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서출판 동문선 신성대 대표ⓒ
    ▲ 도서출판 동문선 신성대 대표ⓒ
    무예의 기술 내용은 크게 도수기술(徒手技術)과 병기기술(兵器技術)로 나눌 수 있다. 흔히 이 도수 기술을 권법(拳法)이라 부르는데, 이는 병기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기초가 된다. 물론 맨손으로 싸우는 일은 간혹 전투 중 돌발적인 상황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무예인들은 반드시 평소에 도수기술을 익혀두어야 한다. 물론 때로는 호신술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결코 맨손으로 적과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인류가 도구를 다루기 시작한 이래 맨손으로 사냥이나 전투를 치른 적 없다.
     
    그리고 이러한 맨손 기술은 평소에는 운동과 오락의 기능을 겸하였다. 중국의 한(漢)대에는 각지에 도시가 형성되면서 궁중은 말할 것도 없고 민간에까지도 각저(角抵), 수박(手搏) 등 맨손 기술이 매우 성행하였으며, 이를 많은 고분 벽화에 남겼는데, 한(漢)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각저희(角抵戱), 수박희(手搏戱)라 하여 공연적인 대련의 내용이 가미되면서 각종 궁중 연회의 단골 오락 종목으로 성행하기도 했다. 당연히 민간에서도 인기가 있는 볼거리였다.
     
    각저(角抵)는 글자 그대로 뿔(머리)을 맞대고 힘과 기술을 겨루는 운동으로 각력(角力), 상박(相撲) 등으로 불렸으며, 오늘날의 레슬링이나 씨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수박(手搏)은 도수박타(徒手搏打)의 줄임말로서, 손으로 치고 때리는 기술을 말한다. 상박(相搏), 백타(白打), 권박(拳搏), 권술(拳術) 등으로 불렸으며, 오늘날의 태권도, 가라테 등과 유사한 것들을 말한다. 그리고 그 중간 쯤 되는 놀이도 많아 각저와 수박은 때로는 명확한 구분 없이 혼용되기도 하였다.
     
    각저와 수박은 인류 공통의 놀이
     
    그러나 탁견희(택견)와 함께 《해동죽지(海東竹枝)》 〈속악유희(俗樂遊戱)〉편에 나오는 수벽치기(手癖打)는 서로 마주 보고 손뼉을 치고(때리고) 노는 것으로, 권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일 뿐이다. 정확히 어떻게 치고 놀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아이들이 하는 장난 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손뼉치기(손때리기) 놀이를 수박(手搏)과 호칭이 비슷하다 하여 대단히 신비한 우리 민족만의 비전 무예인양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 하겠다.
     
    엄밀한 의미에서 수박(手搏)이나 각저(角抵)류는 무예라 하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일반명사로서 수박과 각저일 뿐이다. 이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전 세계에 공통으로 존재했던 체육이자 놀이였다. 마을이나 군영에서 힘자랑으로 행해지던 민속놀이였던 것이다. 또한 궁중 연회에서 행해질 때에는 거의 잡기(雜技) 수준의 놀이였다. 굳이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고려나 조선의 왕조실록에는 왕들이 수박과 각저를 즐겼다는 기록이 많이 실려 있다. 거의 대부분이 궁중연회 중 오락으로 즐겼었다. 당연히 볼거리 행사였지 결코 무예로서 행해진 것이 아니다.
     
    물론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든 왕들은 군사나 장수들의 무예를 시험하는 행사를 자주 열었다. 그때는 수박이나 각저, 그리고 격구 등도 함께 행했지만 주목적은 활쏘기나 창검술 등의 정식 무예였다. 그러면 궁중연회에서는 왜 이런 무예 시연을 하지 않고 수박희나 각저희처럼 잡기들만 구경하였을까? 왕이나 외국 사신들이 즐기는 연회장 안으로 어느 누구도 칼 한 자루 들고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형화 되지 않은 기예는 고유명사를 붙이지 않는다.
     
    수박이나 각저에 대한 구체적인 동작의 기록이나 어떤 정형화된 법식이 전혀 남아 있지를 않다. 그러니 각 시대마다 내용이 똑같았다고 할 수 없다. 해서 특정 기예에 부여된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이다. 무예로서의 법식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일종의 유희로서 먼 고대로부터 인류가 나름대로 즐겨온 일종의 스포츠였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그 형식도 자유롭게 변형되었을 것이며, 보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과장되거나 곡예화된 기술을 구사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십팔기에도 '권법(拳法)'이 정식 무예 종목으로 올라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수박이나 각저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나중에 병장 무예를 익히기 위한 법(法)과 식(式)을 갖추어 기예로서 정식 이름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예도보통지》를 만들면서 그 부록으로 군사 오락인 마상재(馬上才)와 격구(擊毬)를 실어 놓았다. 그렇지만 고려 및 조선의 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언급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박이나 각저는 다루지 않았다. 만약 당시에 그것들을 무예, 혹은 군사 체육으로라도 인식했다면, 2백 여 년 동안 그토록 우리 무예를 찾고 또 체계화하려고 애썼던 조정에서 그냥 두었을 리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수박희나 각저희를 행하였다는 기록은 여러 차례 나오지만, 역대 무예 행사나 군사(軍事)에 관한 기록을 정리해 놓은 〈병기총서(兵技總廻)〉편에서는 무예청 군사들이 각저 시합을 하였다는 단 한 번의 언급만이 있을 뿐이며, 또 〈권법(拳法)〉편의 '案'(지금의 참고 자료 또는 주석에 해당)에서 《한서(漢書)》에 나오는 "수박(手搏)은 손바닥으로 힘을 겨루는 것(팔씨름)으로 무희(武戱)가 된다"고 한 예를 실었을 뿐이다. 정확한 언급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무예와 놀이를 구분하지 못했을 만큼 무지했다고 생각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권법 자체만으로 무예(무술)라 하지 않아
     
