 춘천 유세에 演士(연사)로 참석했다가 돌아온 이만섭 전 <동아일보> 기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박 의장은 이만섭을 보자 마치 원군을 얻은 듯 언성을 높였다.
      
       “그렇다고 나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박 의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자개 재떨이를 들어올렸다. 그리곤 마룻바닥에 쾅 하고 팽개쳤다. 박 의장은 슬슬 걸어 방을 나가버렸다. 김성열 <동아일보> 정치부장은 박정희가 화장실에 간 줄 알았는데 1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李厚洛 실장만 안절부절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안팎을 왔다 갔다 했다. 李 실장은 “곧 나오실 겁니다”라고 했다. 김 부장은 이 실장에게 말했다.
      
       “회견하실 뜻이 없으면 그냥 가겠습니다. 신문사 체면도 있고, 제가 개인적으로 온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영감이 피곤하셔서 좀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원수지간도 아닌데 인사나 하고 가시지요.”
      
       이후락의 안내를 받아 김 부장이 들어간 곳은 응접실과 붙어 있는 침실이었다. 박정희와 육영수가 서 있었다. 김 부장이 박정희에게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라고 인사하니 박 의장은 다가와서 말없이 손을 쑥 내밀었다. 한복차림의 육영수는 거의 90도로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너무 무리하게 유세 계획을 짰지 뭐예요. 새벽부터 밤까지 강행군을 며칠씩 하니 저 양반이 너무 피곤해서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았습니다. 오늘 너무 흥분하신 것 같으니 양해하세요.”
      
       김 부장은 속으로 ‘야, 이렇게 얌전한 부인이 저 박 의장같이 성미 급한 남자를 만나 모진 고생을 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옆에 있던 박 의장이 다시 고함을 치다시피 했다.
      
       “내가 형 한 사람 때문에 두고두고 공산당으로 몰리는데 내가 왜 공산주의자요?”
      
       박정희는 분노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김 부장은 재빨리 침실을 빠져나와 가파른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뒤따라 나온 육영수는 김 부장이 계단을 따라 내려와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까지 지켜보면서 ‘미안합니다’란 뜻을 전했다. 김성열 부장은 공관을 나서면서 유혁인 기자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그대로 기사로 써!”라고 했다. 유 기자는 “부장님, 만일 신문에 그렇게 나가고 박 의장이 낙선하면 광화문 사옥이 박살날 겁니다”라고 했다. 김성열 前(전) <동아일보> 사장은 “군대를 잘 알던 유혁인 기자는 겁을 냈고 군대를 잘 모르던 나는 오히려 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10월 14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박정희, 윤보선 두 후보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박정희와의 인터뷰 기사는 유혁인 기자가 끝마무리를 짓지 못했던 12일 오후의 단독 회견 내용이었다. 춘천에서 대통령 선거유세를 마치고 장충동 의장 공관으로 돌아온 박정희 후보가 유혁인 기자에게 직설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던 것이다.
      
       “야당 사람들이 지금 별의별 짓을 다 해 가며 선거 분위기를 흐리게 하고 있으니 개표가 끝날 때까지 또 무슨 장난을 할지 큰 걱정입니다. 지금 야당 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개표할 때 뭣을 집어넣든가 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부정이다 뭐다 하지 않을 것 같소? 이번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공명선거를 하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야당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노릇이 아닙니까. 지금 그 사람들한테는 법이 있습니까? 잡아가라고 떠들어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꾹 참고만 있습니다만 선거만 끝나면 모조리 다 가만두지 않을 테요. 나는 지금 테러를 당하고 있어요. 그저 참고 있자니…. 이 나라의 원수인 나를 빨갱이로 몰아치니….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안 가리니 이게 바로 공산당 수법과 다른 게 뭐요? 내가 빨갱이라면 이 나라가 2년 동안 빨갱이 치하에 있었단 말인가요?”
      
