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덕산 62용사들'의 유해를 현장에서 보존하자! 
      
     중공군에 포위된 채, 참호와 陣地를 死守하다가 죽은 이 영웅들의 유해 위에 유리판을 깔고 기념관을 만들어 국민정신교육의 도장으로 삼자. 
    趙甲濟   
     
     1951년 4월 중공군의 대공세 때, 포위된 高地(철원군 광덕산)에서 참호를 파고 밀려오는 중공군과 끝까지 싸우다가 戰死한 수십 명의 국군장병 유해가 최근 그 참호속에서 발굴되었다. 유해가 참호속에서 발견된 것은 이들이 후퇴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우다가 敵의 근접 사격이나 백병전으로 숨진 때문으로 추정된다.
     
     屍身은 뼈만 남았으나 이들이 남긴 수통, 버클 등 유품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생존자 증언과 戰史기록을 참고로 하면 광덕산의 62 將兵들이 죽어간 과정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 감식으로 이들의 신원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병들이 처했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國共內戰으로 단련된 중공군은 산악전투에 능숙했다. 기마부대로 重火器를 싣고 능선을 따라 행군하기도 했다. 야간기습 작전에도 도사들이었다.
    광덕산에서 戰死한 장병들은 국군 6사단 소속이었다. 6사단은 6.25 남침 때 춘천을 사흘간 방어, 북괴군의 서울포위 작전을 수포로 돌림으로써 한국을 구한 사단이다. 이 사단도 압도적 다수의 중공군에 포위당하였다.

    식량과 탄약의 보급도 끊어졌을 것이다.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못한 상태에서 장병들은 진지를 死守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밀려올라오는 중공군을 향하여 쏘고 또 쏘았지만 그들을 막지 못하였다.

    마지막엔 탄약마저 바닥이 났을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지와 참호를 떠나지 않고 버티다가 사살되고, 다수는 참호속으로 뛰어든 중공군과 총검으로 백병전을 하다가 죽었을 것이다. 중공군 시신도 10여구 발굴되었다고 한다.
     
     戰史의 기록에 의하면 4월22일부터 이틀간 6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괴멸적 타격을 받고 가평까지 후퇴하였다. 당시 사단장은 張都暎. 6사단이 후퇴하자 옆구리가 노출된 美1해병사단도 춘천 북방으로 철수하였다. 6사단이 4월25일에 병력을 수습하니 6,313명뿐이었다. 2000~3000명이 戰死, 실종된 셈이다. 6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로켓포 66문, 對전자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차량 87대의 손실을 보았다. 6사단을 지원하던 美軍 포병도 105밀리 곡사포 15문, 4.2인치 박격포 13문, 242대의 무전기, 73대의 차량을 잃었다. 이런 아수라장 속에서 광덕산에 고립된 6사단 장병들은 戰勢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오로지 명령을 따르면서 陣地와 참호를 死守하다가 쓰러졌던 것이다. 
      
     광덕산 62 勇士의 이야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같은 영화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은 용사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영원히 기록해둘 의무가 있다. 유해가 발굴된 현장을 보존하여 野外 기념관으로 보존하였으면 한다. 감식이 끝난 유해도 가져와서 발굴될 때의 상태 그대로 놓아두고 그 위에 유리판을 덮어 일반인들도 60년 전의 장열한 최후를 實感할 수 있도로 하였으면 한다.

    사람들은 마마도 숨이 멎는 듯한 감동을 느낄 것이다. 이웃한 3, 6사단에 배치되는 신병들은 반드시 이 야외기념관을 참배,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하면 정신교육에도 그저 그만이다.
     
     이 유골들은 대한민국의 평화, 자유, 번영이 공짜가 아니란 사실, 바로 여기 파묻힌 이름 모를 장병들이 흘린 피를 딛고 우리가 웰빙생활에 탐닉하고 있다는 현실을 깨우쳐 줄 것이다.
     
     1차세계 대전의 격전지인 프랑스 베르당에 가면 戰死한 약13만 명분의 獨佛 장병 유골을 모아둔 기념탑이 있다. 베르당 격전엔 쌍방이 약50만 명이나 죽었다. 수습한 유골은 신원도, 국적도 가릴 수가 없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유골이 보존되어 있는 이 기념관은 유리창을 통하여 안에 쌓아놓은 유골을 구경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모윤숙 선생의 詩가 생각난다.
    국방부는 62 용사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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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해발굴 현장 이야기
     
     조선닷컴은 강원도 철원군 광덕산과 상해봉 비탈 인근에서 6·25전쟁 때 전사한 국군 장병 遺骸(유해) 62구가 발견됐다고 2월16일 보도했다. 지난 2010년 9월부터 약 한달 간에 걸쳐 이루어진 유해발굴 작업은 육군 3사단(백골부대)의 주도로 이뤄졌다.
     
      유해는 6·25전쟁 중인 1951년 4월, 중공군의 5차 공세 때 국군 6사단이 적 4개 사단에 맞서 싸우다 1600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된 ‘사창리 전투’ 지역의 가장 북쪽에서 발견됐다.
     
      적탄에 맞아 전사한 듯한 유해와 서로 껴안은 두 구의 유해 등 상당수의 유해들이 敵을 향해 북쪽으로 파 놓은 개인 참호 속에서 발견됐다. 人海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에 맞서 자신이 판 참호를 끝까지 死守하다 최후를 맞은 것이다.
     
      3사단 대대장 이완주(3사26기) 중령은 “발굴된 유해 중 57구가 북쪽을 향한 참호 속에서 발견됐다. 적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선배 전우들은 목숨을 바쳐 高地를 지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3사단 윤재금 일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듯 한 유해의 모습을 본 순간 그가 느꼈을 두려움이 온 몸으로 전해졌다”고 했다.
     