    아직 무예와 권법에 대한 구분을 하지 못하는 한국의 권법류 책에서는 호신용 권법을 무술, 무예라 칭하지만, 중국의 권법류 책에서는 함부로 무술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십팔기 중의 일기인 <권법>은 원래 중국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다른 기예 여섯 가지와 함께 실려 있었다. 임란 중 선조의 명으로 만든 《무예제보(武藝諸譜)》 편찬 시에는 이 <권법>을 제외한 6기만을 실었다. 당시에는 전란 중이라 당장 무기를 다루는 기술들이 급했지, 체계적으로 군사들을 훈련시킬 경황이 없었던 탓이리라. 이후 광해군 때 편찬된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에는 누락되었던 <권법>이 실려 있다.
     
    그렇다면 십팔기 중의 <권법>과 보통의 권법은 어떻게 다른가? 도수기술을 다시 구분하자면 ‘무예로서의 권법’과 ‘호신술로서의 권술’로 (편의상) 구분할 수 있다. 권법의 목적은 건신(健身)과 호신(護身)에만 있지 않고 무예, 즉 병장기를 다루기 위한 기초적인 신체 단련에 있다고 정의할 수 있다. 《무예도보통지》에서도 ‘권법은 그 자체만으로는 무예가 될 수는 없지만 수족과 지체를 단련시켜 입예(入藝)의 문이 된다’고 했다. 당연히 최종 목적은 적을 살상키 위한 한 무기를 다루는 기예, 즉 무예 습득이다.
     
    이에 비해 일반 호신술로서의 권술은 그 자체만으로 목적을 다한다. 다시 말해 수족을 단련시켜 맨주먹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상대를 제압하는 데에 필요한 기술이라는 말이다. 더하여 살상을 위한 무예를 익힐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술 또한 맨손의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로만 짜여 진다. 해서 태권도, 가라테, 합기도, 씨름, 권투 등의 기술로는 병장기를 다루기 어려울 뿐더러 굳이 다룰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의 한계에 대한 괜한 아쉬움으로 최고의 무예는 남을 죽이지 않는 상생 혹은 활법의 기술이라는 등의 고매한 철학적 논리를 펼치는 것은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다시 강조하지만 무예는 종교가 아니다. 과학이다.
     
    무예적 권법과 호신용 권술의 차이의 실제
     
  • ▲ 권법 자료이미지.     © 한국무예신문
    ▲ 권법 자료이미지. © 한국무예신문
    십팔기 중 <권법>을 익히게 되면 다른 <본국검>, <곤봉>, <장창>, <월도> 등을 익히는 데 매우 유용해진다. 이 <권법>에는 이미 자(刺), 감(砍), 격(擊)의 무기를 다루는 기초 동작들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거꾸로 <본국검>을 익힌 자가 칼을 버리고 그 동작을 하게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꽤 훌륭한 권법, 이를테면 <본국권(本國拳)>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일반 호신용 권술로는 <권법>처럼 창법이나 검법을 예비하기 무척 어렵다.
     
    이처럼 같은 도수기술이라 해도 무예로서의 ‘권법’과 호신술로서의 ‘권술’은 그 목적과 구성원리가 전혀 다르다. 물론 권법에서 권술이 나왔는지, 권술이 권법으로 발전했는지는 알 수 없고, 또 그 중간 성격의 권법류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태권도, 택견 등에는 무예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는 거다. 이는 실기면에서도 또 역사적인 사실로도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호신용 맨손 권술 한가지만을 익힌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아무리 해줘도 이해 못할 테지만, 적어도 권법을 포함해 서너 가지의 명가의 무기술을 익혀 본 사람이라면 이해가 갈 것이다.
     
    혹여 태권도나 택견 등 호신용 권술류를 배운 사람이 무예로서의 권법과의 차이를 느껴보고 싶다면, 십팔기 중 <권법>만이라도 한번 익혀보길 권한다. 그 후 창이나 칼을 잡아보면 필자의 설명을 확실하게 이해할 것이다. 또 검법(劍法)과 도법(刀法)을 구분조차 못하는 일부 검도인들이 십팔기 중 <본국검>과 <조선세법(예도)>를 복원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정확한지 여부는 차치하고 도무지 검법으로 봐주기 힘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먼저 <권법>을 익히기 전에는 절대 그 세법(勢法)을 온전히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예는 끊임없이 진화한다.
     