       박 의장은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피로가 역력한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기대어 “시험은 이제 끝났고 나는 내 실력껏 쳤으나 심사관들이 어떻게 점수를 매길지 뚜껑을 열어봐야 알지요”라고 했다. 그는 다시 이야기를 사상논쟁으로 돌려 “政敵(정적)을 빨갱이로 모는 이 폐풍만은 이 기회에 뿌리를 뽑아야지요”라고 했다.
      
       10월 13일 박정희 후보는 수원과 인천에서 마지막 선거유세를 했다. 박정희는 “지금 여건으로는 누가 집권해도 당장 잘 살게 할 수 없다”면서 “내가 집권하면 여러분에게 근면과 내핍, 피땀 흘려 일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고 말했다. 윤보선 후보는 이날 수원, 천안 유세에서 “군정과 민정을 판가름하는 이 마당에 사상이 분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윤보선 후보의 민정당은 이날 <경향신문> 1949년 2월 17일자와 <서울신문> 2월 18일자에 실렸던 ‘박정희 소령 무기 징역 선고’ 관련 기사를 공개했다. 박정희 소령이 72명의 다른 장교들과 함께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에 있었던 군부 내 남로당 조직 수사에 걸려 군법회의에 넘겨졌고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민정당의 이 폭로 내용을 호외로 만들어 전국적으로 돌렸다.
      
       1963년 10월 15일 오전, 투표를 마친 박정희 부부는 두 대의 승용차 편으로 경주로 달렸다. 이후락 최고회의 공보실장, 박종규 경호대장, 池弘昌(지홍창) 주치의, 申東寬(신동관) 경호관이 수행했다. 일행은 경주 불국사 관광호텔에 들었다. 이 운명의 밤 윤보선은 미국 정보기관 요원의 집에서, 그리고 박정희는 민족사의 영광이 서린 불국사 근처에서 국민의 심판을 기다렸다.
      
       박정희 부부는 110호실, 이후락 실장은 103호실에 들었다. 110호실에서는 개표 중계 라디오 방송소리가 새나왔다. 103호실에서는 이 실장에게 개표결과를 알리는 전화벨 소리가 자주 울렸다. 개표 직전까지도 박정희의 낙승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초저녁 투표함의 뚜껑이 열리면서 의외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윤보선 후보가 앞서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6일 새벽 3시 현재 윤보선은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에서 박정희를 크게 앞섰다.
      
       박정희는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에서 윤보선을 압도했다. 부산은 막상막하. 남북으로 표의 흐름이 극명하게 갈린 것이다. 윤보선은 약 82만 표, 박정희는 약 80만 표. 2만 표이던 표차는 계속 벌어져 한때는 23만 표의 격차를 이루었다.
      
       불국사 관광호텔 110호실에선 라디오 소리도 멎었다. 박정희는 책장을 넘기다가 잠에 들었다고 전해진다. 육영수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바깥으로 들고 나와 심각한 표정으로 개표방송을 들었다. 다음날 아침 박정희는 이후락 실장, 주치의 지홍창 등 수행원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박 의장은 “간밤에 개표 중 사고는 없었는가”라고 물었다. 이 실장은 “개표는 순조롭지만 표차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윤보선은 약 7만 표 차이로 박정희를 앞서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명선거란 집권자가 떨어져도 좋다는 마음의 준비와 결심이 있어야지. 사실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
      
       이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또 다른 인물은 閔耭植 육군참모총장이었다. 그는 선거에 군부가 개입하는 것은 저지시켰으나 육군본부와 논산훈련소에서만은 지휘관이 장병들을 상대로 박정희 홍보를 하도록 했다. 16일 새벽 박정희의 敗色(패색)이 짙어진다고 판단한 민기식은 책상정리를 하면서 형무소에 들어가 입을 옷도 준비시켰다고 한다. 민기식은 육군 본부와 논산을 제외하고는 군인들이 몰려 사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윤보선 후보의 표가 박정희보다 더 많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군인들이 처음으로 소신껏 투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역 앞 에비슨 회관 안에 있던 공화당사는 恐慌(공황)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기획상황실에서 전화기 19대를 통해서 개표상황을 집계하던 20여 명의 당원들은 15일 자정을 넘기면서 윤보선이 본격적으로 앞서나가자 연필과 전화통을 집어던지고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들을 지휘하던 金龍泰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5·16 전야 광명인쇄소에서 김종필, 이낙선과 함께 혁명공약을 인쇄하는 일을 감독했던 김용태는 운전기사를 시켜서 권총을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 선거에서의 패배는 자신이 목숨을 걸었던 5·16 에 대한 국민들의 否定(부정)을 뜻한다고 생각한 그는 에비슨 회관 뒷동산의 아카시아 숲에서 자결할 궁리를 했다는 것이다. 15일 밤에는 사람들로 붐비던 공화당사도 박정희가 질 것 같은 분위기로 돌자 어느새 자취를 감추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 썰렁해지기 시작했다.
      