      당시 이 전투에 참여했던 참전용사 金用喆(김용철) 씨는 “전우들 모두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웠고 도망자는 없었다. 2인1조로 5m 간격으로 판 참호에서 명령이 없으면 나올 수도 없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4~5명의 전우가 죽어나가고 새로운 병사로 채워졌다”고 회고했다.
     
      조선닷컴은 ‘국군 장병들의 유해는 중공군 유해 18구와 뒤엉킨 채 발견돼 발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으며, 이것은 당시 전투에서 국군 장병들이 육박전을 불사하며 고지를 사수하려 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국방부 유해발굴단 감식단 관계자는 “지난 10여 년간 중공군 유해가 많이 발견됐지만 아군과 적군이 같은 참호에서 발견된 것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3사단은 1년간을 주변지형과 과거 戰史,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철저한 조사와 준비를 했다. 참전용사인 김용철 씨가 기억을 되살려 발굴에 도움을 줬다. 발굴 장병 120여명은 삽 한 자루를 들고 가파른 능선을 누비며 유해를 찾았다. 1000여 곳을 파고 또 팠으며 흙덩어리를 골라내는 체가 있었지만 하나의 뼛조각도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비볐다고 한다.
     
      발굴 현장에선 유해 말고도 M1소총 탄피와 탄창, 반합과 유리 약병 등 유품 1200점이 나왔다. 총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 '무기가 부족해 옆 戰友(전우)가 전사하면 그 총으로 다시 적과 싸워야 했고 전사한 동료의 시신을 둔 채 총을 거둬가야 했기 때문'이라고 조선닷컴은 말했다.
     
      이완주 대대장은 “전쟁과 그 참상을 겪지 못한 세대들에게 유해발굴처럼 뜻 깊은 정훈교육이 따로 없다. 어렵게 수습한 유골을 태극기로 감싸 내려오는 장병들의 얼굴엔 엄숙감과 비장감이 흘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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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당 기념관 방문기
     
     샴파뉴 지방의 에퍼네이를 출발하여 로렌 지방으로 들어가 베르당까지 가는 길 주변은 풍요한 들판이었다. 독일과 프랑스가 여러번 영토를 주고받은 격전지로 가는 길은 의외로 평화로웠다. 베르당에 가까워오니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의 간판이 자주 나타났다. 1916년에 프랑스와 독일군이 300일간의 격전에서 80만 명의 젊은이들을 희생물로 바친 도시가 「평화의 도시」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독일과 프랑스 지도부의 오랜 노력이 있었다. 최근엔 양국 頂上이 베르당의 공동묘지에서 만나 兩國의 화해를 다짐하기도 했다.
     
      베르당은 인구 2만 명의 작은 마을이다. 로마시대인 서기 3세기부터 게르만족과 접경한 古都였다.
    중세의 성당이 있다. 이 마을 입구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서 영어 가이드(여성)를 태웠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면서 여행단을 태운 버스는 베르당 전투가 벌어졌던 야산으로 향했다. 높이가 수백 미터에 지나지 않는 丘陵地(구릉지)였다. 달 표면처럼 움푹움푹 들어간 포탄자리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포탄자리가 하도 많아 평탄한 곳이 전혀 없는 산비탈이었다. 지금도 숲속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있다고 한다. 불발탄을 건드려 다치고 죽는 사고가 난다는 이야기였다.
     
      베르당 전투 참전자는 현재 프랑스에서 수십명만 생존해 있다고 한다. 南佛 출신 군인들이 이곳 전투에 특히 많이 참전했다. 베르당 지역에는 독일군인들의 공동묘지도 수십 개 있다.프랑스의 가장 큰 공동묘지는 야산 頂上 두모 요새 근방에 만든 것. 신원이 확인된 전사자 15000명의 무덤과 無名전사자 유골 13만명분이 보존되어 있다. 13만 명의 유골이 어떻게 보존되어 있는가. 길이 137미터의 石造 건물에는 창이 많이 나 있다. 그 창을 들여다 보았더니 안이 온통 유골더미였다. 해골, 팔 다리 뼈, 가루가 된 것 등등. 이 유골 더미 위에 石棺이 놓여져 있다. 석관안에는 유골이 없다고 한다. 높이 46미터의 충혼탑, 교회, 타고 있는 촛불...
     
      세계 戰史에서 베르당처럼 좁은 지역에서 많은 戰死者가 생긴 전투가 없다. 읍 정도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 고지전, 진지전, 포격전, 백병전으로 50만 명이 죽었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13만 명분의 유골이 꽉 들어 차 있는 거대한 석조 건물 전체가 棺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베르당 전투를 기획한 사람은 小몰트케(普佛전쟁의 원훈인 몰트케 원수의 조카)가 마른느 결전에서 패배하고 사직한 이후 참모총장이 되었던 팔켄하인 장군이었다. 그의 베르당 전략개념이란 것이 이곳을 인간 도살장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고지 점령도, 도시 점령도 아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프랑스 군인들을 이 요새지역으로 끌어들여 도륙함으로써 프랑스의 병력자원을 고갈시킨다는 무지막지한 전투였다.
     
      이 두모 묘지로 오는 산길 옆에 한 동상이 있었다. 내려서 다가가 보니 「Andre Maginot」라고 쓰여 있었다. 아, 마지노선을 만든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하는 놀라움! 마지노는 의사였는데 베르당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그는 1차세계대전이 나자 지원하여 참전했다가 부상하고 불구자가 되었다. 戰後 그는 국방장관이 되자 獨佛 국경선을 따라 마지노 요새를 건설하기로 한다. 그는 고향 베르당에서 벌어진 살육전을 장차전에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인명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어요새를 생각해낸 것이리라.
    인간이란 존재는 역시 과거와 체험의 포로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