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동의 최루탄폭파는 민주-민노 야권연대의 산물
  • '사상의 자유' 거론하던 김선동의 최루탄 테러 배후는?

    국회본회의장내 최루탄 테러 사건을 두고 종북좌파 정당 민노당과의 야권연대를 추진한 민주당 지도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4.27 보선에서 북한 3대 세습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며 순천보선에 출마한 민노당의 김선동 후보를 ´야권연대´후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공천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순천서 민주당 무공천을 단행, 민노당에게 후보를 양보하고 정작 본인은 분당에 출마한 민주당 손학규 대표의 책임이 제일 크다.

    당시 순천에서 재선을 지냈던 김경재 후보는 각종 방송토론회에서 민노당 김선동 후보에게 북한 김정일 정권 3대 세습문제와 관련해 입장표명을 해 줄 것을 누차 요청한 바 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3번이나 요청했으나, 김선동 후보는 무슨 이유에서인가 김경재 후보의 질문을 ´색깔론´으로 치부하며 3차례 모두 답변을 회피했다. 또 김경재 후보의 이런 질문에 당시 <한겨레>와 <오마이뉴스> 등 좌파성향의 매체에선 덩달아 ´색깔론´을 부추킨다며 오히려 김경재 후보를 비난했다. 이렇게 해서 당선된 후보가 지금 대한민국 의정단상을 최루탄으로 유린하고 국회를 폭파시켜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불과 1년여전 대한민국 해상영토인 백령도 인근에선 천안함 침몰 사건이 있었고, 그 뒤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온 나라가 안보위기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지가 1년째다. 그런 나라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남한 동족에 포를 쏴대는 북한정권의 실상과 세습문제에 대한 질문이 ´색깔론´으로 치부할 성격인지 묻고 싶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 이후 대북문제에 대해 강경입장을 취하고 국제사회와 연대한 것도 그럼 ´색깔론´인가?

    누구나 젊었을 땐 혁명을 꿈꾼다. 혁명의 이상에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 자유와 평등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등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멋진 형용사가 따라 다닌다. 혈기왕성한 20대 젊은이들의 심리를 자극할 수밖에 없다. 혁명은 때로는 지나치게 미화된 경우도 많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우상처럼 떠 받들고 있는 아르헨티나 의사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의 이미지 사진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에서다.

    체 게바라와 같이 혁명을 주도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지난 4월 19일 46년간 앉아 있던 최고권좌에서 물러나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물려줬다. 그와 같이 쿠바혁명에 나섰던 카스트로의 1호 동지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밀림에서 사살된 것과 대조적이다.

    ´체 게바라´ 뿐만 아니라 과거 전 세계의 수많은 혁명인사들이 그들이 꿈꿔왔던 ´혁명의 이상과 숭고한 가치´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문제는 그들이 그렇게 꿈꿔왔던 그 혁명의 가치와 이상이 나중에 무색할 정도로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설령 혁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혁명을 주도한 세력간의 권력다툼으로 변질돼 명운을 달리한 경우가 허다하게 많은 것은 지나간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권력투쟁과정에서 ´피의 숙청´의 대상은 ´혁명동지´

    대표적인 경우가 북한이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소련의 슈티코프를 등에 업은 김일성은 당시 국내외에서 활약했던 여러 공산주의 세력들과 손을 잡고 북한 공산화에 성공한다.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김일성은 6.25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조선공산당의 원조인 박헌영을 미제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며 본격적인 권력구축에 나선다. 남로당 제거한 성공한 김일성은 다시 1967년 갑산파를 제거하고 뒤이어 빨치산파를 제거한다. 그 뒤 60년대말 주체사상 확립과정에서 소련파와 연안파를 제거하는데 성공하고 김정일 후계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마침내 김씨왕조 독재 세습체제를 구축한다.

    그런 과정에 때로는 김일성에게 충성경쟁을 둘러싸고 권력다툼이 재현되기도 했지만 결과론적으로 김일성의 후광아래 김정일이 권력 조정역할을 자임해 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마침내 군부마저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권력세습 구축과정은 혁명을 도모한 동지들에 대한 끊임없는´피의 숙청´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 ´피의 숙청´이 다시 김정은 세습과정에 다시 등장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연평도 공격이 이뤄졌다는 것이 대북전문가들의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노당 김선동 후보가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며 그 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얘길 안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나아가 그는 ´사상의 자유´를 거론할 자격이 없다.

    일각에 의하면 김선동 후보는 과거 NL계열의 자주파 속칭 ´주사파´ 인사에 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주사파란 북한 김일성이 김일성대학교 총장을 지낸 황장엽을 통해 북한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사상적 체계를 집대성한 이론을 신봉하는 세력들이다.

    정통 공산주의 이론인 마르크스 -레닌주의와는 별개로 김일성을 우상화시킨 이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주사파는 80년대 학생운동권의 주류세력인 NL그룹을 장악하게 된다. 특히 고려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NL(민족해방)운동권 진영은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모순구조가 분단문제에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통일을 최우선시 하고 있다. 즉 한국에서 민족해방운동이야 말로 사회모순을 타파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유일한 길이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6.25는 미제의 볼모로 잡힌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한 해방전쟁이 될 수 밖에 없고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남침은 당연히 정당화 될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주사파는 북한 김일성 정권이 남한 이승만 정권에 비해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북한은 해방직후 친일파를 숙청한 반면 남한에선 미군정이 친일파를 그대로 등용했기 때문이라는 억지논리를 동원하고 있다.

    이같은 이유에서 민노당의 핵심인 NL계열의 ´주사파´는 북한 김일성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해방전사´로 활동하겠다는 서약서까지 작성해 김일성에게 진상하는 등, 이른바 과거 ´남조선로동당´의 후예나 다름 없는 세력들로 이뤄져 있다.

    당시 주체사상에 심취된 많은 인사들이 나중에 전향, 과거의 잘못된 사상을 반성하고 오히려 대북인권운동에 나서거나 뉴라이트 운동에 합류한 인사도 있다.

    사상의 자유 강조하며 북한 3대세습 문제 침묵했던 김선동의 국회테러는 예견된 사건

    문제는 국회의원에 출마한 인사라면 과거 추종했던 노선을 아직도 고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젊은 시절 꿈꾸었던 혁명에 심취돼 저지른 잘못된 판단이었는 지에 대해 정확한 입장을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렇다 할 해명이 없다는 점이다.

    민노당 지도부는 물론이고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을 비롯해 국참당 유시민 대표, 국민의 명령 문성근 대표 등 많은 야권진영 인사들이 선거 당시 순천에 내려와 야권연대에 한 목소리를 냈던 것을 기자는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야권연대' 라는 명분하에 4.27 선거 당시 순천에서 민노당 김선동 후보를 향해 ´이름도 명예도 없이 싸운 인사´였다는 김선동의 과거 이력만 거론했을 뿐 그가 어떤 사상과 이념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선 전혀 언급조차 없었다.

    당시 기자는  그가 무명시절에서 벗어나 국회의원이라는 ´권좌의 길´로 들어서고자 한다면 그가 과거 추구했던 ´혁명의 길´에 대한 입장표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치기 어린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가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 '혁명의 길'에 대한 고뇌섞인 답변은 북한 김정일 3대 세습문제에 대한 입장과도 관련돼 있었을 것이다.

    김선동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끝내 입장표명을 거부했다. 그리고 어제 국회본회의장에서 최루탄을 갖고 자폭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테러를 자행한 민노당 후보를 ´야권연대´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공천하다시피 한 손학규 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지도부인 정동영, 박지원 여기에 야권연대의 주역인 문성근과 유시민 역시 그런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