       일부 당원들은 컴컴한 방 구석에 모여 “이러면 진다. 중앙선관위에 전화를 걸어 개표를 중단시키자”고 합의했다. “김형욱 정보부장의 지시이다. 개표를 중단시키자”라고 떠드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을 단호하게 눌러버린 사람이 김용태였다고 전한다. 그는 “그런 무모한 짓이 어디 있어! 조용히 기다려 봐!”라고 호통을 쳤다. 제 자리로 돌아간 당원들은 입버릇처럼 되어 있던 ‘절대다수’니 ‘65% 지지’니 하는 소리는 아예 팽개치고 ‘그저 한 표라도 더 나와야 할 텐데’하면서 발버둥치는 모습들이었다고 한다.
      
       16일 오전, 개표 진척도가 늦었던 전라도, 경상도의 투표함이 본격적으로 열리고 박정희 표가 쏟아지면서 박정희, 윤보선의 표차는 좁혀지기 시작했다. 16일 오후가 되면서 박정희 후보의 辛勝(신승)이란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16일 저녁부터는 박정희가 역전승의 대세를 확실하게 잡았다. 17일 새벽 4시 현재 박정희는 윤보선에 대해 약 9만 2,000표 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박정희를 경주까지 수행했던 한 측근은 “10월 16일 새벽을 넘기는 일은 5·16 새벽 한강을 넘어서는 일보다 더 어려웠고 지루했다”고 말했다.
      
       중앙선관위는 17일 오후 3시에 전국 개표를 모두 끝냈다. 5代 대통령 선거의 투표율은 84.9%, 유효투표율은 91.3%, 박정희는 470만 2,640표를 얻어 454만 6,614표를 얻은 윤보선을 15만 6,026표 차이로 눌러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지역에서 크게 패배한 박정희는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에서의 압승으로 이를 만회했던 것이다.
      
       경주에서 대통령 당선을 확인한 박정희는 10월 17일 밤을 대구에서 보낸 뒤 승용차편으로 고향인 경북 선산으로 향했다. 구미읍 상모동에서 차를 내린 박정희 의장은 금오산 기슭 온수골 마루턱에 자리 잡은 先塋(선영)으로 올라갔다. 길가에 늘어선 주민들에게 박 의장은 “어떻게 알고들 나왔습니까. 이제는 얼굴을 통 몰라보겠군요”라면서 일일이 손을 잡고 인사를 했다. 한 아낙네는 “선산에 인물이 났네”라고 소리를 질렀고, 한 할머니는 “임금이 왕림하신다는 말을 듣고 이웃에서 왔습니다”라면서 허리를 깊게 굽혔다.
      
       生家(생가)로 돌아오니 전형적인 농사꾼 모습의 큰형 박동희 옹이 기다리고 있다가 대통령이 된 동생의 절을 받았다.
      
       “형님, 왜 그렇게 늙으셨습니까.”
      
       “나이를 먹으니 늙을 수밖에. 그런데 이번 선거를 보니 농촌사람들은 정치를 잘 한다고 하는데 도시에서는 반대가 많아. 월급 가지고는 쌀값이 비싸 살기가 어려운 모양이지.”
      
       “앞으로 힘껏 일해 보겠습니다.”    
       형제가 근 한 시간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박 의장의 생가에는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막걸리 파티장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