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인의 평등과 노예의 평등

    자유인의 평등은 선택적이고 다채롭지만, 노예의 평등은 강제적이고 획일적이다.

    최성재

    평등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유인의 평등이요, 다른 하나는 노예의 평등이다.

    흔히 기회(출발선)의 평등과 결과(결승선)의 평등으로 나누는데, 이것은 정확한 나눔이 아니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기회의 평등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고향이 어디냐에 따라, 국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재능이 어떠냐에 따라,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출발선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나눔은 진보연(進步然)하는 자들의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이건희씨의 아들과 노숙자씨의 아들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느냐고 그들은 비아냥거린다. 
     
    이런 자들일수록 김정일의 아들과 월남자의 아들이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로 여긴다. 이건희 아들의 3대 세습이나 김정일 아들의 3대 세습이나 다를 게 뭐냐며, 스스로의 똑똑함에 내심 혀를 내두르며, 종주먹을 내지른다.

    혹 자기 아들이나 딸이 외고 출신이면, 확성기를 들고 입으로는 평준화를 울부짖지만, 이마에는 크게 ‘가문의 영광’을 써 붙이고 동네방네 쏘다닌다. 남이야 돌 반지를 팔아 한 푼의 달러라도 누란의 위기에 선 조국에 바치거나 말거나, 원수의 나라 미국으로 수백만 달러를 보내 유난히 똑똑한 자기 아들이 명문 사립고와 명문 사립대를 졸업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해서 김정일 ‘장군님께’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를 ‘썩을’ 군대에 합법적으로 안 갔다 왔으면 한다. 

    그러다 미식축구 선수만큼 어깨에 뽕을 넣고, 크게 출세할 기미가 보이는 자의 아들이 엄연히 한국 국적을 갖고도 ‘민중’의 아들들은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에 안 갔다 왔다면, 팔짝팔짝 뛸게 뻔하다. 

    이들은 물귀신과도 기꺼이 손을 잡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5년도 좋고 10년도 좋다!
     
    평준화와 무상급식도 기회의 평등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부모 또는 보호자의 재산이나 지위에 무관하게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교육을 제공하고 무상으로 똑같은 식사를 제공하는 것도 기회의 평등이라면 기회의 평등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의무교육과 평준화, 식량배급과 무상급식은 각각 어떻게 다를까. 

    각 나라마다 기간의 차이는 있지만 의무교육은 자본주의 체제든 공산주의 체제든 누구나 받아들인다. 그것은 기회의 평등이냐, 결과의 평등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식량배급은 다르다. 그것은 이념과 무관하게 전시체제에서 일시적으로 실시했다. 한때는 모든 공산국가가 식량배급을 실시했지만, 지금은 중국처럼 설령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유지하더라도 식사는 본인의 노력과 선택에 맡긴다.

    이론상으로는 누구도 굶는 사람이 없고 누구나 똑같은 식단을 제공 받는다면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이 동시에 달성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체제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제일 많았다. 가장 비근한 예로는 1990년대 중후반의 북한이다. 
     
    평등을 입게 달고 사는 공산국가에서도 애초부터 식량배급은 권력의 순위에 따라 이뤄졌다. 국가 노예로 전락한 절대다수의 무지렁이만이 부실한 식사를 똑같이 제공받았을 뿐, 권력자들은 ‘내’ 돈 아닌 돈으로, 공짜로 황제처럼 먹었다. 처음부터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이 둘 다 허물어졌다.

    왜 그랬을까. 양떼를 사막으로 몰고 가는 권력자 외에는 아무도 주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예는 시키는 대로만 일하고 최소한의 일만 한다. 맞지 않을 만큼만 일한다. 따라서 생산이 늘어나지 않는다. 또한 공산당 주인들은 실상 주인도 아니었다. 조폭 사회의 중간 두목이나 행동대원 신세였다.

    주인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든 봉건주의 사회든, 주인은 자기 책임 하에 재산을 늘리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재산을 공유하기 때문에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득볼 게 없다. 오로지 권력의 사다리만 잘 오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게 따라온다. 공유재산도 권력서열만큼 ‘내’ 재산이 된다. 그래서 공산국가에서는 권력서열이 정글의 침팬지 사회보다 더 엄격하게 지켜진다. 
     
    나폴레옹이 처음 실시한 의무교육이 현대사회에서 이념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과거에 1% 왕족과 귀족과 승려만이 독점하던 지식에 모든 국민이 다가갈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전체 국민을 봉건시대의 왕족과 귀족과 승려로 대접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읽고 쓰고 셈할 수 있으면 누구나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자유인이 될 수 있다. 그 다음은 자신의 재능과 노력과 가치관에 의해서 각자 자유의 길을 갈 수 있다.

    그렇게 철들 나이가 공자가 말한 십유오(十有五) 곧 15살 무렵이다. 이때부터는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 그런 도덕률을 익혀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게 자유인이다. 따라서 이제는 예비성인(成人)으로서 그들은 학교도 당연히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은 어린애 또는 노예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2세를 생산할 나이가 되었으니까, 그들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그들을 정신적인 노예로 만드는 음험한 작업이다.

    이름만 시민이지 실은 고만고만한 노예로 순치된다. 똑같은 교육과정과 똑같은 문제로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말하는 기계 노예로, 로봇으로 제작된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따지고 대드는 자유인이 되기 어렵다. 그러면 평준화 권력자가 더 이상 노예의 주인 노릇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평준화 체제에서는 거대한 관료 조직이 불가결하다.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을 동시에 제공한다는 그럴 듯한 명분 뒤에는 관료 조직 또는 이념 집단의 거대한 이익이 도사리고 있다. 교육부와 교육청과 전교조는 평준화라면 한 통속이 된다. 왜 그럴까. 교육부와 교육청은 관료조직으로서 무오류의 권력집단으로 군림할 수 있고, 전교조는 선한 사마리아 역을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전교조는 교육부와 교육청을 장악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일률적인 무상급식은 공산체제의 식량배급과 유사하다. 어딘가 다른 곳에 써야 할 세금으로 공짜 밥을 먹여 주면, 마치 ‘제’ 돈을 낸 것처럼 교육 권력자는 생색을 낼 수 있다. 가만히 있어도 머리 뒤로 해무리보다 거대한 후광이 빛난다.

    ‘자비로운 황제시여!’ 반면에 학생과 학부모는 거지가 되고 노예가 된다. 주인이나 자유인이 될 수가 없다. 북한에서는 탁아소의 유아나 유치원 어린애도 밥 한 숟가락, 알사탕 한 개, 옥수수 한 알을 먹기 전에 반드시 ‘수령님과 장군님’의 초상화를 보면서 또랑또랑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실은 독재자가, 조폭 두목이 100% 빼앗아 가고 그 중에서 1%도 안 주는 데도 불구하고 최상급의 감사를 바친다.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자들은 바로 이런 효과를 노린다. ‘내’ 돈 한 푼 안 쓰고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향유한다. 정말 머리 좋은 자들이다. 사악한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