    필자가 이처럼 무예, 무술, 놀이, 체육을 구태여 구분하려는 뜻은 굳이 어떤 종목을 폄훼하자거나 종목마다 그 가치의 우열을 가리자는 것이 아니다. 이미 전통무예진흥법까지 만들어졌고,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기능보유자 본인조차도 무예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민속놀이를 무예종목으로 지정한데다가 내친 김에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하였다. 어찌되었든 이제 한국은 전통무예의 세계적인 메카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무예전반에 대한 역사적 이론적 탐색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지사, 학문적 연구 또한 한국이 주도적으로 해나가게 될 것이기에 그 길닦음에 힘을 보태고자 할 뿐이다.
     
    학문을 하자면 어느 분야든 그 영역과 개념, 그리고 그 역사부터 정확히 밝히는 것이 가장 우선이 아닌가. 그 과정에서 질정과 비판은 당연한 것. 그런 바탕 위에 놀이가 무예가 되든, 무예가 체육이 되든, 서로 다른 것끼리 융합해서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든, 결과적으로 정직하고 당당할 수 있고, 바른 무예정신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십팔기 중 일부 기예들이 여타 다른 무예계로 전해져 익혀지고 있으며, 또한 전통연희, 예능계에도 빠르게 흡수되어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활용되고 있다. 무예든 문화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법이다. 여기서 진화란 반드시 발전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헌데 다른 예능계에선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고 십팔기를 배워 자기 것으로 승화시키고 있는데 비해 유독 무예계만은 그 습득과정을 정직하게 밝히지 못하고 황당한 전승족보를 꾸미거나 구구한 전설을 만들어 변명해대기에 급급하다. 아무렴 십팔기는 처음부터 국가의 자산이니 한국인이면 누구나 익혀 즐길 권리가 있다. 그러니 정정당당하게 배우고 익히고 전해져야 한다.
     
    이미 다른 무예, 무술, 체육, 놀이를 익혔다 해서 더하여 십팔기를 배우는 것을 수치스러워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당연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래야 제대로 배운다. 그게 무예인의 바른 자세이고 십팔기 정신이다. 그때 그런 정신으로 조상들이 십팔기를 만들었다. 현재 어떤 무예를 수련하든, 조상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준 전통무예를 통해 보다 나은 지혜를 빌려 제 것을 승화 발전시키는 것을 망설이는 것은 어리석음이지 지조가 아니다. 그러지 못함이 오히려 부끄럽다 하겠다. 우리 조상들은 비록 임란 병란 때 외적에 쫓기면서 그들의 기예까지 받아들였지만 결코 옹졸하지 않았다.
     
    배움에 옹졸함은 무(武)의 정신이 아니다.
     
    일평생 한 가지만을 익혀 최고수가 되고 도통하겠다는 것도 갸륵한 용기일 수 있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무예적인 사고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사고, 문(文)적인 사고에 가깝다고 하겠다. 혹 한국적 선비의 고집, 순결주의, 순백주의에 빠져 교조적 사고로 굳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해 볼 필요도 있다. 고대 현대를 막론하고 무예는 언제나 유연해야 했다. 자기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보다 나은 무기나 기예가 있으면 즉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안 그랬다간 제 목숨, 제 민족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지 않은가?
     
    한국인이니까 양식이나 육식은 안 먹고 오르지 한식과 채식만 먹겠다든가, 한복만 입겠다거나, 학교에 가서 국어와 국사만 배우고 영어, 한문, 일본사, 중국사, 세계사는 안 배우겠다고 고집하는 바와 다를 것 없지 않은가? 국사만 능통하면 된다는 선생과 더하여 세계사까지 두루 섭렵한 선생 중 누가 더 균형 잡히고 유연하고 폭넓은 사고를 가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 무예가 현대에는 그 종류가 너무 많고 또 취미생활의 일종이다 보니 그 중 어느 하나만을 배우기도 벅찰 수 있다. 허나 그렇다고 사고까지 그 하나에 고정되는 것은 자칫 쓸데없는 편견과 편협함을 가져올 수 있다. 이는 무예인은 물론 예능인, 종교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병폐이다.
     
    의심이 없으면 과학이 아니다. 그건 바보다. 비록 스승이 가르친 것이라 해도 맹목적으로 따르고 반복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여 잘못된 점은 고치거나 버리고, 보다 나은 기예나 기법, 그리고 원리를 터득해나가는 것이 무예인의 바른 자세라 하겠다. 혹여 그런 것을 두고 변절이니 배신이니 한다면 그 스승부터 단칼에 목을 칠 일이다. 취미생활 혹은 생업수단으로서의 무예를 익히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럴 것까진 없겠지만, 진정 이 시대에 무예인의 길을 가자면 사해를 두루 물어 그 깊이를 더하고 그 폭을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 스승은 많을수록 좋다. 배움은 결코 흉이 아니다. 미련함과 고지식함이 흉이다. 적어도 무(武)의 세계에서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