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겪은 4.19

    4.19의거 51주년을 맞아 수유리 4.19묘역 앞에서 생뚱맞은 일이 벌어졌다.
    건국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4.19로 희생된 영령들에게 사죄의 참배를 하겠다는데 이른바 4.19혁명(?)단체 회원들이 안된다고 가로막은 승강이다.
    이 사건이 생뚱맞다고 표현한 이유는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의거는 당사자인 이기붕 일가의 자살, 최인규, 곽영주의 사형, 현장책임자들의 형사처벌로 매듭지어졌고 이승만 대통령은 도의적 책임을 지고 하야했기 때문이다.

  •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에는 이미 국민 앞에 사죄의 뜻을 표시했고 이화장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야인이라며 대통령 전용차 이용을 사양했으나 시민들이 간곡하게 권하는 등 보기 좋게 매듭지어졌다.
    그뿐 아니라 새로 구성된 6대 국회는 헌법전문에 4.19 민주의거 정신을 명시하여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대한민국 건국정신과 같은 토양임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무리 고양이 눈깔처럼 변하는 세태라지만 당시 학생의거의 주역들이 살아있고 사실의 기록들이 엄존하는데, 무슨 ‘4.19올레길 행진’이니 ‘사죄참배’ 공방등 해프닝이 벌어지니 유감스럽기 그지 없다.

    필자는 당시 동국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재학중 4.19 의거의 전위에 서서 경무대 앞까지 현장을 누볐던 한사람으로서, 4.19의거의 진실과 정신이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당시를 회고해 보고자 한다.

    3.15부정선거를 고향인 해남에서 목도하고 개학후 서울로 올라온 필자는 4월초 형사소송법 강의 시간에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김모 대법관에게 이번 대통령 선거 무효소송이 어떻게 처리될 것인지 추궁하자 그가 답변을 못하고 방뇨한 사건이 있었다.
    이와 같이 대학가의 모든 구성원들이 3.15부정선거에 대하여 불만이 팽배해 있던 때, 4월18일 고려대학생들이 국회앞서 항의 데모를 하고 돌아가다가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화랑동지회’라는 정치깡패들에게 피습당했다. 이튿날 각대학은 이심전심으로 항의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동국대에서는 4월19일 화요일 첫 교시는 법학과 2년 국제법 강의가 있었다. 마침 정치과 선배 이우대-유인제가 나를 찾아와 ‘서울시내 모든 대학들이 나온다’며 학생 동원을 부탁했다. 필자는 강의를 시작하는 김기수 교수에게 휴강을 요청하자 흔쾌히 허락하여 교우들과 함깨 교정에 모였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만류했지만 우리는 학교 깃발을 들고 교문을 나섰을때 저지하는 경찰의 수에 밀려 몸싸움을 벌였다.
     
    당시 우리는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김주열군 죽음의 책임자 처벌하라”는 구호를 반복 외치며 명동입구의 내무부 청사(현재 외환은행 본점자리)를 경유 시청앞 광장에 이르렀다. 거기엔 문리대생들이 먼저 와있어 우리는 국회앞으로 갔다가 중앙청 앞으로 구호를 외치며 행진, 지금 교보문고 앞 세종로에서 바리케이드를 친 경찰과 대치했다.
    그때 마침 도로포장 공사용으로 퍼 놓은 돌멩이를 주워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자 경찰 바리케이드가 무너졌다.
    “경무대로 가자”고 외치며 경복궁 담까지 진출했을 때 경찰이 처음으로 최루탄을 쏘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남풍이 불어와 최루가스는 경찰쪽으로 번지자 마스크가 없던 경찰대가 흩어졌다. 이때다 하고 우리는 공사중인 하수도 관을 굴리면서 바리케이드를 돌파했다.
    기세를 올린 우리는 멈춰선 전차(지상 궤도전차)를 밀고 전진하여 경무대 방향 바리케이드마저 밀어버렸다.
    그 순간, 콩 볶는 총소리가 울렸다. 어디선가 트럭 두 대가 나타나 전투복 차림의 경찰들이 내리더니 2열 횡대로 서서 발포한 것이었다. 선두에 섰던 우리는 효자동과 창성동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뒤에 알았지만 현장에 연좌하고 있던 서울의대생들과 동성고 학생들이 희생되었다.
    우리들의 발을 겨냥하여 사격한 것이 앉아있던 학생들에게 맞은 것이었다. 동국대 노희두 교우도 희생되었다.
    잠시 피했던 우리는 옆집 문짝을 떼어내어 총에 맞아 쓰러진 학생들을 떠메고 경찰병원으로 데려가 응급치료를 받게 하였는데 그때 계엄령이 소급 공포되었다.
    학교도 휴교 공고가 나붙고 나는 이상언 동지와 21일부터 부상학생들을 위한 모금활동을 벌였다. 25일 의연금 모금활동중 데모가 재발하여 국회 앞에 진출한 교수단 데모대에 합류하였다.
    그 후, 노희두 동지의 추모비 건립문제와 학생회 간부들의 불투명한 처사에 대한 책임추궁문제 등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이런 학내분규로 인하며 이듬해 3월 퇴교당했다가 12월 복교되어 등교해보니, 4.19 유공자 포상은 어이없게도 데모를 막았던 학생회 간부들이 차지한 뒤였다. 그렇다고 이를 새삼 시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부터 민주화운동에 매진하다가 3선개헌반대, 긴급조치 규탄, 5.18포고령 위반등으로 4년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복역중이던 나는 우리 민주화운동 진영에 좌익세력이 적지않게 침투한 것을 발견하고 크게 놀랐다. 옥중에서 좌익사상교육이 비밀리에 진행되다니. 83년 출소이후엔 그들과 연을 끊고 보수 우익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함께 수형생활하던 좌익들이 지금 대학등 각곳에서 이른바 ‘민주인사’로 행세하며 좌편향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위기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그뿐인가. 지난 4.19 기념행사에서 4.19단체 대표로 성명서를 낭독하는 사람을 보니 아연실색했다. 4.19당시 데모에 참가하지도 않았던 사람을 서울서 고향에 내려왔을때 손에 붕대를 칭칭 감고 빨간 소독약을 부어 “이 사람은 시위를 하다가 부상을 입은 4.19부상자”라고 하며 차를 타고 전주 시내를 누볐다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4.19 정치 쇼는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경식 /자유언론수호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