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개•••아스라이
    양귀비 꽃보다 더 붉은

    <논개 묘제문>

    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

  • ▲ 논개의 묘 앞에 세워진 석상.
    ▲ 논개의 묘 앞에 세워진 석상.

      논개, 당신이 이 세상을 하직한 지 올해로 403년이 되지만, 존영(尊靈)이 지금 바로 곁에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당신의 이름 논개는 오늘도 우리에게 채찍과 소망으로써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라는 것, 생(生)과 사(死)가 노도처럼 쓸고 지나가는 속에, 무릇 모든 생령(生靈)이 일신을 가누고자 발버둥을 쳐보기도 전에 그 혼을 떠내려 보내고 앗기고 마는 장(場)으로서의 전쟁. 그 장 속에서 당신은 부동하게 빛나고 높았습니다. 조선 개국 200여 년의 태평과 문약(文弱)은 왜적의 일격 앞에서 난파당한 혼과 압살된 정신의 홍수를 이 땅에 범람케 했던 것을 우리는 압니다.

    논개, 당신은 홍수 속에 온 혼령을 던져, 그 강을 건넜고, 그리하여 우리 곁으로 왔습니다.
    당신은 우리 민족 정신사에서 의열(義烈)의 여왕으로 밀어올려지고 말았습니다.

    경합하는 세 여인이 있습니다. 문아(文雅)와 기품의 여인 신사임당, 그녀의 최고의 작품이라 할 이율곡, 그 율곡이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을 외쳤으되 현실에 얼굴을 내밀지는 못했습니다. 멋과 사랑의 여인 황진이, 그녀는 기녀(妓女)의 신분을 관세음보살처럼 살다 갔으되, 역사 속에서 신분을 용해해 내지는 못했습니다. 열사(烈士) 유관순, 그 저항은 서릿발같이 매섭고 야멸찼으며, 그로 인한 수난은 죽음보다 혹독했으되, 그녀의 정신은 독립하고 침식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그녀에게 눈앞의 왜(倭)를 제압할 수단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인의 매력으로 치더라도, 제2차진주성전투(晉州城戰鬪), 6만 국민이 옥쇄, 도륙당한 낙성(落城)의 폐허 위에 선 열아홉의 꽃 쪽이 ‘춘풍(春風) 이불’이나 ‘청산리 벽계수’를 배경으로 한 여인보다 몇 수 위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은 당신에게 관기(官妓)라는 신분의 짐을 지웠으되, 오히려 그 낮음으로 인하여 당신의 혼의 초월적 도약으로, 민족 성원의 높고 낮은 모든 여인들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에 눈떠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말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소여(所與)로서의 신분을 녹여냄으로써 당신은 여왕일 수 밖에 없습니다.

    논개, 당신은 열아홉의 꽃봉오리로 ‘죽음을 입맞춤’함으로써 민족사 속에서 우리 곁에 영원한 열아홉의 여인으로 남았습니다. 그 인상을 말한다면, 당신이 태어난 장수(長水) 고을의 동편준령, 남덕유(南德裕) 깊은 골짜기에서 천년을 두고 계곡수에 씻기고 있는 화강암을 깨고 캐어낸 보석이라고나 할까.

  • ▲ 진주성과 촉석루 야경.
    ▲ 진주성과 촉석루 야경.

    논개! 당신 이름을 불러보면, 꽃답고 총명한 여동생 앞에선 못난 오빠 같은 생각이 듭니다.
    요새는 해방이 되어 독립이 되었다고, 나라는 갈라진 채 놔두고, 일본 기술 들여다가 노임 얹어 밥술이나 먹는다고 헤벌어져, 기술 의존의 부(富)가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는 것도 모르고, 혼의 멱살이 잡힌 채로 덜렁거리느냐고 가슴을 저미듯 쏘아 보는 것만 같습니다. 21세기를 내일, 모래로 앞둔 오늘, 통일의 찬스를 앞에 하여 우리 하나하나의 ‘모곡촌(毛谷村)’은 누구냐고, 무엇이냐고 묻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질책 어린 시선에 찔려, 생각을 다잡으면서도 다시 한 번 논개 당신의 매력에 끌려 먼 하늘을 봅니다. 수주(樹洲)는 당신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위해 요즘 익고 있는 석류 속이나 푸른 강낭콩꽃, 붉은 양귀비꽃을 멋있게 동원했지만, 당신은 역시 산정(山頂)에 올랐습니다. 당신이 몸 던진 남강물의 발원지인 대지리산, 그 상상봉인 천황봉이 백설을 입었을 때 장터목 산장쯤에서 검푸른 동천(冬天)을 배경으로 올려다본 인상이 논개 당신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있던 무렵의 문민들이 당신의 이 세상 신분에 붙들렸음인지 당신에 관한 기록이 극소함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몸으로 살아온 백성들의 구전(口傳)보다 더 진실한 기록은 없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한 방도로서 4갑술생(四甲戌生)인 당신의 명리(命理)를 주역(周易)의 대가인 서울의 초당(草堂) 선생에게 물었습니다. 나무와 불의 교환으로 찬연한 영화 속에서 쓰러질 것이로되, 초년에 물을 만나 못다 탄 에너지가 영계(靈界)에서 빛을 발하여 민족과 함께 천년유향(千年遺香)한다는 줄거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정신사의 여왕으로 등극한 당신은 못난 후인들인 우리들에게 주실 것이 있습니다.
    논개 당신이 아직도 온존하고 있는 영력으로 당신이 손댔던 극일(克日)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통일의 길로 채찍질해 주시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당신이 남강 물에 몸 던진 칠석날입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있을 때 돌봐주고, 사랑하였으며, 소명(召命) 완수의 기회를 열어준 의병장이었으며, 경상 우병사(右兵使)였던 최경회(崔慶會) 장군의 혼백을 이 자리에 불러 주십시오. 그리고 저 세상으로 간 그날 홍수의 강바닥을 훑어 함안(咸安) 지수(芝水)에서부터 적진 속 300리의 하절기(夏節期)를 사흘 밤 사흘 낮 걸려, 고향장수로 넘어가는 육십령(六十嶺) 아래의 이 객지에 눕게 해준, 같은 고향인 장수 의병임에 틀림없는 그 장심(壯心)과 순정의 젊은이들의 면면을 논개 당신은 알 것입니다.
    그 혼백들도 이 자리에 불러 주십시오.

    논개, 당신을 흠모하고 나라 위한 걱정을 같이하는 처사 허문도•처사 노호길•처사 정채근과 아홉 벗이 요즘 좋다는 로얄살루트 한잔 올리고 제문을 드리오니 흠향하시고, 이 정성을 살펴주소서. <1996년 칠석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